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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행정세미나에서 중국공산당 연구 단초를 찾다
개발행정세미나에서 중국공산당 연구 단초를 찾다
  • 김일평 코네티컷대 명예교수
  • 승인 2013.03.30 14: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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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평 교수 회고록(40) 하와이 동서문화센터에서 연구생활 1

우리가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한 것은 1963년 10월 30일이었다. 그것은 6월부터 10월까지 박사학위 예비시험을 준비하고 10월 하순에 콜럼비아대 대학원의 박사학위 최종 종합시험을 통과한 후였기 때문이다. 나는 11월 1일부터 동서문화센터(East-West Center)에 출근하기로 돼 있기 때문에 우선 숙소를 구해야 했다. 하와이대 캠퍼스를 걸어서 갈 수 있는 가까운 곳에 침실과 응접실이 달린 아파트를 구했다. 하와이는 겨울이 없고 일 년 내내 봄과 여름과 같은 날씨였기 때문에 난방시설은 따로 필요가 없는 곳이다. 그리고 여름에는 매우 더울 때도 있고, 또 겨울에는 가을 날씨 같이 좀 선선할 때도 있다. 우리 부부는 우선 아파트에 정착한 후 나의 직장인 동서문화센터의 고급연구소(Institute for Advanced Studies)를 찾아갔다.

하와이 도착 이튿날부터 연구소 생활 시작

하와이에 도착한 다음날인 11월 1일부터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연구실이 따로 준비돼 있었기 때문에 나는 연구를 바로 시작할 수 있었다. 연구소의 사무직원은 아침 8시부터 오후 4시 30분까지 근무하고 퇴근한다. 그러나 우리 학자들은 대개 오전 9시에 연구실에 나왔다가 점심식사는 부근의 집에 가서 할 때도 있고 또 오후에는 와이키키 해변에 가서 해수욕을 하며 즐기는 사람도 있었다. 우리 개발행정의 세미나 구성원은 프린스턴대의 그랜 페이지(Glenn Paige) 교수가 주동이 돼 아침 9시에 세미나를 시작했다. 인도 뉴델리대의 행정학 교수 메논, 파키스탄 정부의 행정차관을 지냈다는 마시 후스만 박사, 대만 정치대학의 행정 대학원 량다풍(梁大鵬) 교수, 그리고 서울대 행정대학원의 朴東緖 교수와 그랜 페이지 교수가 차례로 논문을 발표하면 나는 라포투어(Rapportour) 즉 기록 보관자로서 세미나 토론을 정리 했다.

하와이대에 있는 동서문화센터 전경. 이곳에서 김일평 교수는 중국공산당 연구의 단초를 그려가기 시작한다.

 

대만의 양 교수와 서울대 행정 대학원의 박 교수는 영어가 좀 짧아서 인도와 파키스탄의 두 교수보다 토의참가에는 적극적이지 못했지만 페이지 교수가 서울대 행정대학 창립당시 미국고문단 교수의 일원으로 있었기 때문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박동서 교수의 부인은 이화여대 영문과 졸업생이었다. 나의 아내 정형용과는 같은 대학 같은 학과 동문이었기 때문에 서로 매우 가깝게 잘 지낼 수 있었다.

하와이의 개발행정세미나에서 오전의 개발행정(Development Administration) 세미나 시간이 끝나면 나는 도서실에 가서 나의 박사학위 논문준비에 시간을 집중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내 논문을 무엇에다 초점을 맞추느냐에 따라서 논문의 방향도 다르게 전개되기 때문이다. 나는 개발행정세미나에서 배우는 조직이론을 나의 박사학위 논문에 적용해 학위논문을 집필할 수 있겠는지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그랜 페이지 교수와 도크 바네트 교수에게 문의해 보았다. 그랜 페이지 교수는 가능성이 있다고 확신했으나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자료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막연한 이상론만 전개 했다. 그 반면에 콜럼비아대의 도크 바네트 교수는 내가 적용하려는 조직이론이 과연 중국의 현실을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는데 어떠한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검토해 보라고 건의했다. 다시 말하면 이론과 현실의 결합성이 문제로 부상했던 것이다.

나는 개발행정 세미나에서 조직이론을 많이 공부했지만 그와 같은 이론을 적용해 중국의 공산당 조직을 설명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것인지도 검토해 보기로 했다. 그리고 조직이론에 대한 책을 좀 더 읽어보기로 했다. 조직이론에서 나의 논문에 적합한 자료가 ‘陳誠文庫(Chen Ch’eng Documents)’에 포함돼 있는지 검토해 보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조직이론 때문에 역사적인 사실을 왜곡한다는 것은 조직이론을 응용하지 않는 것보다 못하다는 것이다. 조직이론을 억지궁상으로 뜯어 맞춰 보려고 시간을 낭비하는 것보다는 강서시대의 행정구역과 중앙의 행정지시가 조직말단의 행정기구에 전달되는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을 구체적으로 설명해 보는 것이 어떻겠는지에 대한 문제가 제기됐다.

‘陳誠文庫(Chen Ch’eng Documents)’를 만나러 대만으로

1960년대의 박사학위논문을 읽어보면 정치행정 분야의 대부분의 논문은 자료를 이론의 틀에 맞춰 놓고 집필했기 때문에 좀 어색한 논문이라고 지적받는 경우가 있었다. 따라서 바네트 교수는 나의 논문을 이론의 틀에다 일차 자료를 맞춰 넣으려고 애쓰지 말고 우선 그와 같은 조직이론이 강서시대의 행정과 정치조직을 설명하는데 필요한 것인지 아닌지 검토한 후에 논문을 집필하라는 조언을 주었다. 그의 조언대로 나는 우선 개발행정 세미나에서 배운 조직이론을 어떻게 중국공산당 조직에 적용해 논문을 쓸 수 있겠는지 검토해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강서시대의 자료 속에서 조직이론을 적용해 중국공산당의 행정제도를 체계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지도 검토해 보기로 했다. 결론은 ‘陳誠文庫’에 수집돼 있는 자료만으로는 매우 불충분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리하여 강서시대의 ‘中國 소비에트 정부’의 부주석으로 있었던 장궈타오(張國燾)를 한번 만나서 인터뷰한 후 결정하기로 했다.

장개석밑에서 부통령을 지낸 진성 장군은 강서 소비에트 정부를 공격, 그곳에서 중국공산당 기밀문서를 다량 확보했다. 그 문서가 대만으로 옮겨져 '진성문고'로 칭단에 보관되고 있다.

 

대만 중국정부의 부통령이었던 陣誠 장군이 江西省 공비토벌 사령관으로 ‘강서 소비에트 정부’를 공격했을 때 진 장군은 그곳에서 ‘중국 소비에트 공화국’ 문서를 확보할 수 있었다. 이 문서는 국민당 정부가 중국대륙에서 철수해 대만으로 건너 올 때 함께 대만으로 옮겨졌다. ‘陳誠文庫 라는 명칭으로 대북시에서 떨어진 교외인 칭단에 보관되고 있었다. 그와 같은 공산주의 기밀문서를 찾아보기에는 상당한 보안이 필요하기 때문에 대만정부의 허가를 받아야만 열람할 수 있었다. 나는 1963년 가을 홍콩과 대만에 나의 박사학위 논문 자료수집차 갔을 때 국민당 정부의 특별 허가를 받아서 국민당 정부의 기밀문서 보관소가 있는 칭단에가서 기밀문서를 열람할 수 있었다. 기밀문서 열람에는 그 당시 대만대학에서 석사과정을 마치고 부산대에서 가르치고 있던 朴日根 교수의 도움이 컸다. 이를 계기로 우리는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서로 자주 연락도 하고, 또 박 교수는 우리 코네티컷주립대의 방문교수로 가족과 함께 와서 2년간 체류하기도 했다.

나는 홍콩에서 한 달 그리고 대만에서 한 달 박사학위 논문자료 수집을 할 때 풀브라이트(Fulbright) 연구장학금을 받았다. 왕복 경비는 물론 체제비용도 함께 포함된 장학금이라 경제적으로 문제는 없었다. 내가 영어 회화를 배울 때 ‘베러 하프(Better Half)’라는 말이 나왔을 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좀처럼 감을 잡지 못했다. 차츰 알게 된 단어이지만 참 좋은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베러 하프’를 만나게 된 사연

나의 처(Better Half)가 된 정현용 박사는 내가 콜럼비아대 대학원에 입학한 후 서신 교환으로 사귄 케이스다. 그래서 그는 나를 펜팔(Pen Pal)이라고 불렀다. 1950년대의 뉴욕에는 한국 유학생 중 남학생의 수는 여학생 수보다 두 배가 넘었기 때문에 연애결혼을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던 시절이었다. 정현용은 나의 은사인 정태시 총장이 미국을 방문하실 때 편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그녀는 영문학 책을 한국에서 구할 수 없었던 1950년대였기 때문에 나에게 편지하면서 영문학 도서를 좀 구해서 보내 달라는 부탁을 종종했다. 나는 열심히 구해서 보냈다. 그 당시에 보낸 영문학 책은 아직도 우리 서재의 책장에서 볼 수 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서신교류를 하게 됐던 것이다. 서로가 ‘펜팔’이 된 셈이다.

정현용은 이화여자중학교와 이화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화여대에 진학해 영문학을 전공하고 졸업했다. 그리고 미국 유학을 위한 국가고시에 합격한 후 미국유학준비를 하고 있었다. 마침 뉴욕주의 뉴 펄즈(New Palz)에 있는 뉴욕주립대에서 입학허가서를 받았으며 또 장학금까지 받았기 때문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미국대학으로부터 장학금(Full Scholarship)을 받는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보다 더 힘든 일이었다. 대한교련 사무총장이던 자기 아버님이 영국 런던에서 개최된 세계교육자대회에 참석했을 때, 같은 분과위원회에 함께 공동사회를 맡은 뉴욕주립대학장이 장학금을 교섭해 주었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런 용기가 났는지, 당시 30세에 가까운 노총각이었던 나는 그녀와 사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라서 나는 여자 친구를 사귈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왔다고 판단해서 즉시 그녀에게 답장을 썼다. 그녀의 아버님이 대한교육연합회 사무총장으로서 교직관계 국제회의에 여러 번 참석하고 뉴욕에 종종 들리게 되면 나는 어김없이 그 어른을 모시고 다니면서 저녁식사도 함께 하고, 또 뉴욕 시내 구경도 시켜드리곤 했다.

1960년대 초 영화「십계(Ten Commandment)」가 처음 상영됐을 때 정 총장님은 뉴요커 호텔에 묵고 계셨다. 동행도 있었지만 내가 직접 찾아가서 정 장님을 모시고 그날 오후에 시작하는 영화 「십계」를세 시간 동안 관람했다. 그리고 일본식당 ‘사이또’에 모시고 가서 저녁식사를 함께 하면서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눴다. 그 당시(1950년대)에는 한국식당이 뉴욕시에는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여행하는 한국인 손님에게는 일본 식당이 제일 인기가 있었다. 일본 식당도 뉴욕시에는 57가에 있는 후지 (Fuji)와 24가에 있는 사이또(Saito) 두 개 밖에 없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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