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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총영사로 부임한 중학 은사 … 특별한 결혼식 피로연
뉴욕 총영사로 부임한 중학 은사 … 특별한 결혼식 피로연
  • 김일평 코네티컷대 명예교수
  • 승인 2013.03.09 15: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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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평 교수 회고록(37) 뉴욕학생회와 뉴욕한인회 창립 8

나의 동반자 정현용 박사

대한교육연합회 사무총장 鄭泰時 박사의 첫째 딸 정현용은 뉴욕주립대에 유학온 지 1년 후인 1963년 6월 22일 나와 결혼식을 올렸다. 뉴욕에서 제일 크고 매우 고전적인 리버사이드 처치(Riverside Church) 소강당에서 부목사님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신부의 모든 단장은 콜럼비아대 장혜원 박사가 웨딩드레스부터 혼례의식 절차에 이르기까지 주관해 주고 보살펴 주었다. 장 박사는 연세대 장기원 부총장의 장녀로 경기여고를 졸업하고 이화여대 약학과를 졸업한 후 콜럼비아대 대학원에서 화학을 전공해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성격이 매우 온순하고 남의 일을 자기 일과 똑 같이 희생적으로 도와주는 성격을 지닌 분이다. 장 박사는 정현용 혼례식의 모든 절차를 지휘감독하며 어머니 역할을 다 했다.

리버사이드 교회에서의 결혼식이 끝난 후 리셉션(피로연)은 교회 부근에 있는 국제회관 (International House)에서 열었는데, 결혼식에 참석한 100여명의 하객이 모두 참여해 우리 둘의 결혼을 축복해 주었다. 그 당시 주한 미국대사관의 문정관으로 있다가 워싱턴에 와서 국무성의 한국과장으로 근무하고 있던 그레고리 헨더슨(Gregory Henderson)이 축사를 했는데, 매우 웅변적인 축사라고 호평을 받았다.

그의 축사가 끝난 뒤 장인어른(정태시 총장)께서는 장녀를 시집보내는데 느낀 감회를 한국식 유머를 섞어 가면서 영어로 답사를 하셨다. 어찌나 유머가 많고 또 훌륭한 스피치를 했는지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감탄을 연발했다. 자기는 딸을 다섯이나 두었는데 첫째 딸(賢溶)은 미국에 유학와서 결혼하게 되고, 덕분에 자신은 아들을 하나 얻었으니 이것을 교육자의 ‘후린지 베네핏(Fringe Benefit)’이라고 생각한다고 말 하시면서 많은 미국사람들의 폭소를 자아내게 했다. 반면 우리 한국인 하객들은 미국식 유머(조크)를 잘 몰라서 그런지 그저 어리둥절하는 모습이었다. 장인어른은 『웅변 강론』으로 부터 『당신도 스피치할 수 있다』에 이르기까지 영어로 된 스피치 기법을 한국어로 번역해서 출판했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명 연설가로 유명했다. 그리고 KBS 라디오의 「새벽 명상」에 종종 출연해 명강의를 했기 때문에 팬레터도 많이 받으신다고 들었다.

나와 정형용과의 결혼식-1963년 6월 22일 Riverside Church 에서 거행.

 

리버사이드 교회 옆에 있는 국제회관에서 열린 우리 결혼식 피로연은 그렇게 축사와 답사가 이어지면서 화기애애하게 진행됐다. 웨딩 케이크를 잘라서 서로 나워 먹고 커피 혹은 주스를 마시면서 담소를 나눴다. 뉴욕 총영사로 와 있던 장재용 총영사는 한국인 20여명을 초청해 80번가에 있는 총영사 공관에서 우리 부부를 위해 만찬 겸 피로연을 베풀어 주셨다. 장 총영사님은 정태시 총장과는 원주에서부터 초등학교(국민학교) 동창이며 죽마지우였다. 그런 사적인 인연이 있어서인지 무엇보다 매우 기쁜 마음으로 우리를 위해 만찬을 마련했던 것이다.

장재용 총영사는 일본의 식민지 통치시대(1910-1945) 원주에서 봉산 초등학교를 마치고 서울의 휘문중학교에 진학한 인물이다. 학생시절부터 운동선수로 축구와 농구를 매우 잘했다고 들었다. 집안이 부유해 농토를 소작인에게 빌려주는 지주의 아들이며 일본 동경의 中央大學 예과에 입학했다고 한다. 그리고 해방을 맞아 귀국한 후 잠시 동안 원주 판부면 단구리의 판부국민학교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다. 장 선생님의 말에 의하면 해방 후 매우 혼란스러웠던 때에 초등학교에서 어린이들을 가르치며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원주에는 단 하나 뿐인 원주농업고등학교의 교장선생으로 재직하던 정태시 선생이 장재용 선생님을 초빙해 국어와 영어를 가르치게 했다는 것이다.

장재용 뉴욕총영사와의 인연

원주농업고등학교에서 장 선생님은 농구도 매우 잘하고 또 배구선수들과 시합도 했다. 정태시 선생은 배구선수로 이름을 날리고 있을 때였다. 장 선생님은 단구리에서 자전거로 원주 정지의 농고로 출퇴근했다. 그 무렵 나는 한 시간 반 동안 걸어서 통학하던 때였다. 원주 시내를 걸어갈 때 장 선생님이 자전거를 타고 가시다가 나를 보시면 내려서 나와 함께 걸으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오래된 사진 같은 60년 전 그 시절의 기억이 아직도 가슴 한켠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장재용 선생님은 6·25 전쟁 때 부산으로 피난을 가서 운크라(UNKRA)로 불리는 한국부흥유엔기구에서 얼마동안 근무하셨다. 그와의 인연은 부산에서도 이어졌다. 미국 유학을 결심하고 준비한 뒤 나는 부산에서 미국유학 시험을 치른 뒤, 미국유학 여권을 수속해야 했다. 아무런 연고가 없던 부산에서 나는 며칠을 장 선생님 댁에 체류했다. 장 선생님은 운크라에 근무하실 때 한국외무부의 외교관 등용시험에 합격하고 서기관부터 시작해 주 뉴욕총영사로 진급해 부임하셨던 것이다. 중학교 시대의 인연 때문에 장 선생님은 우리의 결혼을 축하하는 피로연을 뉴욕 총영사관 관저에서 베풀어 주셨으니, 매우 기쁘고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때의 그 가슴 따뜻한 고마움을 우리 부부는 아직도 고이 간직하고 있다.

신혼여행은 대서양의 아트란틱 시티(Atlantic City)로 가기로 했다. 내가 한국전쟁 당시 제7기 통역장교 훈련을 대구에서 받을 때 알게 된 동기생인 정세호 씨(전두환, 노태우와 대구공고 동기동창)가 뉴욕에 와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아트란틱 시티로 전임발령을 받고 그곳에 살고 있었다. 우리가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의 결혼식에 참석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자기 자동차로 아트란틱 시티까지 운전해 ‘모시겠다’고 뜻밖의 제안을 했다.

아트란틱 시티는 도박으로 매우 유명한 카지노가 있는 곳이다. 미국 서부에는 라스베이거스가 있고 동부에는 아트란틱 시티가 있었기 매문에 도박의 쌍벽을 이루고 있는 도시이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도박을 해본 경험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카지노 같은 도박장에는 가지 않고 바다에서 해수욕을 즐기면서 2~3일 보내고 뉴욕시로 다시 돌아 왔다. 곧 본격적으로 박사학위 종합시험을 준비하고, 하와이 동서문화센터로 떠날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됐기 때문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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