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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을 주목한다] 『세계의 비참』(피에르 부르디외 기획, 동문선 刊)
[이책을 주목한다] 『세계의 비참』(피에르 부르디외 기획, 동문선 刊)
  • 이세영 기자
  • 승인 2001.08.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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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8-13 15:04:22
삶을 살아가는 이유는 저마다 다르다. 그러나 삶이 버겁고 어렵다는 것은 만인이 공유하고 있는 상식이다. 하지만 상식에 가려진 지난한 삶의 궤적들을 추적하고 성찰하는 일, 그것은 다름 아닌 사회학자들의 몫이다. 여기 이러한 직무를 충실히 수행해나가는 일군의 사회학자들이 있다. ‘세계의 비참’은 ‘행동하는 지성’ 부르디외를 위시한 22명의 사회학자들이 지난 3년에 걸쳐 작업한 연구결과의 집적물이다. 그들은 저술의 두께만큼이나 밀도 있는 통찰력을 바탕으로 현대사회를 촘촘히 해부해 들어간다. 흥미로운 것은 책 속에 담긴 시선이 비단 연구자들의 것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 책에는 노동자 구역의 주민들, 프랑스 북부의 가난한 청년들, 미국 슬램가의 흑인들, 하급 경찰관, 전직 사회복지부원 등 현대성의 변방에 묻혀 살아온 하층 생활인들의 시선이 차갑고 예리한 사회학자들의 시선과 눈높이를 맞추고 있다.

그들의 기본전략은 인터뷰다. 이를 바탕으로 현대 사회의 억압과 모순이 어떤 형태로 현상되고 재생산되는지를 적나라하게 폭로해 나간다. 아카데미에서 다져진 탄탄한 기본기와 저널리스트의 민첩성, 생활인의 끈기가 결합되는 지점도 이곳이다. 하지만 보다 돋보이는 것은 단연 그들의 연구방법이다. 이것은 그들의 사유가 뿌리박은 인식론적 전제들로부터 비롯된다. 그들이 볼 때 이 세계에 객관적인 대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의 관찰대상인 개인들의 주관적인 삶과 전체적인 삶을 동일시하는 치명적 오류를 피해 갈 그들만의 비기를 구사해나간다. 겉으로 보기엔 상호고립된 듯한 사람들의 일상을 통해 구체적인 삶의 原絲를 추출하고, 분리된 실가닥을 씨줄과 날줄로 촘촘히 직조해낼 원리를 규명, 전체적인 사회의 상을 재단하는 사유 방식이다. 그렇다고 무언가 대단한 독해방식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저자의 요구는 단순하다. 인터뷰에 담긴 사람들 하나하나의 일상사를 꼼꼼이 독해할 것과 이 책에 실려있는 인터뷰의 배열 순서대로 읽어 나갈 것을 권하고 있다.

이 책은 크게 세 개의 축을 따라 구성된다. 첫 번째 축은 ‘관점들의 공간’. 빈민주택 단지나 대규모 단지, 또는 수많은 교육 기관들 동일한 공간을 영유하며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있다. 물론 각각의 사람들이 처해 있는 조건은 모두 다르다. 하지만 이들은 불만과 고통을 공유하고 있다. 이들은 대치되는 관점들이 끊임 없이 상호충돌하는 동일한 공간 안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부르디외가 강조하는 바는 “수많은 고통들을 구성하고 있는 실체들은 사실상 현대 사회를 형태 짓는 동일한 생활 양식에서 주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지적은 현대사회의 분화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현대사회는 좀 더 복잡한 방식으로 더 세분화되어 간다. 그러나 개인들은 분화된 공간 밖의 세계를 점점 더 이해하지 못하며 갈수록 갈등이 증대되는 사회로 내몰리게 된다는 것이 부르디외의 견해다.

이는 두 번째 장인 ‘장소의 효과’에서 좀더 분명히 드러난다. 우선 사회적 공간의 구조와 물리적 공간의 구조가 맺고 있는 관계부터 살펴보자. 물리적 공간이 “각 부분의 상호적인 외재성에 따라 정의되는 공간”이라면 사회적 공간은 이러한 물리적 공간 안에서 다시 표현되는 2차적 공간이다. 문제는 사회적 공간이 재현되는 방식은 선명하지 않다는 점에 있다. 이를테면 계급사회에서 계급화되지 않은 공간이 존재할 수 없지만, 그것은 결코 선명한 형태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것이 가시화될 수 있는 여지는 없는가? 부르디외의 답변은 이렇다. “특정 공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행위자들의 배치와 재산의 배치 사이의 관계 속에서 정의되는, 사물화된 사회적 공간의 가치”를 이해할 때 현대의 사회적 공간의 형태는 명확해 진다는 것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그는 상징적인 폭력의 형태로 나타나는 사회적 공간의 권력에 대해서도 말한다. 이렇듯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폭력은 다 더 세련된 방식으로, 보다 더 음성화된 공간 안에서 작동하고 움직인다. 그렇다면 누가 이것을 제어할 것인가. 국가? 그러나 부르디외는 국가에 오히려 ‘직무유기죄’를 선고한다.

자유주의를 지향하는 동시에 권위로써 자신을 방어하는 국가는 자신의 이중성을 매우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합리화시킨다. 이를테면 경제적 자유주의를 정치적 자유주의의 필요충분 조건으로 삼는다거나, 국가의 개입을 ‘전체주의’의 위험성과 동일시함으로써. 오늘날 유럽에서 분배구조가 지닌 모순은 더 이상 국가가 해결해야할 과제가 아니다. 부르디외가 보기에 이들 국가는 분배의 결과를 단지 수정할 뿐이며, 빈곤한 자들을 향해 “국가의 자비로운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을 얻기 위해 노력하라”고 외칠 뿐이다.

이 책의 결론부는 음산한 분위기로 가득 차있다. 그들은 인간의 고통은 점점 증대되고 대안의 가능성은 점점 줄어드는 사회를 예견하는 듯하다. 하지만 어떻게 이러한 사회가 좀 더 세련된 방식으로 진화하면서 지속되고 있는지, 왜 개인들은 점점 더 사회에 길들여지는 쪽을 선택하는지에 대한 분석은 약하다. 과연 세계는 인간들이 제어할 수 있는 한도를 넘어 질주하고 있는 것일까.

<이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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