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8 20:50 (일)
해리슨군사기지 특강과 '미국 대통령 20년주기 불운설'
해리슨군사기지 특강과 '미국 대통령 20년주기 불운설'
  • 김일평 코네티컷대 명예교수
  • 승인 2013.05.04 17:5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일평 교수 회고록(45) 인디애나대에서의 교수 생활 3

나는 1965년 인디애나주 블루밍턴(Bloomington)에 있는 인디애나대에서 정치학 교수 생활을 시작했다. 미국정치를 공부하는 이들 가운데 성공한 대통령과 실패한 대통령을 주제로 책을 쓴 학자도 여러 명 있다. 내가 정치학을 강의할 무렵 때마침 월남전이 시작돼 아시아정치 과목에는 100여 명의 학생이 등록했는데, 미국이 왜 월남전에 개입해야 하는지 알고 싶어 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그 당시 인디애나 주 수도 인디애나폴리스 부근에는 제9대 미국 대통령의 이름을 딴 해리슨 군사기지(Fort Harrison)가 있었다. 해리슨 군사기지에는 육군부관학교(U.S. Army Adjudant School)와 육군정보학교(U.S. Army Intelligence School) 가 있었으며, 바로 이곳에서 내게 아시아에 관련된 강의를 요청해 왔다고 앞 회에서 언급한 바 있다. 나는 전쟁에 나갈 장교들에게 아시아의 문화와 전통에 관한 내용을 3개월에 한 번씩 강의했다. 1회 강의는 3시간이었다.

우선 나는 군사기지에 위치한 정보학교에 도착했을 때 왜 군사기지를 해리슨 대통령의 이름을 따서 지었는지 물어보았다. 그들의 대답은 매우 흥미로웠다. 역대 대통령이 당한 불상사(편집자: 이른바 테쿰세의 저주.미국의 서부개척시대 당시 오하이오 강 유역 지대에서 활동하던 쇼니족의 족장이었던 테쿰세가 1813년 훗날 9대 대통령이 되는 윌리엄 해리슨이 이끄는 부대와 전투 중에 전사하면서 남긴 저주로, 미국 대통령의 임기중 사망을 예언했다고 함)도 이해할 수 있었다. 해리슨은 1841년 3월 제9대 대통령으로 취임한지 1개월 만에 폐렴으로 사망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대통령으로서 몇 개의 기록을 남겨놓았다고 했다. 첫째는 해리슨이 대통령으로 당선됐을 때 68세의 고령으로 역대 대통령 중 제일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기록에 남은 것이다. 1980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69세로 대통령에 당선된 후 최고연장자의 기록을 깨트릴 때까지 140년간 기록을 유지한 셈이다.

제9대 대통령 해리슨이 남긴 징크스

둘째 기록은 해리슨이 대통령 선거 캠페인을 할 때인데, 인디애나가 연방정부의 한 주로 승격되기 이전 해리슨은 주지사로 장기간 근무하면서 토막집 생활을 했다는 것이다. 해리슨 자신은 원래 버지니아주의 방대한 농장(Plantation) 소유자 가정 출신인데, 가출해 오하이오 주에 살고 있을 때에도 웅장한 저택에서 살았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그의 대통령 선거 이미지 메이커는 토막집에서 살았다고 선전함으로서써 동정표를 더 많이 얻어냈다는 것이다.

이른바 '테쿰세의 저주(미국 대통령 20년 주기 불운설)'로 희생됐다고 미국민들이 생각하고 있는 역대 대통령들. 그 첫 희생자는 해리슨 9대 대통령이다. 왼쪽부터 해리슨, 링컹(16대), 가필드(20대) 미국 대통령. 김일평 교수는 해리슨 대통령의 이름을 딴 '해리슨 군사기지'에서 특강을 하면서, 미국 대통령 연구에도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이미지 메이킹을 떠나 현실적 변화의 바람도 한몫 거들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1828년 대통령 선거에서 앤드루 잭슨(Andrew Jackson)이 당선된 후 중서부출신의 소박하고 청렴하며 서민적인 대통령이 당선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여론이 형성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해리슨도 그와 같은 서민적 리더를 요청하는 바람과 맞아 떨어져, 자신의 서민 이미지를 선거에 적극 활용하는 전략으로 당선될 수 있었다. 이후 제12대의 재커리 테일러(Zachary Taylor) 대통령, 그리고 제16대의 아브라함 링컨(Abraham Lincoln) 대통령도 정말 정직하고 소박한 토막집 출신이라는 이미지를 널리 홍보하고 당선된 대통령이다.

 그리고 ‘토막집으로부터 백악관에 이르기까지’라는 대통령 이미지는 점점 더 강력한 매력으로 등장하게 됐다. 해리슨 대통령이 지닌 앞의 두 기록보다 더 인상 깊은 세 번째 기록은 많은 미국인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그것은 20년 주기로 당선된 미국 대통령은 임기를 다 끝맺지 못하고 죽는다는 징크스가 있다는 것이다.

1840년에 당선된 해리슨 대통령으로부터 20년이 지난 1860년에 당선된 대통령은 공교롭게도 아브라함 링컨이었다. 링컨은 노예제도를 유지하는 것을 반대하는 정강을 내걸고 결성된 공화당의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그는 남북전쟁에서 북부를 승리로 이끌었고 노예제도를 폐지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링컨은 재선되고 남북전쟁을 종결시킨 직후인 1865년 4월 워싱턴의 배우 존 부츠의 총에 맞아 암살당했다. 

20년이 지난 1880년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제20대 대통령 제임스 가필드(James Garfield)는 정권출범 3개월 후인 1881년 7월 찰스 기도라는 사람의 총에 맞아 부상당하고 9월에 사망했다. 또 하나의 대통령 암살사건은 1901년 9월 제25대 대통령인 윌리엄 매킨리(William McKinley)도 암살당한 대통령이다. 매킨리는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된 후 대통령재임 2기의 취임식이 끝난 6개월 뒤 뉴욕 버팔로에서 개최된 박람회를 시찰하다가 무정부주의자였던 리온 솔고코스의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미국 대통령의 불운은 계속 이어졌다. 왼쪽부터 워런 하딩(29대), 프랭클린 루즈벨트(32대), 존 F. 케네디(35대) 미국 대통령. 이런 불행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에 와서 더이상 이어지지 않게 됐다.

 

1920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워런 G.하딩 대통령은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고, ‘정상으로 복귀(Return to Normalcy)’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분골쇄신 선거운동을 한 결과 압도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하딩 정권은 부패와 독직 사건이 계속 일어나서 그는 실망한 끝에 1923년 8월 병으로 사망했다. 암살은 아니었지만, 질병으로 임기중 사망한 것이다.

1940년 제32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은 1945년 4월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을 보지 못하고 병사했다. 그는 1932년 미국의 대공황이 극심했을 때 제30대 대통령으로 당선돼 미국의 경제를 복구시키고,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었기 때문에 1940년 제3선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다. 1944년의 대통령 선거에서는 제4선에 당선, 그의 임기가 막 시작했을 때 사망한 것이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경제공항을 극복하고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어 놓았을 뿐만 아니라 뉴딜(New Deal) 정책으로 미국의 빈부의 격차를 없애고, 부익부 빈익빈으로 이어지는 고식적인 자본주의 체제를 복지국가 제도로 변화시킨 대통령으로 역사에 남아있다. 그런 업적에 미국인들은 ‘제4선 대통령’이란 보답을 한 것이다. 4선 당선은 미국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미국민의 여론은 대통령의 임기를 ‘再任’(8년 임기)로 제한하는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그리하여 미국 대통령에 제4선까지 당선될 수 있었던 사람은 루즈벨트 한 사람으로 유일하게 됐다.

1960년 대통령 선거 당시의 어떤 에피소드

이렇게 기록하고보니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는 1960년 대통령 선거 때 생긴 에피소드 하나가 불현듯 생각난다. 그 무렵 나는 켄터키주에서 대학을 마치고 뉴욕 콜럼비아대학 대학원에 진학해 공부하고 있을 때였다. 대통령 선거 유세운동이 한창일 당시에 워싱턴의 조지타운대에서 공부하고 있는 박동선 씨가 나를 방문했다. 나는 그와 함께 뉴욕시내의 미국식당에 저녁식사를 하러 나갔다. 그 당시 고객을 안내하는 미국사람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게 됐다. 나는 그 미국인에게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의 닉슨과 민주당의 케네디 후보 가운데 누가 대통령이 될 것이냐고 물어 보았다. 그는 서슴지 않고 말했다. 닉슨이나 케네디 두 후보 사이에는 큰 차이가 없기 때문에 동전을 던지면 어느 쪽이 나오든 그냥 결정해서 찍겠다는 것이다. 동전의 양면이나 다름없이 두 후보는 정책면에서나 혹은 선거연설에서나 별 차이가 없기 때문에 누가 당선돼도 상관없다는 의외의 대답이었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난 후 대통령 선거는 열기를 띠기 시작했으며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닉슨과 케네디 후보는 텔레비전에서 공개 정책 논쟁(Policy Debate)을 하게 됐다. 우리는 대학의 스피치 강의시간에 디베이트(Debate)를 하는 규칙과 방법을 배우기는 했지만 미국대통령후보가 텔레비전 앞에 나와서 공개적으로 정책논쟁을 벌인다는 것은 미국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1950년대의 미국은 오늘과 같이 텔레비전이 많이 보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개개인 집에서 TV를 시청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우리 한국유학생은 선술집인 바(Bar)에 가서 맥주 한잔을 시켜놓고 텔레비전의 공개토론을 지켜보기로 했다.

1960년의 대통령 선거가 있을 때 뉴욕 콜럼비아대 부근에 있는 맥주 집(Bar)에 모여든 한국유학생은 7~8명에 불과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부통령으로 대통령을 승계하겠다는 닉슨 후보는 의기 당당해 보였다. 그 반면에 메사추세츠 주의 연방 상원의원으로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미국의 정치문화를 바꿔놓은 케네디 후보는 매우 참신한 이미지를 보였다. 닉슨은 구세대 사람을 대표하고 있었으며 귀족스타일 정치가라면, 케네디는 일반대중의 편에 서서 그들의 이익을 대변하고 보호해 주는 민중의 대통령으로 영상에 비쳐졌다. 그 후 닉슨은 ‘부자들의 가나한 대통령’이라고 낙인이 찍히고, 케네디는 ‘가난한 사람들의 부자 대통령’이라는 말도 나왔다.

케네디는 보스턴 특유의 엑센트로 매우 논리적이고 조리 있게 토론을 전개했다. 닉슨은 냉전시대의 반공 투사와 같이 냉전주의자요 대소 강경 논자와 같이 보였다. 특히 미국의 대 쿠바 정책에 관한 토론을 할 때 닉슨은 매우 강경한 논조를 전개하며 쿠바의 카스트로는 제거해야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반면에 민주당의 케네디 후보는 온건론자로서 미국의 대 쿠바정책은 카스트로 정권을 인정하고 대화와 협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전개된 TV 논쟁에서 케네디는 평화주의자와 같이 보였고, 닉슨은 전쟁을 불사하는 호전주의자의 이미지를 미국 국민의 마음속에 심어주었다.

닉슨과 케네디 두 후보의 정책토론이 끝나고 우리 한국유학생은 누가 승리했는지 궁금했다. 7~8명중 대부분인 5명은 케네디 후보가 디베이트에서 승리했다고 말하는데 두 학생은 닉슨이 승리했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들은 닉슨을 선호하는 이유로 그가 반공주의자이며 또 미국의 강경 일변도의 對共 정책이 좋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자기가 선호하는 정책과 두 후보가 토론한 내용을 객관적으로 판단해서 누가 이겼는지 승패를 결정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주관적 판단 때문에 객관성을 잃어버리고 오판하는 때도 종종 있다는 것을 이 TV 대선 논쟁을 지켜보면서 여실히 확인할 수 있었다.

미국 대통령 연구의 학문적 진전

미국 대통령에 대한 연구도 1960년에 비하면 오늘날에는 상당히 많이 발전했다. 1950년 대 까지만 해도 연구결과는 대부분 전기와 역사적인 서술이었다. 그러나 심리분석학적 연구방법론의 발전으로 대통령의 중요한 정책결정 당시의 심리학적 분석이 가능해짐에 따라, 대통령의 성격과 인성을 전적으로 엿볼 수 있는 새로운 연구가 진전됐다.

1960년 대통령 선거에서 존 케네디는 적은 표 차이로 제35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그러나 그가 3년 뒤인 1963년 11월 텍사스주 달라스에서 암살당한 역사적 사건은 너무나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케네디 암살의 범인은 리 하베이 오스왈드라는 사람인데 그는 여러 가지 불가사의한 인물이다. 그는 구 소련에도 갔다온 사람이기 때문에 소련의 첩자라고 의심도 받았다. 또 미국내의 범죄집단(마피아)의 음모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오스왈드는 그에 대한 공개재판도 열리기 전에 암살자의 총에 맞아 사망했기 때문에 오스왈드가 게네디를 암살한 정확한 동기를 알 수 없었다. 케네디 암살은 아직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정치적·역사적 사건이다.

존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한 후 미국의 학자들은 양키들의 고향인 뉴잉글랜드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더욱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뉴잉글랜드 출신 대통령의 전기도 많이 나왔다. 그러고보니 내가 뉴잉글랜드에 와서 산지도 벌서 반세기가 넘었다. 이와 같이 해리슨 대통령이 취임한지 한 달 만에 폐렴으로 사망한 후 120년 동안 20년을 주기적으로 미국 대통령의 신변에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1960년에 대통령에 당선된 케네디가 암살자의 손에 비운의 객이 된지 20년이 지난 1980년에 당선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1981년 3월 존 힝클리의 총에 맞아서 부상은 입었으나 다행히 사망하지는 않았다. 그는 69세의 최고령으로 당선됐기 때문에 해리슨 대통령의 기록을 깨고, 새 기록을 남긴 것이다. 따라서 해리슨 대통령의 불상사 이후 레이건 대통령의 불상사로 ‘미국 대통령 20년 주기 불운설’은 일단 종식됐다고 볼 수 있다.

2000년 대통령 선거에서 제45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조지 부시 대통령은 2001년 9·11 테러 폭격사건으로 워싱턴의 국방부 빌딩이 폭격 당하고 세계무역센터가 폭파됐을 뿐만 아니라 3천여 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하는 ‘국가적 불운’을 맞았지만, 대통령 자신에게는 불상사가 없었다. 해리슨의 불상사와 같은 대통령의 불상사는 레이건 대통령 시대에 이미 끝났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계속>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