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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실감한 논문 발표의 위력 … 곳곳에서 교수 채용 제의
처음으로 실감한 논문 발표의 위력 … 곳곳에서 교수 채용 제의
  • 김일평 코네티컷대 명예교수
  • 승인 2013.01.04 11: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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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평 교수 회고록(28) 콜럼비아대학원의 국제정치학 연구 1

나는 애스베리대에서 미국역사와 미국정치를 전공하고 4년간의 대학과정을 끝마친 후 대학원에 진학해 국제정치에 관한 학술연구를 좀 더 하기로 했다. 켄터키에서 4년간은 나에게 미국유학 생활의 기반을 닦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내가 일생동안 무엇을 어떻게 하면서 살아갈 것인지 여러가지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역사학과의 주임교수인 코베트 박사는 내게 “대학원에 진학해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은 후 한국에 돌아가 한국 학생들에게 미국역사를 가르치는 것도 뜻 깊은 일이다”라고 말하면서 대학원에 진학할 때 필요한 추천서를 써 주겠다고 쾌히 승락했다. 그리하여 나는 뉴욕의 콜럼비아대 대학원과 워싱턴의 아메리칸대 그리고 조지타운학대 대학원에 입학원서를 접수하고 장학금도 신청했다.

콜럼비아 대학원의 공산권 연구

콜럼비아대 대학원에 입학했을 때 될 수 만 있으며 빨리 석사학위(M.A)와 박사학위 (Ph.D.)를 끝마치고 한국에 돌아가 대학에서 후진들을 가르치겠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공부했다. 켄터키에서 대학의 학부를 끝마치고 대학원에 들어 왔기 때문에 강의를 듣고 필기하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그러나 매 과목마다 읽어야 할 과제물 즉 학술서적이 너무 많아서 매주 밤을 새워가면서 읽어야 했다. 그래도 다 읽을 수 없는 독서량이었다. 무엇이 문제인가 한 번 검토해 볼 필요가 있었다.

 

김일평 교수는 1957년 가을학기부터 콜럼비아대 대학원에서 국제정치를 공부하기 시작한다.

 

같은 클래스의 미국학생에게 물었더니 자기들도 독서량이 너무 많아서 시달리고 있는데 자신은 대학에 다닐 때 독서를 빨리 할 수 있는 속독법을 배웠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한 페이지를 한눈에 보면서 스킵하는 방법을 배우라고 귀띔했다. 정신을 집중하고 한 페이지를 왼쪽으로부터 오른쪽으로 한번 훑어보고 또 윗 쪽에서 밑으로 한번 내려다보면 일분 이내에 그 내용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가 읽고 있는 책의 내용을 대충 알고 있어야만 스킵하는 방법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속도가 느린 나의 독서방법을 고치기 위해서 속독법 강의도 들었고 또 실행도 해 보았다. 그러나 영어가 모국어인 미국학생과 영어가 외국어인 외국학생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러나 나의 책 읽기는 속독법을 배운 후 확실하게 빨라진 것은 사실이다.

첫번째 학기의 강의는 빠짐없이 들었고 또 논문 즉 텀페이퍼(과제물)도 열심히 작성했다. 과제물 작성에는 여러 책을 참조하고 서로 다른 견해를 이해하고 절충하는 방법도 배웠다. 그리고 한 과목 당 10여권의 책을 읽고 참조하고 나니 무엇인가 종합적으로 알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 1950년대의 콜럼비아 대학원에서는 한 과목당 학기말 점수가 B학점 이상 나와야 학점을 인정받을 수 있고, C학점을 받으면 학점이 나오지 않는다. 내가 등록한 「중국정치와 외교정책」에서는 A학점이 나왔고 「국제정치론」에서는 B+학점이 나왔다. 다른 한국학생들은 방학동안에 과제물을 작성해 제출하기로 해 ‘미완성(Incomplete)’이라는 무학점이 나왔다. I 학점인 경우에는 1년 이내에 과제물을 제출하지 않으면 자동적으로 낙제점수인 F가 나온다고 한다. 그러나 학기말 성적표에는 그대로 I(미완성)으로 남아있게 되는 것이다. 미완성 학점이 3개 이상 되면 교무처로부터 경고장을 받는다. 1년 이내에 페이퍼(과제물)를 내서 학점을 바꾸지 않으면 자동적으로 낙제학점(F)이 된다. 그러나 낙제 학점을 받았다는 한국 유학생은 들어보지 못했다.

브레진스키교수와 함께

콜럼비아 대학원에 와서 2년간의 공부를 마감했을 때 석사학위를 받기 위해서는 석사학위(M.A.) 논문을 써야 했다. 그래서 나는 동아시아 정치 세미나에 등록하고 석사학위 논문준비를 시작했다. 논문 제목은 「소련의 대북한 정책」으로 정했다. 마침 하버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하버드대에서 조교수로 소련정치와 동구권정치를 가르치다가 콜럼비아 대학원에 온 즈비그뉴 브레진스키(Zbigniew  Brzezinski) 교수가 포드재단으로부터 1백만 달러($1,000,000)의 연구 기금을 받아서 공산권연구소(Research Institute on Community Affairs)를 세운 무렵이었다. 그 당시의 1백만 달러는 오늘날의 화폐가치의 10배가 넘는 천만 달러 정도의 금액이었다. 브레진스키 교수는 공산권연구소에서 새로운 세미나를 시작했다. 대학원 학생 12명을 선발하고 대학원생에게 각각 공산권 국가 가운데 한 국가씩 담당하게 했다. 나는 ‘中共’과 북한의 외교관계를 연구하는 분야에서 연구 활동을 하기로 했다. 동구권 전문가 브레진스키 교수, 중국정치와 외교 분야의 전문가인 도크 바네트(Doak Barnett) 교수, 소련법률과 정치 분야의 전문가인 존 해자드(John Hazard) 교수, 소련과 동구권의 외교정책을 전문하는 알렉산더 다린(Alexander Dallin) 교수, 그리고 러시아와 동유럽의 외교사 전문가인 헨리 로버트(Henry Robert) 교수 등 쟁쟁하고 저명한 교수가 이 세미나에 참석했다.

카터 미행정부 시절 브레진스키 교수는 국가안보자문위원을 지냈다. 김일평 교수는 브레진스키 교수가 세운 '공산권연구소'와 인연을 맺게 된다.

 

「소련의 대북한 정책」을 석사학위 논문 제목으로 잡은 나는 공산권 연구 세미나에서 소련이 북한에 끼친 영향을 분석하고자 했다. 마침 북한의 제4차 노동당대회가 1960년 평양에서 개최됐다. 1953년 제3차 당대회가 있은 후 7년이 흘렀기 때문에 북한사회와 정치가 어떻게 변했는지 종합적으로 검토해보는 텀페이퍼를 쓰기로 했다. 나는 석사학위 논문을 거의 1년 이상 걸려서 정성껏 작성했다. 몰레이(James Morley) 교수는 나의 논문을 가리켜 매우 좋은 논문이라고 평가하면서 학술 계간지 <태평양 문제(Pacific Affairs, An International Review of Asia and Pacific)>에 기고해 보는 것이 좋겠다고 추천했다.

학술지 <태평양 문제>는 1928년부터 1년에 4회 발행돼 왔는데, 아시아문제에 관해서는 최고의 권위가 있는 학술 계간지였다. 1962년에 석사논문을 끝마쳤지만, 이 논문은 거의 1년이 넘게 학계의 심사를 거쳐(과연 정확하고 새로운 논문인지를 평가한 후) <태평양 문제> 1962년 봄호에 발표할 수 있게 됐다(North Korea's Fourth Party Congress, Pacific Affairs, Vol.35(1): 37?50,1962. 참고). 반세기 가끼운 세월이 흘러간 오늘 그 논문을 다시 읽어보면 착잡한 생각이 든다. 또 보완해야 할 부분도 많이 있다.

나는 석사학위를 마친 후 박사학위 심사위원회를 구성해야 했다. 후에 콜럼비아 대학에서 「일본의 시베리아 출병, 1917-1922」이라는 박사학위 논문을 쓰고 뉴욕주의 수도 알바니(Albany)시 부근에 있는 유니온 대학 (Union College)에서 가르치다 콜럼비아 대학원 일본정치 담당교수로 전임해 온 제임스 몰레이 교수도 나의 박사학위 심사교수로 합류했다. 나는 콜럼비아 대학원에 다니면서 <태평양 문제>라는 학술계간지에 훌륭한 논문을 발표하게 된 후 나의 박사학위가 언제 끝나는지 문의하며 빨리 끝내면 자기네 대학의 조교수로 채용하겠다는 대학도 있었다. 나는 미국의 학문세계에서는 학술지에 논문을 발표하는 것과 자기가 저술한 책을 출판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 영향을 주는지 처음으로 실감했다.

<태평양 문제>지에 논문 발표할 무렵

프린스턴대의 정치학과 조교수로 있는 그렌 페이지(Glenn Paige) 박사는 나에게 편지를 보내 1963년 가을학기부터 하와이의 동서문화센터(East-West Center) 고급연구소(Institute of Advanced Studies)에 함께 가서 동아시아 국가들에서 참가하는 행정학과 교수, 정치학 교수들과 함께 시작하는 세미나에 참여할 수 있는지 물었다. 나는 1963년 10월에 박사학위 종합시험에 합격한 후 박사 학위논문은 하와이에 가서 쓸 수도 있을 터이니 페이지 교수가 조직하는 세미나에 참가 할 것이라고 회신을 보냈다. 그리고 페이지 교수는 이를 흔쾌히 승락하면서 11월초에 호놀룰루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리고 나는 대학 도서관에서 아침 8시부터 점심시간을 빼고는 밤 10시까지 전공과목에 관한 책을 읽기 시작 했다. 이어 1963년 10월에 박사학위 논문을 쓰기 전에 치르는 예비 시험(Preliminary Examination for Ph. D.)을 무난히 합격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내가 계획한대로 예비시험에도 합격하고 또 하와이에 새로운 직장이 기다리고 있는 행운이 생긴 것은 나의 運이 좋아서라 아니라 1963년 6월 23일 토요일에 결혼식을 올린 內助의 공이 매우 컸기 때문이다.

김일평 교수의 석사학위논문은 당시 학술지 <태평양 문제>에 발표됐다. 이 논문 발표는 그에게 새로운 기회를 가져다 주기도 했다.

 

뉴욕의 콜럼비아 대학원에서 공부를 시작한 것은 1957년 가을 학기부터다. 켄터키의 애스베리대에서 4년 동안 학부과정을 끝마치고 국제정치를 전공할 생각으로 뉴욕시의 콜럼비아 대학원에 입학했다. 국제대학원(Graduate School of International Affairs)에서 2년간 강의를 듣고 석사학위를 받은 후 대학원에서 박사(Ph.D.) 학위과정을 이수한 후 박사학위 최종시험에 합격하면 박사 학위논문을 작성하고, 논문심사 위원회를 통과한 후 박사학위를 받는 대학원 일정이었다. 1957년 9월에 뉴욕시에 도착해 콜럼비아대 부근에 아파트를 구한 뒤 정확히 5년 뒤 나는 박사학위 시험에 통과했다.

1950년대에 콜럼비아 대학원에 등록하고 공부하고 있는 학생은 7~8명에 불과했다. 이동원 씨(1962년에 한국정부의 외무부장관 역임)가 박사학위 과정에서 최종시험에서 낙제하고 영국으로 건너가 옥스퍼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다시 시작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리고 콜럼비아 대학원의 박사학위 과정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석사학위 과정(M.A)을 끝마친 뒤 5~6년이 넘었는데도 박사학위 예비시험(논문을 쓰기 전에 보는 필기시험)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는 한국학생도 몇 명 있었다. 나는 무엇보다 공부가 목적인만큼 우선 열심히 공부해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학생운동을 해보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뉴욕의 학생사회는 내가 켄터키에서 겪었던 한국유학생들의 사회와는 매우 다른 현상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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