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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우남·우성 3대 독립운동 노선 연구한 결과는?
도산·우남·우성 3대 독립운동 노선 연구한 결과는?
  • 김일평 코네티컷대 명예교수
  • 승인 2012.12.28 16: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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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평 교수 회고록(27) 애스베리대에서의 강의와 역사 공부9

도산 안창호(1878~1938)는 세 차례에 걸쳐 미국에서 살았다. 그 첫 번째는 1902년 10월부터 1907년까지 유학을 목적으로 미국에 건너왔다가 샌프란시스코(상항)에 한인친목회와 공립협회를 창립하고 초기 이민사회의 지도자로 추대됐던 시절이었다. 그 당시의 유명한 일화가 하나 있다.

어느날 상항 길거리에서는 젊은 한인 두 사람이 상투를 잡고 서로 치고 박는 싸움을 하고 있지 않은가. 안창호는 그들의 싸움을 말리고 자초지종을 들어보았다. 그들은 인삼장사를 하고 있었는데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인삼판매 구역을 침투했다는 것이다. 안창호는 그들의 싸움을 뜯어말리고 화해를 시킨 후 그들과 함께 한인들의 생활개선운동을 시작했다. 한인들이 사는 집은 쓰레기도 안 치우고 정원의 풀도 깎지 않아서 매우 지저분했다. 도산은 한인 이민자의 가정을 하나하나 찾아다니면서 그들과 청소를 함께 하면서 집안을 깨끗하게 치우고 또 유리창에는 커튼도 달아 주었다. 그리하여 한인들이 살고 있는 주택가 일대는 매우 깨끗해졌으며 한인들의 생활개선운동이 시작됐다는 일화다. 이 내용은 한국에서도 교과서에 수록될 정도로 잘 알려진 것이다.

안창호와 국민회의 의미

두 번째는 일제강점기 초기로, 1912년 9월부터 1919년 4월까지 북미실업주식회사를 발기하고 흥사단을 조직했던 시절이다. 흥사단은 在美 한인을 교육해 도덕적으로 무장시키는 단체다. 도산 안창호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회장으로서 한국정부를 대행하는 기관이자, 미주 한인들의 정치력을 신장시키고 또 국민의 권리를 보호하는 조직과 단체를 조직했다고 인정받았다. 흥사단의 조직은 2000년대인 오늘도 존속하고 있으며 서부의 상항과 동부의 뉴욕에도 흥사단 조직이 활성화돼 월례 모임도 개최하고 있다. 나는 1990년대에 뉴욕흥사단 토요강좌에서 특강을 부탁받고 ‘한반도 통일의 전망’에 대해 특강을 하고 토론에 참여한 기억도 있다.

세 번째 도산 안창호의 渡美는 1924년 12월부터 1926년 3월까지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각료자리를 사임하고 국민대표회의를 주도한 후 대독립당 운동과 이상촌 운동을 개시하면서 그 기금을 모집하기 위해 건너온 것이다. 도산 안창호가 미국에 체류한 기간을 세 번 다 합하면 13년이고 그중 두 번째 체류기간은 7년 6개월이나 됐다.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는 1922년 1월 4일에 해체됐다. 이승만의 파벌싸움으로 하와이 지방총회는 중앙총회와 연락을 끊었다. 이승만이 임시대통령으로 자임하면서 권력투쟁을 일삼고 분열을 조장했기 때문이라고 기록돼 있다. 이와 같이 재미한인 연합단체인 국민회 중앙총회가 파괴된 것은 전적으로 이승만의 정파싸움 때문이었다고 독립운동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1919년 촬영한 대조선독립단 사진. 앞줄 가운데가 박용만이다.  사진=항일독립운동가단체연합회

이승만은 그의 지지자와 함께 1921년 3월 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를 교민단으로 변경시킴으로서 국민회를 와해시켰다. 북미 지방총회는 대한인국민회로 존속시킴으로써 중앙총회는 필요 없게 됐다는 논리였다. 중앙총회는 약 10년간 유지됐으나 한인의 최고결의기관으로서의 역할을 다 하지 못하고 해외한인들의 분열과 대립으로 말미암아 자동분해된 셈이다. 그러나 안창호가 조직한 국민회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기 이전에 창립됐으며, 해외한인의 행정부의 역할을 한 것도 사실이다.

우성 박용만과 대조선 국민군단

박용만은 강원도 철원에서 출생하고 1904년에 미국에 유학생으로 건너와 네브라스카 주의 링컨중학에서 대학예비과(Preparatory School)에서 공부했다. 1906년 정식으로 헤이스팅스 대학에서 정치학을 비롯해 육군사관학교의 정규과목을 공부하고 졸업했다. 1909년에 대학을 졸업한 후 그는 대학총장의 허가를 얻어 헤이스팅스에 한인 소년병 학교를 세웠다. 한인소년 27명의 생도를 모집한 후 개학했다. 그 학교 학생들의 대부분은 낮에는 농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박용만의 지휘아래 군사훈련을 받았다. 박용만은 일제시대에 미국대륙을 누비며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3대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다. 도산 안창호, 우남 이승만, 그리고 우성 박용만이 바로 그들이다.

. 한때 결의형제를 할 만큼 일생의 동지였던 두 사람은 독립운동 방법론과 국민회기금을 둘러싸고 대립, 결국 정적이 되고 말았다.
송재 서재필의 업적이 박용만보다 크다고 할지 모르나 민족적인 면, 상해 임시정부의 공헌도에서 볼 때 박용만을 빼놓을 수는 없다는 것이 독립운동 역사가들의 평가이다. 박용만은 안창호, 이승만과 같은 시기에 그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군대의 무력배양을 통해 무력을 바탕으로 독립운동을 독자적으로 전개한 유학생 출신의 애국자이다. 그는 많은 동지들을 규합하여 ‘대조선 국민군단’을 창설한 독립운동의 선구자다. 박용만의 군사조직은 재정문제로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지만 그 의미는 강조될 필요가 있다.

박용만은 1910년 <신한민보> 주필로 1년간 근무하면서 언론인으로서의 자질도 돋보였다. 그는 1912년 대한인국민회의 지방총회가 발간하고 있는 주간지 <신한국보(The National Herald)>의 편집인 겸 주필로 초빙돼 갔다. 그는 하와이 국민회의 지방총회가 마우이와 하와이 섬 등에 군사훈련센터를 세우고 200여명의 훈련생을 양성하고 있는 것을 통합해 ‘대 조선 국민군단’을 창설하고 오하우 섬 카이루아에 있는 아후마우농장을 사령부로 사용했다. 1914년에 군사훈련센터가 창설됐을 때의 군사훈련 생도의 수는 311명이었고, 창립식에 참석한 교포 수는 600명이 넘었다고 보도됐다.

1세대 지도자들이 던진 과제

조국이 광복된 이후에 미국에 건너온 우리 유학생 제2세대는 안창호의 교육을 통한 독립운동과 이승만의 정치외교를 통한 독립운동과 박용만의 군사노선 즉 독립군을 조직해 일본통치와 싸워서 독립을 쟁취하는 운동 등 3개 노선을 융합해서 한반도의 통일과 해외 한민족의 통합을 이룩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인지 한번 깊이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전세계에 산재해 있는 한민족의 공동체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한반도의 통일은 물론 해외 한민족의 단합도 이루고 세계 속의 한민족 공동체를 형성할 수만 있다면 성공한 해외한민족이며 통일의 꿈은 이루어질 수 있다고 확신했다. 따라서 1980년대에는 해외한민족 대회도 창설하고 매년 개최한다는 계획도 세웠다. 미국유학의 꿈을 좀 더 장기적으로 보기 위한 꿈을 세우는 것이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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