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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국에서 들려온 4·19 소식 … 뉴욕한인학생회도 지지 시위
고국에서 들려온 4·19 소식 … 뉴욕한인학생회도 지지 시위
  • 김일평 코네티컷대 명예교수
  • 승인 2013.01.17 14: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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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평 교수 회고록(30) 뉴욕학생회와 뉴욕한인회 창립 1

나는 1957년에 미국의 명문 콜럼비아대 국제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마치고 박사학위를 받기위해 논문을 쓰는 과정에서 10년 가까운 세월을 뉴욕에서 보냈다. 따라서 나는 뉴욕커(NEW YORKER)라는 자부심을 갖게 됐다. 뉴욕에 5년 내지 10년 이상 살고 나면 자연히 자기는 ‘뉴욕커’라는 자부심을 갖게 되고 다른 지방에 살고 있는 사람은 시골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마치 시골에 오랫동안 살고 있던 사람은 서울사람을 맛나면 서울 ‘깍쟁이’라는 인상을 받는 것처럼, 이곳 뉴욕에서는 뉴욕커는 매우 세련되고, 인텔리(지성인)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리고 뉴욕에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을 비롯 다양한 문화시설이 집중돼 있었으니 가히 현대문명의 중심지가 아니겠는가.

필자는 한국전쟁 때문에 서울대 학업을 끝맺지 못하고 미국의 시골 켄터키(Kentucky)주에 있는 애스베리대에서 학부를 마친 후 뉴욕의 콜럼비아대 대학원에 진학했다. 그와 같은 과정은 그리 수월한 일은 아니었다. 국제연합(UN) 본부가 있는 뉴욕의 콜럼비아대에서 박사학위를 마치고 국제무대에서 활동을 해보겠다는 높은 희망과 새로운 꿈을 품고 상경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1950년대의 뉴욕에는 한국인들이 극소수에 불과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이전에 뉴욕에 정착해 살고 있는 사람은 10여명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6·25전쟁 후 뉴욕에는 한국유학생들이 많이 와서 공부하고 있었다. 김활란 박사, 오천석 박사, 장덕수 박사, 조병옥 명예박사 등 콜럼비아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한국에 돌아가서 학문의 발전과 사회발전에 공헌한 저명한 인사도 많이 있었다.

100여명 남짓했던 뉴욕의 한인사회

뉴욕에 한국인이 증가하기 시작한 것은 한국전쟁이 끝난 1953년부터라고 말 할 수 있다. 나는 서울대를 다니다가 한국동란으로 대구의 육군본부에서 연락장교후보생으로 선발돼 기초훈련을 받고 육군 중위로 임관된 후 한국전쟁에 참가했다. 그리고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서명된 직후에 육군장교에서 예편, 미국유학의 길을 떠나게 됐다고 거듭 술회해왔다. 켄터키 주에 있는 애스베리대에서 4년간 공부한 후 1957년에 졸업하고 뉴욕에 왔을 때 뉴욕에는 영주권을 받고 정착해 살고 있는 한국인은 10명 내지 20여명,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그러나 뉴욕시의 한국인 유학생수는 50여명이 넘었다. 따라서 메트로폴리탄 뉴욕에 살고 있는 한국인이라고 하면 이들 유학생들과 영주권을 갖고 정착해 살고 있던 한국인들 정도였다. 뉴욕시를 포함해 뉴욕일대에 살고 있는 이들 한인들의 수는 기껏해야 100여명에 불과하던 시절이었다.

 

학생들의 시위행렬이 경무대를 향하고 있다.  출처=http://library.419revolution.org
뉴욕의 한인사회는 유학생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고, 이들은 각 대학에 있는 한국학생회 또는 한국학생 클럽을 통해 서로 친목을 도모했다. 나는 1959년 새로 창립된 뉴욕지방 학생회 회장으로 당선됐다. 이렇듯 각 대학의 학생회는 잘 조직돼 활동을 많이 하고 있었지만 아직 한인회의 조직은 결성된 것이 없었다. 이 무렵 1960년 3월 15일 한국에서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부정이 너무도 많이 저질러져 학생들이 이 부정선거를 반대하며 데모에 나섰다. 경찰이 데모하는 학생을 총기로 진압하면서 유혈극이 빚어져 결국 4·19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역사의 사실이다. 한국내의 학생들이 데모를 하고 경찰이 이들 학생들에게 총격을 가해 부상자를 냈을 때 미국의 유학생들은 한국의 데모학생들을 동정하고 응원했다.

 

뉴욕 한인유학생들, 한국 학생 데모에 동조

뉴욕의 한국인 유학생은 한국영사관 앞에서 데모를 하자고 했으나 한국영사관이 있는 80가는 너무 좁아서 데모할 수 없었기 때문에 UN 한국대표부가 있는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앞에서 서울의 학생들 데모에 동조하는 학생들이 데모를 했다. 경찰의 총탄에 맞아서 쓰러진 학생들의 생명을 위로하기 위해 검은 색깔의 완장을 팔에 두르고 위령제를 지냈으며 이승만 독재정권 물러가라는 구호도 외쳤다.

국회앞에서 최후 결의를 하고 있는 4.19 혁명 당시 시위 학생들.  출처=http://library.419revolution.org

 

그 당시 뉴욕의 남궁 연 총영사는 이승만 박사와 매우 절친한 사람으로 1948년부터 12년 동안 뉴욕총영사직을 지키면서 한국유학생의 여권연장을 지연시키는 때도 종종 있었기 때문에 ‘독재정권의 하수인’으로 한국유학생들의 지탄의 대상이 됐다. 한국유학생은 영사관에서 여권을 연장해 주지 않으면 한국으로 귀국할 수밖에 없었고, 이것은 학업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우리 유학생들로서는 민감한 문제일 수밖에 없었다. 한국유학생들은 영사관의 말에 복종하고 여권연장을 하기 위해 벌벌 떨고 있었다. 이승만 정권의 독재정치는 뉴욕 총영사관에도 팽배해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비록 조국에서 머나먼 타국이지만 뉴욕에서 한국 유학생들이 데모를 한다는 것은, 서울에서 독재정권에 맞서 정부의 정책을 반대하는 데모를 하는 한국 학생들과 그 절박한 心情에서는 다를 것이 없는 일이었다. 한국인 유학생은 매년 여권을 연장해야 학업을 계속할 수 있는데 영사관에서 여권을 연장해 주지 않으면 한국으로 추방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병역 의무를 끝내지 않고 미국유학을 떠난 사람들은 병역기피자로 몰려서 여권연장을 거부당하는 때도 종종 있었다. 따라서 한국유학생들은 한국영사관을 비판하고 증오의 대상으로 보고 있었다. 그러나 뉴욕 총영사관에 근무하는 젊은 직원 중에는 학생들의 사정을 잘 알고 동정하며 매우 친절하게 대하고 여권문제를 잘 해결해 주는 서기관도 있었다.

1955년 조직된 뉴욕한국유학생회

4·19 학생혁명 당시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앞에서 학생데모를 주도한 것은 뉴욕지방 유학생회였다. 뉴욕에 유학생회가 조직된 때는 1955년이다. 뉴욕의 콜럼비아대와 뉴욕대 한국 유학생들이 주동이 돼, 국내 소식도 서로 나누어 들을 겸, 학생들끼리 친목을 도모하며 학술적인 토론도하고 또 한국에서 방문하는 인사들의 강연도 듣고, 학생들의 교류도 증진하자는 주장이 나와서 1955년 가을 콜럼비아대 얼홀(Earl Hall)에서 약 50명의 한국 유학생들이 모여서 뉴욕 한국유학생회를 조직했던 것이다.

초대 회장에는 콜럼비아대 대학원에 재학중인 백선기(전 한국두원산업 사장)가 뽑혔다. 1956년 제2대 회장에는 정영엽(이스트 미시간대 경제학 교수), 1957년 3대 회장에는 박무승(전 신라호텔 사장), 1948년 4대 회장에는 명태진(뉴욕부근에서 사업)등으로 이어 오다가, 1959년 김일평 제 5대 회장 말기에 4·19가 터지고, 뉴욕한인회 창립에 학생회 멤버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해 많은 역할을 하게 됐다고 언론계의 한 원로는 기록하고 있다(조종무, 『아메리카 대륙의 한인 풍운아들(상·하)』, 조선일보사, 1987~1988). 또한 뉴욕한인회가 1985년 11월에 발행한 『사반세기 뉴욕한인회』(35쪽)에도 이와 관련된 내용이 잘 기록돼 있다. 이 책은 뉴욕 한인회의 역사를 자세히 기록했기 때문에 뉴욕의 한인사회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이민역사의 자료집이라고 나는 높이 평가한다.

그리고 뉴욕한인회 창립당시 초대 서기로 활동한 이범선(롱아일랜드대학 회계학 교수)은 1960년 5월 1일 뉴욕한인회 발기 모임이 있었고, 5월 22일에는 준비위원회가 생겼으며, 6월 12일에 소집된 준비위원회는 회칙을 채택하고 창립된 뉴욕 한인회 실행위원을 먼저 선출하고 그 중에서 회장단을 뽑기로 했다고 기록에 남겼다.

당일 실행위원회 선거에서 다수 투표순으로 선출된 11명의 실행위원은 다음과 같았다. 윤치창(19표), 강한모(17표), 김일평(17표), 김준성(14표), 김배세(13표), 호기성(13표), 김형린(12표), 이범선(12표), 노재봉(12표), 한영교(11표), 손재승(11표). 그 중에 학생신분으로 뽑힌 실행위원은 김일평 뉴욕학생회장 외에 이범선과 노재봉(전 국무총리)뿐이었다고 조종무는 기록하고 있다(조종무, 『아메리카 대륙의 한인 풍운아들』 (하), 조선일보사, 1988).

뉴욕한인회 창립멤버로 참석한 나는 뉴욕한인회의 창립을 목격했고, 또 그 후의 발전을 지켜보았다. 1950년대 뉴욕에 정착해 살고 있는 한인들은 극소수에 불과했으며 뉴욕 메트로폴리탄 일대에 살고 있는 한인은 대부분이 유학생이던 시절이었다. 1960년대에 150명으로 추산되는 한국인 유학생은 정의감에 불타고 있었으며 조국의 통일을 생각하는 애국자들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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