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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인 교수가 돼 ‘아시아 문제’를 가르치다
동양인 교수가 돼 ‘아시아 문제’를 가르치다
  • 김일평 코네티컷대 명예교수
  • 승인 2013.04.22 13: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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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평 교수 회고록(43) 인디애나대에서의 교수 생활 1

내가 하와이 동서문화센터에서 2년간 근무하면서 박사학위 논문을 끝마칠 때쯤인 1964년도였다. 미국본토에 있는 여러 대학에 교수직을 구하는 지원서를 보냈다.

때 마침 캔사스주립대(Kansas State University)에서 인터뷰를 하러 오라는 편지가 왔다.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캔사스주립대까지 왕복 비행기 표도 보내왔기 때문에 나는 하와이주의 수도 호놀룰루에서 캔사스주립대까지 인터뷰를 하러 갔다. 매우 친절하고 융숭한 대접이었다. 그들은 나에게 꼭 캔사스주립대에 와서 중국정치와 동아시아 국제정치를 담당해 가르쳐주기를 희망했다. 캔사스주립대에서 가르치던 푸링샤임 교수가 5년 동안 가르치는 동안 박사학위 논문을 끝마치지 못했기 때문에 테뉴어(Tenure, 종신 교수직)를 받지 못하고 떠나게 된 것이다. 나는 하와이로 돌아가서 나의 처 정현용과 상의한 후 결정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하와이로 돌아왔다.

캔사스주립대와 인디애나대 사이에서

그즈음 미국 중서부에 있는 인디애나주립대(Indiana University)에서 하와이 동서문화센터에 방문교수로 1년 동안 와 있던 시핀 교수(William Siffin)는 필자에게 새로운 뉴스 하나를 알려 주었다. 인디애나대의 정치학과에서 일본과 동아시아정부론을 담당하고 있었던 써튼 교수(Josheph Sutton)가 문리과 대학 학장으로 승진해 「동아시아 정치론」을 가르치는 자리가 하나 났으니 한번 지원 해 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인디애나대 정치학과 과장에게 나의 이력서(Curriculum Vitae)를 보내면서 추천서도 함께 보내 나를 강력하게 천거했다. 얼마 뒤 인디애나대 정치학과 과장으로부터 임명 통지서가 왔다.

김일평 교수는 이곳 유서깊은 인디애나대학에서 1965년부터 5년 동안 정치학을 강의했다.

인디애나대냐 캔사스주립대학이냐 두 대학 중 하나를 선택하고 통보하는 일은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나의 처 현용은 인디애나대에는 도서관학 대학원(Graduate School of Library Science)이 있으니 인디애나대에 가서 자기가 희망하는 도서관학 석사학위(M.A.)를 공부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큰딸 애련이는 자기가 석사학위를 공부하는 동안 서울의 어머님에게 석사학위를 끝마치는 2년 동안 키워달라고 부탁하겠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인디애나주의 블루밍턴(Bloomington)에 있는 인디애나대로 가기로 결정했다. 듣기로는 캔사스주립대의 정치학과 교수들이 매우 실망했다고 한다(인디애나 주에는 주립대학이 여러 개 있는데 인디애나대 Indiana University는 주립이라고 하지 않고 다른 주립대학은 모두 스테이트 대학State University라고 불렀다. 블루밍턴에 있는 주립대학과 테러호트에 있는 인디애나 주립대학을 혼동하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윌리엄 시핀 교수의 권유

인디애나대로 갈 수 있었던 데는 윌리엄 시핀 교수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필자가 어떻게 시핀 교수를 만났는지를 소개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필자가 홍콩과 대만에 박사학위 자료수집차 갔다가 하와이 동서문화센터에 돌아왔을 때였다. 인디애나대의 행정학과 교수로 있던 윌리엄 시핀 교수가 1년 안식년 동안 하와이 동서문화센터에서 연구하기로 하고 지난 가을부터 와 있었던 것이다.

하루는 그가 내게 다가와 점심이나 함께 하자고 말을 건넸다. 그런데 점심을 함께 하던 중 시핀 교수가 나의 박사학위 논문이 언제쯤 끝날 것이냐고 관심을 갖고 묻는 것이었다. 나는 1년 이내에 끝마치도록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인디애나 블루밍턴에 있는 인디애나대에서 동아시아 담당 교수를 구하고 있으니 한번 응모 해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넌지시 말했다. 그 이유인즉 이러했다. 일본을 전공한 조세프 써튼 교수가 일본과 중국의 정치를 오랫동안 가르치고 있었는데 그는 가을 학기부터 인디애나대 문리과대학의 학장으로 보직 임명됐기 때문에 가을 학기부터 동아시아의 정치와 외교를 가르치는 자리가 하나 생겼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원한다면 시핀 교수 자신이 강력하게 추천하겠다고 말했다. 나는 캔사스주립대로 가느냐 아니면 인디애나주립대학으로 가느냐의 선택 기로에 놓이게 됐다. 캔사스대에는 도서관 대학원(Grdauate School of Library Science)이 없었으며 또 캔사스대학 부근에도 도선관학 대학원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나는 블루밍턴에 있는 인디애나대를 선택했다. 때마침 인대애나대의 정치학과 과장 월터 라베스 교수가 일본에 출장가는 길에 하와이에 들렀다 가기로 했기 때문에 호놀룰루에서 나를 현지 인터뷰한 후 조교수로 임명할 수 있다고 했다.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된 셈이다. 내가 결심한 이유는 무엇보다 나와 결혼한 후 대학원 학업을 중단하고 나의 박사학위 논문준비에 모든 힘을 다해 내조의 공을 세우기 위해서 자기의 직업을 포기하고 있는 나의 처 현용의 도서관학 석사학위를 위해서였다. 이렇게 해서 나는 1965년 가을 학기부터 인디애나대에서 가르치기 시작했다.

아내도 인디애나대 대학원에 입학해

아내 현용은 인디애나대 대학원(도서관학)에 입학원서를 접수하고 입학 허가 편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서울의 집에는 사위의 기쁜 소식을 알려 드리고 출생한지 다섯달밖에 안 된 첫째 딸 애련(Irene)이를 어머니에게 맡기고 자기는 인디애나대의 도서관학 대학원의 석사학위를 공부하겠다고 말했다. 아내는 학위가 끝날 때까지 애련이를 키워주시겠다는 어머님의 사랑에 너무도 감격해 눈물을 쏟아냈다. 아내도 인디애나대 대학원으로부터 곧 입학 허가를 받았다.

인디애나대는 먼로 카운티 블루밍턴에 위치해있다. 자연친화적인 캠퍼스는 미국 대학들 가운데서도 특히 빼어나다.

블루밍턴에 있는 인디애나대는 중서부 10개 대학(Midwest Big 10) 중에서는 제일 아름다운 캠퍼스가 있는 대학이다. 중부의 10대은 중서부의 큰 대학이 미국식 축구경기(Foot Ball Game)를 하는 하나의 리그이기도 하다. 내가 1965년 가을학기부터 인디애나 대학의 정치학과에서 가르치기로 결정되자, 아내 역시 1965년 가을하기부터 인디애나대 대학원에서 도서관학 석사학위 (M. A.)를 받을 수 있게 입학수속을 마쳤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또 한 명의 가족 소식이 전해졌다. 하와이에서 비행기를 타고 인디애나로 오는 여행 중 둘째아이를 임신했다는 것을 알게 됐던 것이다.

우리는 블루밍턴에 무사히 도착해 미리 예약해 놓은 교수 아파트에 짐을 풀고 새학기를 맞이할 준비에 바쁘게 지났다. 아내 정현용은 대학원 수업등록을 다 끝마쳤고, 나는 강의준비를 시작했다. 인디애나대에 재직하는 교수 부인은 등록금이 면제 되는 시대였다. 우리는 매우 바쁘고 또 즐겁게 인디애나대의 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둘째 아이 금련 (Kate)를 임신했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고 첫째 딸 애련이를 한국에서 데려오기로 했다. 동생이 출생하기 전에 엄마 아빠의 곁으로 와서 사랑을 듬뿍 받으면 동생에 대한 사랑도 생길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학원 공부와 가르치는 일 때문에 아버지 노릇을 잘 하지 못하는 것이 아이들에게 너무도 미안하게 느꼈다.

인디애나 대학에서 가르친 5년 동안(1965-1970)은 매우 바쁘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때 마침 미국정부는 월남전쟁을 확대해 대학생도 징집돼 군복무 과정에서 월남전에 파견하기도 했기 때문에 각 대학의 젊은 학생들은 월남전 반대운동을 시작했다. 반전운동은 중서부의 각 대학에도 확산되기 시작했다.

반전 분위기 속에서 ‘아시아 문제’를 강의

인디애나대 정치학과에서 내가 담당했던 과목 중에 「현대 아시아의 여러 문제(Contemporary Problems of Asia)」라는 과목이 있었다. 본래는 문리과대학 학장이 된 써튼 교수가 가르치던 과목이었다.

원래 미국의 중부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미국외교정책 중 고립주의 정책(Isolationist Policy)을 지지하는 전통이 있었다. 때문에 아시아문제에 미국이 개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도 않고 또 미국의 외교정책의 원칙에도 맞지 않는다고 그들은 믿고 있었다. 미국은 다른 나라의 내정에 간섭하지도 말고 또 국제관계에서는 고립주의 정책을 선호했다. 따라서 「현대 아시아의 여러 문제」라는 과목은 하나의 교양과목으로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여해 초강대국이 됐기 때문에, 미국은 초강대국으로서의 국제문제를 해결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또 아시아의 여러 가지 정치문제에도 개입하게 된 것을 주요 내용으로 했다. 즉, 중서부 미국 대학생들에게 미국의 대 아시아 정책의 여러 문제를 설명하고 미국의 역할을 강조하는 과목이었던 셈이다. 월남전쟁이 최고도에 달했을 때인 1965년에는 100여명의 학생이 등록했다. 그리고 미국의 젊은이들이 왜 월남전에 가서 싸워야하는지 심각한 토론이 전개된 날도 있었다. 그리고 인디애나대의 대부분의 학생들은 월남전 개입을 반대하고 있었다.

인디애나 대학에서 5년 동안 국제정치와 동아시아 정치를 가르친 경험은 내 인생에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아 있다. 콜럼비아대 대학원 시절부터 한국전쟁에 관한 특강은 여러 번 해 보았지만 교수직을 임명받고 한 학기 동안의 강의준비를 하고 100여명의 학생이 등록한 과목의 시험점수를 결정하는 교수직은 처음 해 보는 경험이었다.

무엇보다 학생들의 반응도 궁금했다. 매우 좋았던 것은 동아시아의 정치를 미국 교수로부터 강의 받는 것보다 동양인 교수에게서 직접 배운다는 것이 그들에게는 실감이 더 컸던 것 같다. 미국의 중서부 지역의 학생들은 뉴욕을 비롯한 동부의 학생들과 비교하면 매우 보수적이고 마치 동양사회에서 가르치는 것과 같이 교수와 연장자에 대한 예의를 반드시 지키는 것이 나에게는 매우 이색적이었다. 내가 뉴욕에서 5~6년을 지냈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느꼈던 것도 사실이다.

처음 가르치는 국제정치와 동아시아 정치에 등록한 학생은 120명이었기 때문에 중간시험과 학기말 시험을 채점하고 또 학기말 리포트(Term Paper)를 하나하나 다 읽어가면서 코멘트를 하는 것은 매우 힘들었다. 시험 점수를 매기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특히 가르치기 시작한 초보자에게는 더욱 벅차고 힘든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과목에 등록한 학생이 50명이 넘으면 조교를 한 명씩 배당 받았기 때문에 조금 안도의 숨을 쉴 수는 있었다.

조교는 대부분 정치학과의 대학원생으로 석사학위를 끝마치고 박사학위 과정에서 논문을 준비하고 있는 대학원 학생들이었다. 조교에게는 등록금이 면제되고 생활비도 지급되기 때문에 조교수의 월급이나 조교의 월급은 별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나의 조교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특히 내가 가르치는 과목의 학생들의 시험점수를 매길 때 조교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러나 교수 생활의 경험이 축적되면서 이러한 조교의 도움도 점차 감소돼 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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