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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선 이북 전방에서 연락장교들과 <타임>지 읽으며 공부
38선 이북 전방에서 연락장교들과 <타임>지 읽으며 공부
  • 김일평 코네티컷대 명예교수
  • 승인 2012.09.21 15: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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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평 교수 회고록(16) 미국유학준비 2

미국유학을 떠나기 위해 필요한 시험을 빠짐없이 준비하기 위해 한국 역사 공부도 많이 했다. 또 시사영어는 육군 제2군단본부에서 연락장교 몇 사람이 한자리에 모여서 <타임> 주간지와 <리더스 다이제스트> 등 시사 월간지를 읽고 공부한 것이 큰 효과를 보았다.

1952년 38도선 이북에 있는 화천 소도고미에 주둔한 제2군단의 연락장교 몇 사람은 타임지를 읽고 토론하는 시사영어공부를 시작했다. 당시 서울대 공대를 다니다가 연락장교 5기생으로 입대한 임석두 중위 (백선엽 장군 통역담당, 제대 후 한국주택공사에 근무한 후 LA에 이민), 심완섭(미8군사령부에 근무하는 동안 한국군의 육군소령으로 진급해 근무하다가 미국으로 이민와서 뉴욕에 거주), 김명환 박사(한국 육군에서 제대한 후 미국 코네티컷 주에 잇는 예일대에서 전기공학 박사를 받고 코넬대 전기공학과 교수 역임), 최태순 중위(성균관대를 졸업하고 한국정부의 해외공보관장 역임), 그리고 나를 포함해 5명은 매주 한 번씩 군목교회에 모여서 <타임>지를 읽으며 시사영어를 열심히 공부했다.

60년이 지난 오늘 아직도 내 기억에 남는 <타임>지 기사가 하나 있다. 1952년 5월에 한국정부가 선포한 계엄령과 부산 정치파동에 관한 기사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1952년 5월25일을 기해 공비토벌작전을 이유로 경남 및 전라남북도에 걸쳐 계엄령을 선포한 것이다. 그러나 계엄령은 공비를 잡는 것이 아니라 이승만 정권을 반대하는 야당 국회의원을 체포하기 위한 것이었다. 우리 제2군단의 부군단장 겸 헌병대장으로 있었든 元容德 준장을 국방부로 전출시켰다가 영남지구 계엄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원용덕 계엄사령관은 개헌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던 국회의 야당의원을 모두 체포해 감옥에 집어넣었다. 대한민국 헌법에 명시돼 있는 대통령제는 임기 4년으로서 국회의원이 선거하기로 돼 있었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 한국전쟁 와중에도 불구하고 헌법을 고치고 일반투표로 대통령을 선거하는 직선제를 만들려고 개헌을 했다는 것이다.

야당인 민주당 국회의원이 절대 다수였으며 그들은 개헌을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장기집권을 저지하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었다. 이 대통령과 자유당은 권력의 횡포와 폭력을 동원해 개헌운동을 반대하고 있는 야당의원을 억압했다. 따라서 한국의 야당인 민주당은 여당인 자유당의 장기집권을 반대하는 동시에 한국 대통령의 직선제도 적극 반대하며 이승만 대통령을 정면으로 반대하는 투쟁을 했다. 야당인 민주당 국회의원들은 국회에서 선출하는 의원내각제를 지속하지 않으면 정치혼란이 발생할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여당의 국회의원 수는 소수에 불과했고 야당의원이 대다수인 여소야대 정국을 돌파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부산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야당 국회의원을 전부 체포해 투옥하는 극단의 조치를 무리하게 발동했다. 그리고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 헌법을 국회에서 야당의원 참여 없이 여당인 자유당 의원만으로 대통령 직선제로 개헌을 통과시켰다. 따라서 대한민국 대통령은 국민의 직접선거로 선출하게 됐으며 의원 내각제는 폐지됐다. 이렇게 해서 새로 개헌된 대한민국 헌법은 일반국민이 직접 대통령을 선출하는 대통령 직선제로 가닥을 잡았으며, 이승만 대통령은 제 2대 대통령으로 재임할 수 있게 된 것이다(이와 같은 정치혼린을 언론에서는 부산정치파동이라고 기록했다).

미국의 <타임(Time)>이라는 주간지는 이 대통령에 대해 매우 비판적일 뿐만 아니라 이 대통령을 독재자로 지탄하고 한국의 민주주의 정치는 상당히 많은 후퇴를 했다는 것을 우려한다고 대서특필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60년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헌법을 또 바꾸고 종신대통령이 되는 개헌을 시도했으나 한국의 어린 학생들이 데모에 참여해서 4·19 혁명으로 변하고, 데모학생들이 경찰의 총탄에 맞아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게 됨으로써 이 대통령은 마침내 하야할 수밖에 다른 길이 없는 수모를 당했다. 이를 두고 한국의 4·19 학생혁명이라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그 당시 미국의 <뉴욕타임스>는 물론이고 <타임>과 <뉴스위크> 등 주간지를 비롯해 모든 언론매체들은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기사를 많이 썼다. 특히 <뉴욕 타임스>도 이 대통령의 독제정치를 신랄하게 비판한 언론의 하나였다. 이들 역시 사설을 통해 한국의 민주주의가 후퇴하는 것에 대해 우려를 표시했다. 그것은 미국 군대가 한국의 민주주의를 지켜주기 위해 6·25전쟁에 참전했으며, 한국인들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한국땅에 계속 주둔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은 민주주의를 말살하고 독제정치로 변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미국의 중앙정보부(CIA)는 ‘미드웨이’라는 비밀공작을 기획하고 이승만 대통령을 납치해 일본으로 망명시킨 후 장택상 총리를 차기 대통령으로 추대 하겠다는 비밀계획을 세운 일도 있었다. 그와 같은 사실은 후에 알려지게 됐다(1960년 4·19 학생 혁명 당시의 <타임>지를 참조하기 바람).

우리는 그와 같은 <타임>지 기사를 읽으면서 자유당의 부패한 정치에 저항하는 대학생들의 심정과 똑 같이 한국의 장래에 대해 우려하는 마음이 이성을 앞질렀다. 그러나 38선 이북에 주둔하고 있는 육군 제2군단 사령부의 우리 젊은 장교들은 특별한 묘안을 찾을 수가 없었다. 우리 연락장교 5명이 영어 공부를 좀 더 열심히 하고 한국의 민주주의 정치를 정착시키는 등불 역할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며 타임지를 계속해 공부했다. 그 당시의 우리 젊은 장교들은 한국의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민주주의 제도와 집행과정에 대한 공부도 많이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와 같이 ‘천로역정’ 같은 미국유학 수속의 절차를 밟은 후 나는 대한민국의 해외여행권 (번호 2924)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미국대사관의 영사과에 가서 입국사정(Visa)을 받은 후 1953년 9월 21일 부산항에서 배편으로 미국유학의 길을 떠났다.

그 당시 항공편은 한국에서 미국 서부 샌프란시스코까지 편도에 800달러였다. 서부에서 중부의 캔터키까지는 200달러였다. 따라서 나는 배편을 이용하기로 했다. 항공편보다는 반 값밖에 되지 않는 400달러였기 때문에 나는 배편으로 미국유학을 떠나게 됐다. 배는 여객선이 아니라 미국의 원조물자(농산물)을 싣고 와서 부산항에 내려놓은 다음 다시 미국의 서부로 돌아가는 ‘화물선’이었다.

그와 같이 화물을 싣고 다니는 화물선에는 선장과 항해사 등 기술직원이 사용하는 숙소 이외에 객실이 4~5개 더 있었다. 화물선 선장과 기술요원 가족들이 함께 타고 여행을 하도록 만들어진 객실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국은 전쟁지역이었기 때문에 선장과 기술요원의 가족들이 동반 할 수 없었다. 따라서 미국에 가는 유학생을 모집해 2주일동안 먹고 자면서 항해하는 것이다. 내가 탄 배에는 8명의 한국 유학생이 함께 타고 떠났다. 우리 유학생은 2주일동안 서로 사귀고 또 가깝게 지날 수 있었기 때문에 오랜 친구가 됐다. <계속>

*김일평 교수 회고록은 매주 목요일 업데이트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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