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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 끝에 스며드는 자유의 공기 … 강의 노트 필기하느라 진땀
코 끝에 스며드는 자유의 공기 … 강의 노트 필기하느라 진땀
  • 김일평 코네티컷대 명예교수
  • 승인 2012.10.26 10: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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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평 교수 회고록(19) 애스베리대에서의 강의와 역사 공부❶

미국의 대학들의 새 학기는 거의 다 9월 20일 경에 시작한다. 내가 진학하는 애스베리대학교도 9월 23일에 시작했다는 것이다. 1953년 10월 10일에 켄터키에 도착했으니 대학 강의를 시작한지 벌서 2주일이 넘었다. 미국 대학의 캠퍼스는 정말이지 아름다운 경치에 황홀한 분위기였다. 캠퍼스의 가로수에는 벌서 단풍이 물들기 시작해 붉고 노란색으로 매우 찬란한 경치로 변하고 있었다. 여학생들의 옷차림은 우리가 한국에서 씨어스 로버크 카다로그 (Sears Roecuck Catalogue)에서 보던 것과 똑 같이 매우 명랑하고 아무런 꾸김없이 자란 결백하고 순진한 얼굴들뿐이다. 우울하고 고달프게 학비를 벌기에 바쁜 우리 1950년대 한국 학생들의 표정과는 너무도 대조적이었다. 미국은 참으로 축복 받은 나라이고 미국의 국민은 참으로 행복한 민족이라는 감탄사가 내 가슴 속으로 부터 흘러 나왔다.

낯선 환경과 생활 풍습에 적응하기

한국에서 6·25전쟁 때문에 학업을 중단하고 애스베리대에서 모든 등록금과 학비를 받아서 공부할 수 있게 된 것을 무엇으로 어떻게 감사해야 될지 몰랐다. 그러나 어느 친구의 말처럼 열심히 공부해 좋은 성적을 올리고 졸업하는 것이 장학금을 지원해주는 독지가에게 보답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 나는 밤을 새워가면서 미국 학생들과 경쟁해 우수한 성적을 올려야만 대학원도 진할 수 있고, 대학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장학금을 마련해준 독지가에게 보답하는 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에서 대학에 입학했다가 전쟁 때문에 중단하고 한국 육군에서 3년간 연락장교로 복무한 후 미국에 와서 생활 풍습이 우리 한국과 전혀 다른 환경에 적응해 공부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켄터키주 애스베리대의 사무처 모습.
대학 강당 앞에서 찍은 기념사진(1953년 박상증 목사 촬영)

 

내가 공부할 강의시간은 벌서 다 등록이 돼 있었다. 한국을 떠나기 전에 편지를 보내고 상선을 타고 가기 때문에 2주일이나 늦게 도착할 것이라는 연락을 해 놓았기 때문이다. 미국역사와 미국정치론, 그리고 교양과목으로는 서양문명사와 영문학 한 강좌를 등록했다. 나는 기숙사 생활을 희망했기 때문에 학생기숙사에 들어갔다. 아침 7시에 일어나고 대학식당에 가서 아침식사를 끝내고 오전 8시부터는 채플 시간이라 대학 강당에 가서 한 시간 동안 아침예배를 드리고 설교를 듣고 나서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는 것이다.

미국의 대학강의는 한국 대학의 강의와는 매우 다른 방법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상당한 량의 독서를 요구했다. 미국역사 한 강좌에 기본적인 교과서를 읽는 이외에도 매주 200쪽의 책 한 권씩은 필수적으로 읽어야 한다. 그러니 미국역사 한 강좌에 매주 교과서 이외에 200쪽의 분량의 책 한 권을 매일 필수적으로 읽어야하기 때문에, 한 학기에 과목당 15권 내지 20권의 책은 반드시 읽게 된다.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강의는 거의 10권 내지 15권의 책을 필수적으로 읽어야 학점을 얻을 수 있다. 그 당시 한국에는 도입되지 않은 속독법을 미국대학에서는 가르치고 있었다. 필수 독서량이 너무도 많았기 때문에 시간당 독서 분량을 높이고 책읽기 속도를 증가시키는 특수 독서 방법(속독법) 강좌도 들으면서 독서의 속도를 높일 수 있는 방법을 배우지 않으면 따라갈 수 없었다.

독서법 특강까지 들으면서 강의 따라가 

한 주에 네 과목 12학점을 등록해 놓고 매일 책 읽는 것으로 시간을 보낸다. 특히 2주간 밀린 독서량을 따라 가기 위해서는 교수님의 강의가 끝나면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고 저녁식사를 끝내면 또 도서관에 달려가서 밤 12시까지 책을 읽어야만 겨우 미국 학생들을 따라갈 수 있다. 내가 좋아하는 농구 경기도 볼 시간이 없고, 또 연극이나 오락 프로그램을 보고 음악을 즐기는 시간적 여유도 누릴 수 없었다.

매일 부과되는 과제물의 독서량이 너무도 많은데 질려버린 우리 유학생들은 또 한 가지 문제에 당면하게 된다. 그것은 미국 교수의 강의를 정확히 듣고 강의 노트를 작성하는 문제였다. 나는 고등학교시절 선교사로부터 영어회화를 배웠고 또 한국전쟁 3년 동안 미국 대학을 졸업한 장교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있었기 때문에 영어회화에는 문제가 없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러나 강의를 듣고 강의노트를 작성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우선 강의를 잘 알아듣고 노트북에 요약하고 정리할 수 있다는 것은 강의 내용을 여간 잘 알아듣지 못하면 불가능한 일이다. 특히 미국 역사에 관한 지식이 매우 부족하기 때문에 강의내용을 100% 다 이해하고 노트해 놓는다는 것은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미국 학생들은 고등학교시절 미국역사 강의를 들어 자신의 역사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었다. 따라서 그날의 강의를 잘 이해하고 노트에 기록하기 위해서는 강의내용을 미리 교과서에서 읽고 가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강의를 시작한지 2주일이나 늦게 도착한 나는 강의를 50%밖에 알아들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우선 강의를 듣고 이해하는 데 정신을 집중하고자 했다. 강의 노트는 우수한 미국 학생의 노트북을 빌려서 정리해 놓고 또 교과서를 열심히 탐독해서 강의를 알아들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미국 학생들도 매우 열심히 공부한다. 놀 때는 열심히 놀고, 일할 때는 또 열심히 일하는 것이 미국인들의 생활신조다. 그러나 우리 한국 학생은 공부하는 것과 노는 것에 확실한 구분이 없다. 놀면서 공부하고, 공부하면서 노는 것이 우리들의 습관이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장교들은 한국인 장군과 장교들을 비교해보고 “한국인은 매우 게으르다”(very lazy)고 평할 때 내가 항상 대답했던 예가 하나 있다. 한국 농촌의 농민들은 새벽의 별을 보고 일을 시작하고 달이 떠야 집에 돌아온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한국인은 느리지만 꾸준히 일하기 때문에 게으르지는 않다고 대답했던 것이다. 우리는 열심히 일하고, 또 공부도 열심히 잘 한다는 것을 미국인들에게 인식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우리 한국학 생들은 공부하는 것과 휴식을 취하는 것을 잘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미국 학생들은 매우 열심히 공부하며, 놀 때와 공부할 때를 철저히 분간하기 때문에 우리 생활 습관과는 매우 다른 미국 학생들의 공부 태도를 처음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켄터키 주의 애스베리대에 등록할 때 미국 역사 강의를 듣고 싶어서 ‘드본 코벨트’ 교수의 미국사 강의 전반부에 등록했다. 미국사는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1490년대 부터 1860년 남북전쟁이 일어날 때까지를 전반부로 나누고, 남북전쟁이 끝난 1865년부터 1950년대 한국전쟁까지를 후반부로 나눠 두 학기 동안 공부해야 한다. 나는 담당교수를 찾아가 미국 역사교과서와 교재를 문의 했다. 그러나 미국역사는 매우 어려운 과목이니 1학년 때 등록하지 말고 우선 기초 과목인 ‘서양 문명사’ 두 학기를 등록해서 서양에 관한 기초지식을 쌓아 올리고, 기초영어의 창작 기법, 기초과학분야의 물리학과 화학 등 대학 1, 2 학년 때는 기초과목부터 등록하라는 조언을 들었다. 기초과목 강의를 듣고 3학년이 되면 영어도 많이 늘고 독서방법도 배워서 한 학기에 역사책을 여러 권 읽을 수 있게 됐을 때, 미국역사 강의를 등록하는 게 좋겠다는 충고였다.

'드본 코벨트' 교수의 조언과 미국사 공부

나는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를 물었다. 그 교수는, 미국사는 대학 3~4년생이 등록하는 과목이고 또 서양문화사에 관한 기초지식이 있어야만 이해하기 좋고 또 한 학기에 여러 권의 책을 읽어야만 하기 때문에, 미리 알려 준다는 친절한 조언이 돌아왔다. 그의 조언을 따라 나는 대학 1, 2학년 때는 기초과목을 등록해 공부했다. 3학년 때 미국역사 과목을 등록하고 미국역사를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1953년 3년간의 군복무를 마치고 복잡하고 어려운 미국유학 수속을 끝마치고 미국에 발을 디뎠다. 한국전쟁 당시 유학생 자격으로 미국에 온다는 것은 특권층의 자녀들이 아니고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1950년대에 미국 유학생으로 미국에 왔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국 특권층의 자녀가 아니면 굉장한 배경이 있어야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한국전쟁 당시 최전선에서 군생활 하면 다 죽는 줄만 알고 있었던 부모들은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아들의 병역을 기피하는 시대였다. 나는 대한민국 육군의 연락장교(혹은 통역장교라고도 불렀다)로 전방근무를 마치고 육군에서 명예 제대하는 수속절차를 마친 후 유학의 길을 떠나왔다.

등록금과 숙식을 제공하는 그야말로 문자 그대로 ‘Full Scholarship’이란 장학금을 받아 미국에 와서 4년제 대학의 모든 과정을 무난히 다 끝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대학원에 진학하는 과정 등 매우 복잡하고 어려운 수속절차를 거친 후 미국의 명문대인 콜럼비아대 대학원에 진학했다. 미국에 와서 공부한다는 것이 한국의 대학에서 공부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지 우리는 유학생의 경험을 통해서 하나씩 이해할 수 있었다. 또한 한국과 미국의 대학 교육제도를 비교해 볼 수도 있었으며, 한국의 문화와 미국의 문화를 비교할 수도 있었다.

내가 미국대륙에 처음 발을 딛고 넓고 넓은 대륙을 바라보면서 받았던 첫 번째 인상은 자유의 바람을 마음속 깊이 느낄 수 있었고, 무한히 넓은 공간이 있는 곳이 미국대륙이라는 사실이었다. 어쩌면 이렇게도 넓고 또 무한히 넓은 광야가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미국 땅을 처음 밟아본 사람은 누구나 다 느끼는 감상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자유스러운 느낌이다. 오랜 세월 고전문화와 역사전통에 얽매이고 구속돼 왔던 우리 한국사람 이라면 누구나 다 해방감을 마음껏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36년간의 일본제국주의 통치에서 해방 됐을 때 우리민족이라면 누구나 다 맛보았을 감격과 환희의 느낌을 여기에 와서 다시 한 번 더 느낄 수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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