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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기획] 이상대학을 구상한다 ②
[연재기획] 이상대학을 구상한다 ②
  • 안길찬 기자
  • 승인 2001.08.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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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8-13 11:43:18
“불행하게도 행정가들은 대학을 다원적 민주사회로 생각하지 않는다. 행정가들은 대학을 회사, 군대, 교회, 가정조직 등과 유사한 것으로 생각한다. … 그러나 실제로 대학은 이들 조직과는 다르게 움직인다. 대학은 다원적 민주사회와 같이 작동한다. … 이 원칙이 이해되지 않으면 교수와 학생의 행동이 제멋대로이고 외고집으로 보일 테지만, 이 원칙이 이해되면 그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유능한 행정가’(Donald E. Walker, 이일용 중앙대 교수 옮김) 중에서.

미국에서 몇몇 대학의 총장을 지낸 Donald E. Walker가 던진 이 화두가 지금 한국의 대학에 곱게 들리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혹 우리는 대학이 ‘다원적 민주사회’란 사실을 종종 잊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번 곰곰이 따져보자. 대학이 결정하는 중요 사항 중 교육현장의 교수와 학생들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기회는 얼마나 되는가. 한국 대학의 내부 언로는 과연 활짝 열려 있는가.

대학에서 빚어지는 분규와 분쟁의 내용을 꼼꼼히 들여다보면 절대다수의 경우가 의사결정과 관련돼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등록금 인상에 대한 학생들의 반발, 총장선출을 둘러싼 시비, 사학법인의 전횡과 부정, 학부제를 비롯한 주요 정책을 둘러싼 마찰 등 내용은 다양하지만 결국 그 중심은 의사결정에 관한 것으로 모아진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분쟁이 의사결정의 ‘내용’보다 오히려 ‘과정’의 불합리성을 이유로 곧잘 불거진다는 점이다.

대학이 자율적 공동체이고, 자치를 근본으로 한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의사결정의 민주성은 철회할 수 없는 원칙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지적이다. ‘바쁠수록 돌아가고, 더디가도 함께 가야 한다’는 명제를 굳이 빌지 않더라도 효율적인 것이 곧 합리적인 것일 수 없기 때문이다.

대학의 의사결정 구조의 민주성을 높이기 위한 일차적인 규범은 바로 ‘법’이다. 하지만 현재의 교육관계법 어디에도 그 근거가 되는 대목은 없다. 사립대의 교수협의회가 아직까지 임의기구로 남아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법 형편이 이렇다 보니 그나마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장치들은 법 밖에서 맴돌 수밖에 없다.

그러나 공식적인 지위를 인정받지 못하더라도 대학의 의사결정 과정에 활발하게 참여하고 있는 기구들이 몇몇 대학에는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조선대, 한양대, 동아대 등이 운영중인 대학자치운영협의회(이하 대자협)를 들 수 있다. 조선대의 대자협은 지난 88년 2월 학내 분규과정의 내홍을 씻기 위해 구성된 것으로 이미 10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교협, 직원노조, 총학생회 대표들로 구성된 대자협은 매주 한번씩 회의를 가지면서, 총장선출과 관선이사 선임을 비롯한 중요한 의사결정의 통로로 활용되고 있다.

외국 대학의 경우 일방적인 의사결정이 가져올 수 있는 폐단을 줄이기 위해 여러 견제장치를 두고 있다. 미국 아이오와대의 경우 23개의 자문위원회와 2개의 학생자치기구, 3개의 교직원 자치기구, 16개의 정규위원회를 두어 총장의 일방적인 의사결정을 견제하고 있다. 프랑스 파리 8대학의 경우도 교수, 학생, 직원뿐만 아니라 외부인사까지 참여하는 행정심의회와 학술심의회를 두어 그들의 의견을 대학행정에 반영하고 있다.

돌아보면 한국의 대학만큼 의사결정에 있어 폐쇄적인 구조를 띠고 있는 곳도 드물다. 변변한 총장자문기구 조차 하나없는 대학의 현실은 이를 반증한다. 대학이 한사람의 결심이 아니라 다수의 지혜로 운영되기 위해서는 다양한 의사소통의 통로를 만드는 것이 관건이다. 그것이 곧 대학의 의사결정의 합리성을 높이는 척도이며 정도에서 벗어나지 않는 원리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대학이 다원적 민주사회라는 점을 인정한다면 긴장과 견제를 통한 새로운 대학운영의 메커니즘을 구상해 볼 때다.
<안길찬 기자>

민주적 의사결정 방식 : 더디 가도 함께 가는 대학들

●한국외대의 ‘대학평의회’
학내 구성원들이 함께 참여하는 기구는 분쟁을 치른 대학들에서 그 과정을 치유하기 위해 곧잘 만들어진다. 한국외대는 지난 98년 법인비리 문제로 홍역을 치른 이후 학내의 원만한 정상화를 위해 심의기구로 대학평의회를 구성했다. 현재 평의회는 의장인 총장과 법인, 교무위원, 교수협의회, 직원노동조합, 총동창회 대표 각각 2명, 학생대표 3명으로 구성돼 있다. 비록 심의기구이긴 하지만 대학당국과 법인대표까지 포함시킴으로써 집행력을 높이고 있다. 대학평의회의 권한은 △중·장기 발전계획안 심의 △대학운영에 관한 중요한 정책결정 사항 심의 △법인 및 대학운영의 의혹이 제기될 경우, 재적인원 1/3이상의 발의로 감사실시 △대학 자체감사 결과에 대한 보고 및 대학운영과 관련된 자료열람 등이다. 구성된 이후 지금까지 18차례의 회의를 가진 대학평의회는 현재 대학의 중·장기 발전방안 수립에 머리를 맞대고 있다.

한국외대의 대학평의회가 특별히 눈길을 끄는 것은 수직적 의사결정 구조를 탈피해 대학운영에 관계된 이들이 한 테이블에서 현안을 토론하는 자리라는 점에서다.

● 평교수의 교무위원회 참여 : 대전산업대, 성공회대

지난해 고등교육법 개정안에 포함됐다가 좌절되긴 했지만 평교수의 교무위원회 참여는 보직교수 위주의 대학운영 관행을 깰 수 있다는 점에서 교수사회의 적지 않은 기대를 불러 일으켰다. 법 개정이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이를 앞서 도입해 실천하고 있는 대학이 대전산업대와 성공회대이다. 대전산업대는 염홍철 총장이 취임하면서 이를 도입했고, 성공회대는 이미 지난해 초반부터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두 대학은 교수회가 추천하는 2명의 교수를 대학내의 최고 의사결정 회의인 교무위원회에 함께 참석시켜 평교수의 여론을 청취하고 있다. 동시에 대학의 운영상황을 전달하는 계기로 활용하고 있다. 대전산업대에선 남기완 교수(중국어과)와 배기웅 교수(산업공학과)가, 성공회대에선 박윤규 교수(유통정보학과)와 장화경 교수(일어학과)가 활동중이다. 특히 성공회대의 경우 교무위원회의 회의록을 매번 전 교수들에게 전달해 대학운영 상황을 교수들에게 면밀히 알려주고 있기도 하다.

교협과 대학당국이 일면 의견을 달리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이 제도는 서로간의 오해와 반목의 불씨를 제거하는 가교 역할을 맡고 있다는 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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