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19 18:30 (화)
연구라는 농사, ‘밭’을 만드는 연구에 기여하고 싶다
연구라는 농사, ‘밭’을 만드는 연구에 기여하고 싶다
  • 이경혁
  • 승인 2022.05.18 09:0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천하제일연구자대회 ⑩ 나의 게임연구 도전

<교수신문> 창간 30주년 특별기획 ‘천하제일연구자대회’는 30~40대 인문·사회과학 연구자들의 문제의식과 연구 관심, 그들이 바라보는 한국사회와 학계의 모습에 대해 듣는 자리다. 새로운 시야와 도전적인 문제의식으로 기성의 인문·사회과학 장을 바꾸고 있는 연구자들과 이전에 없던 문제와 소재로써 아예 새 분야를 개척하는 이들을 만난다. 어려운 상황에서 분투하고 있는 젊고 진실한 연구자들을 ‘천하제일’로 여겨도 된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연구자문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민교협 2.0’과 함께한다.(연재를 시작하며: 새 세대 한국 인문사회 연구자를 만난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연구라는 농사 그 자체보다도 
애초에 없거나 빈약한 농사지을 땅으로서의 ‘씬’을 개척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대학에서 비판적 연구가 소멸한다고 선언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럼 어디서 어떻게 이 연구를 계속해야 하나?’를 찾아나서는 일이 내게는 더 중요하다. 

세월이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디지털게임을 연구한다는 내 말에 웃음을 감추지 못하는 사람들을 적지 않게 만난다. 미디어연구나 사회학의 소재로서는 성립하겠지만 독자적인 게임연구가 가능하겠느냐는 이야기도 듣는다.

하지만  디지털게임의 영향력은 오늘날 너무 많이 커져버린 상태다. 오늘날의 주요한 사회문제로 거론되는 젠더 이슈가 가장 날카롭게, 혹은 위험천만하게 드러나는 곳도 게임을 둘러싼 영역이며, 새로운 경제시스템으로서 저항적, 비판적 해석과 실천을 위한 플랫폼자본주의, 비물질노동과 같은 개념틀의 소환을 필요로 하는 영역도 디지털게임이다. 

커져가는 게임, 비판적 접근은 여전히 부족

서브컬처 시절을 넘어 디지털게임이 대중 전반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매체로 자리했음을 보여주는 일들이 지속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게임 성우의 페미니즘 발언과 그에 대한 게임사의 사상검증을 두고 벌어진 온라인상의 페미니즘 논쟁, 게임사의 확률조작에 침묵하지 않되 직접시위 대신 전광판 트럭을 게임사 앞에 보내는 2021년의 이른바 ‘트럭시위’ 등은 변화한 대중문화콘텐츠 시장의 새로운 경제적 권력관계, 대중이라는 호명의 의미변화, 문화상품시장에서의 담론형성 과정과 같은 다양한 맥락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드러냈다. 규명하고 드러내고 주장하며 실천해야 할 일들이 미처 정리되기도 전에 또다시 쏟아질 정도로, 게임이라는 이 새로운 대중문화콘텐츠의 움직임은 역동적이다.

하지만 커진 덩치와 복잡해진 현상을 감당할 만큼의 학술 인프라가 따라가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대학에서라면, 게임의 학술적 접근을 담당할 이른바 ‘게임학과’로 불릴 만한 곳들은 대체로 게임의 제작과 유통 같은 생산 측면에서의 연구와 교육에 한정되는 양상을 보인다. 게임학과라는 이름 안에서 게임의 사회적, 문화적 역할과 현상에 대한 비판적인 접근을 다루는 과목이나 주제를 찾아보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문학, 문화학, 사회학, 페미니즘 등 다양한 분과학문들 안에서 게임이 연구주제로 다뤄지고는 있지만 이 또한 문학이나 영화처럼 해당 매체가 갖는 특유의 성질을 통해 발현되는 점에 대한 이해보다는 그저 각 분과학문이 다루는 주제를 담는 부차적 소재로서 게임이 다뤄지는 경향이 크다.

국문과가 문학만을 다루지 않고, 영화학과가 영화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듯 게임연구 또한 결국은 게임을 넘어서서 게임이 사회, 인간을 비추고 관계 맺는 방식을 다뤄야 하지만, 아직까지 그런 영역을 자임하는 곳을 대학에서는 찾기 힘들다.

연구의 중심, 꼭 대학이어야 하나?

대학의 붕괴, 특히 인문사회 영역에서의 몰락이 거론되는 지금 같은 시기에선 연구의 중심이 꼭 대학이어야 한다는 전제에 의문을 표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대학 밖에서 같은 지향을 지닌 연구자들의 모임을 통해 게임연구에의 꾸준한 도전이 이루어지고 있다. 내가 몸담고 있는 게임연구그룹인 ‘드래곤랩(가칭)’도 그런 노력으로 구성된 팀 중 하나일 것이다. 

다양한 배경과 주제를 가진, 연구자를 넘어 현업 개발자와 게이머까지를 포괄하는 느슨한 연대의 그룹으로서 ‘드래곤랩’은 오늘날 게임을 통해 드러나는 여러 문제들에 대해 비판적이면서도 건설적인 담론을 제시하고자 한다. 주요한 게임 담론을 함께 공부하고 현상을 같이 지켜보며 논의하고, 그런 성과들을 모아 출간하거나 별도의 강의를 개설하는 등의 활동을 ‘드래곤랩’은 지난 수년간 이어오며 나름의 성과들을 누적해 왔다. 

하지만 게임연구자라는 정체성으로 살아가는 나의 목표는 몇 권의 책을 내고, 몇 개의 방송을 하고, 몇 개의 강의를 만드는 것에 있지는 않다. 오랫동안 연구라는 사회적 책무의 중심을 담당해 온 대학이 그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는 시대에, 아예 학제 안에 존재하지 않았던 어떤 연구를 유의미한 크기로 키워내기 위해서는 혼자 연구 결과 몇 개를 더 내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나는 지금 게임연구에 가장 중차대한 과제는 ‘씬(scene)’의 성립이라고 생각한다.

좋은 게임연구가 많이 나오기 위해서는 당연하게도 훌륭한 인재들이 게임연구에 많이 유입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또 당연하게도 그들의 연구가 자신의 생업, 즉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직업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전통적인 대학에서 비판적이고 독립적인 게임연구의 장을 마련하는 일은 학령인구의 지속적 감소로 재정압박에 시달리며 구조조정을 강요받아 이미 존재하는 연구영역들마저도 보장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기대하기 어렵다. 설령 가능하다 해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피상적이고 실용적인 방향성으로만 흐를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씬’은 대학이라는 범주 밖을 상상하는 개념이 된다. 발상을 조금 바꿔, 대학이 연구를 지원하지 못한다고 사회 전체가 이 연구를 도외시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두고 나는 대학 밖의 자립 가능한 연구공동체의 가능성을 타진해보는 중이다.

게임문화웹진 <게임제너레이션>의 지난호 모음. 학술지와 대중지의 중간을 지향하는 이 잡지는 연구자들에게 게재비를 요구하기보다는 부끄럽지 않은 원고료를 지불하는 것을 자랑으로 삼는다. 사진=게임제너레이션 홈페이지

농사지을 땅이 없다면 개간을 먼저 생각한다

게임문화재단, 크래프톤의 후원으로 시작된 게임문화웹진 <게임제너레이션>의 기획도 그런 실천 중의 하나다. 학술지와 대중지의 중간을 지향하는 이 잡지는 연구자들에게 게재비를 요구하기보다는 부끄럽지 않은 원고료를 지불하는 것을 자랑으로 삼는다. 물론 기고 몇 편으로 연구자의 생계를 장담할 수 있을 상황은 아니지만, 적어도 <게임제너레이션>은 연구자가 투여한 만큼의 노동에 보상하지 않고, ‘실적을 쌓아야 교수가 될 수 있어’, ‘학회가 돈이 없어서 그래’와 같은 자신들도 장담 못할 변명으로 일관하는 대신 당당한 노임의 지불로 답하고자 하는 지향만큼은 구축하고 있다.

웹진 <게임제너레이션>은 기업과 재단의 후원을 통해 재원을 마련하는 단순한 방식이지만, 이 단순한 방식의 규모가 좀더 ‘스노우볼’로 굴러갈 수 있다면 앞서 이야기한 ‘씬’의 성립이 불가능한 이야기만은 아닐 거라는 생각을 한다. 그 대상이 기업이 됐건, 대학이 됐건 이러한 연구가 우리 사회에 필요한 이유를 역설하고 그 성과를 결과로 증명해 보이며 지속적인 연구지원을 가능케 하는 일련의 흐름을 나는 만들고 싶다. 이는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 그저 어려운 일일 뿐이다.

나는 남들처럼 학부를 졸업하고 바로 연구자의 길에 들어선 경우는 아니다. 당장의 생계를 위해 학부 졸업 후 15년에 가까운 시간을 샐러리맨으로 지내왔고, 그렇기에 연구자라는 정체성을 얻은 이후에도 끊임없이 이 바닥이 생업으로 가능한 상황인가에 대한 고민을 놓지 않는다. 회사 소속으로 안정된 급여와 복지혜택을 받으며 살아온 나에게 연구자의 삶은 매우 충격적이었다.

‘어쨌든 학생이잖아’라는 이름 하에 임금은 후려치기당해왔고, 심지어 연구성과의 주된 결과물인 논문게재마저도 게재비를 내야 가능한 기이한(이걸 기이하게 여기지 않는 학교구성원들이 더 문제다) 상황에 놓여있었다. 학계의 재정이 어려워서 그렇다고는 하지만, 기업은 사정이 어려워도 임금이 미지급이 되면 폐업처리를 통해 최소한의 책임이라도 진다. 대학교는, 그런가?

연구의 현실적 토대 상황이 이렇기에 연구자 타이틀을 가슴에 단, 그것도 게임연구라는 미개척지를 개간해야 하는 미션에 놓인 내가 해야 할 일은 연구라는 농사 그 자체보다도 애초에 없거나 빈약한 농사지을 땅으로서의 ‘씬’을 개척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대학에서 비판적 연구가 소멸한다고 선언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와 함께 ‘그럼 어디서 어떻게 이 연구를 계속해야 하나?’를 찾아나서는 일이 내게는 더 중요하다. 

그렇기에 샐러리맨에서 연구자로 전업한 지 수 년이 지났지만 나는 여전히 회사에 다닐 때와 비슷한 일을 하고 있다. 누군가를 만나 이 사업이 어떤 이득이 될 수 있는지를 설득하고, 그로부터 가져온 자원을 지금 하는 일에 효과적으로 쓰일 수 있도록 업무와 사람을 조직하고 운영한다. 이건 연구자의 일이 아닐 거라고 할 사람들도 있겠지만, 내겐 이것이 오히려 중요한 연구 기여다. 내 세대에 인프라만 갖춰 놓으면 내가 못 다한 연구들이야 또 다음 사람들이 해낼 수 있는 문제 아니겠는가.

그렇기에 나의 연구는 오늘도 게임연구를 지원할 가능성이 있는 회사와, 재단과, 기구와, 혹은 게이머들을 향한다. ‘씬’이 그럴듯하게 구축되는 어떤 순간을 맞이할 수 있다면, 나는 논문실적 한 편 쌓는 것보다 그것을 내 일생의 실적으로 자랑하고 싶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