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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레어드의 영어수업 … 고전보다 실용 강조
미스 레어드의 영어수업 … 고전보다 실용 강조
  • 김일평 코네티컷대 명예교수
  • 승인 2012.05.09 17: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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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평 코네티컷대 명예교수 회고록(6)

강원도 원주에는 일본 통치시대인 1926년부터 감리교 선교사 에스터 레어드(Ester Laird) 선교사가 선교사업을 벌이고 있었다. 1941년 12월 8일 일본의 진주만공격을 시작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됐을 때 일제는 한국에 나와 있는 미국 선교사를 모두 추방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 때문에 레어드 선교사(나애시덕) 선교사도 할 수 없이 미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녀가 원주로 다시 돌아온 것은 전쟁이 끝난 뒤인 1947년이었다. 그녀는 기독교 사회봉사회관을 회수하고 수리해 기독교선교사업을 다시 시작했다. 우리는 그를 '나 선생'이라고 불렀다. 羅愛施德 선생은 기독교 선교사로서 사회봉사활동을 많이 하신 분이다. 선교사업의 일환으로 우리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영어회화도 능률 있게 가르쳐 주었기 때문에 우리가 미국유학의 길을 떠날 수 있었다는 것은 연재 앞글에서 이미 여러 차례 밝힌 바 있다. 1

947년 레어드 선교사는 우리 고등학교의 영어선생은 물론 영어회화를 배우고 싶은 다른 분야의 선생님들을 위한 영어회화반도 운용했다. 그리고 겨울방학에는 고등학교 학생을 위한 영어회화 반을 시작해 영어회화를 가르쳤기 때문에 나는 레어드 선교사로부터 영어회화를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작은 인연이었지만, 이것이 훗날 내 인생의 길목을 안내한 동력이 됐으니, 대단한 인연이라고 불러야 할 듯하다.

우리 고등학교 영어선생님 가운데 송동수 선생이란 분이 계셨다. 그는 일본제국주의 식민지 통치시대에 서울 상업전문학교(해방 후에는 서울대 상과대학)를 다녔던 인텔리다. 송동수 선생은 일본군의 징집명령을 받고 학병으로 일본군에 입대해 태평양전쟁(1941~1945)에 참전하기도 했다. 그의 말을 떠올려보면 이렇다. 그는 태평양 전쟁이 끝나고 1945년에 해방된 한국에 돌아왔다. 패전국으로 전락한 일본에서 상선을 타고 부산에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부산에서 자기의 고향인 충청북도 충주로 돌아가는 기차에 승차했다. 기차간에서 미국병사를 몇 사람 만났다. 그 병사는 영어로 “두 유 해부 어 잽 후래그” (Do you have a Japanese flag?)라고 물었다. 송 선생은 미군병사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상업전문학교에서 일본선생으로부터 영어를 배우기는 했지만 이렇게 영어를 전혀 알아들을 수 없다니…… 한탄과 자괴심이 밀려왔다. 그는 자신이 일본인 선생으로부터 배웠던 영어를 극복할 필요를 느꼈다. 영어회화를 좀 더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원주 농업고등학교의 영어선생을 자원했다는 에피소드다. 송 선생님은 친척이 살고 있는 원주에 와서 원주농업고등학교의 영어선생으로 영어공부를 시작했다. 나는 중학교 3학년 때 송 선생님으로부터 영어를 배운 기억이 있다.

레어드 선교사는1948년 겨울방학을 이용해 원주 기독교사회봉사회관에 원주의 고등학교 선생들을 위한 영어 회화반 (클라스)을 설치하고 영어회화를 가르치기 시작 했다. 레어드 선생으로부터 영어회화를 배우면서 실용적인 영어회화가 필요한 것을 절실히 느낀 우리 고등학교 선생님들은 레어드 선교사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미국선교사가 우수한 고등학생들에게도 영어회화를 가르쳐 준다면 한국인 선생들이 영어회화를 가르치는 것보다 더욱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점을 들어 레어드 선교사를 설득했던 것이다. 그런 결실로 1948년 겨울방학부터 우리 고등학교 학생들은 영어회화반을 조직하고 영어회화를 배울 수 있었다. 처음에는 20~30명이 참석해 배우기 시작했으나 2주일 후에는 7~8여 명으로 줄어들었다. 그만큼 영어회화가 배우기 힘들었다는 방증일 것이다.

그러나 영어회화를 배운다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한국의 전통적인 교육방법은 일본교육의 영향으로 고전을 읽고 세계문학전집을 읽어야만 지성인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그 반면에 미국의 교육은 그와 정반대로 실용적인 영어를 공부하고 일상생활에 필요한 실용적인 책을 많이 읽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영어를 배우는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일상생활의 기본용어를 배워야 미국사람들과 회화를 시작할 수 있다. 일상생활에 필요한 영어회화는 미국사회의 문화와 생활습관에 좀더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이다. 우선 일상생활에 필요한 단어부터 많이 배우고 그와 같은 단어를 매일 사용해 생활화 할 수 있다면 영어공부는 어느정도 성공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해방 직후 이른바 한국의 지성인이라고 자처하는 인텔리들은 어려운 한문과 고전영어를 쓰는 사람, 고전적인 셰익스피어식 영어단어를 많이 아는 것이 진짜 지성인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이것은 일본 인텔리들로부터 받은 영향이기도 했다. 해방직후 한국의 인텔리들은 美軍이나 또 일반 미국사람을 만나게 되면 셰익스피어의 어려운 고전영어를 인용하면서 대화를 시작한다. 상대방인 미국사람은 한국 지성인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미국인과 한국 신사 사이의 대화는 이어질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 한국인은 미국사람들은 무식하다고 속단하고 대화를 계속하지 못한다. 그래서 한국인과 미국인 사이에는 대화가 끊겨 버린다. 우리가 북한과 미국사이의 대화나 협상에서 종종 볼 수 있는 바로 '동문서답' 식의 그 모습과 똑 같은 현상이었다.

그 당시 한국에는 지식층에 속하는 사람들은 영어의 고전인 Tales from Shakespeare 라는 책이 유행했는데 우리는 그 책을 텍스트로 채택했다. 그러나 영어회화를 가르치는 레어드 선교사는 그 책은 집에서 읽어보고 질문이 있으면 회화 반에 와서 현대영어로 질문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우리는 각자가 읽은 책의 내용을 잘 알고 그 내용을 자기 자신의 영어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하며, 영어회화를 습관화 할 수 있는 묘법이라고 배우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는 영어회화를 잘 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중학교와 고등학교에서 사용하는 교과서 즉 텍스트 북을 사용했다.

당시에는 미국에서 중 고등학교에서 사용하는 교과서를 구하기도 매우 힘들었다. 레어드 선생은 미국친지에게 연락해 교재들을 구해 주었다. 미국고등학교 교과서를 매일 한 장(Chapter)씩 읽고 그 내용을 자기 자신의 영어로 요약하는 것으로 회화 수업이 진행됐다. 영어문장을 암기해서 영작문을 짓는 것은 더욱 아니었다. 레어드 선생은 암기식 영어회화 보다 일상생활에 필요한 실용적인 영어를 배우는 것이 영어를 배우는 첫발을 딛는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미국의 생활습관과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단어를 이해하지 못하면 영어회화를 할 수 없다는 것을 배웠다. 우리말과 영어의 차이는 한국문화와 미국문화의 차이와 마찬가지다. 그와 같은 차이를 이해할 수 있다면 영어를 배우는데 기초단계는 넘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근래 한국의 영어교육은 장족의 발전이라할까 상당히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 60여 년 전 우리가 영어회화를 배울 때는 토플(TOEFL) 시험도 없었고 또 영어학원도 없었다. 미국사람을 만나면 고등학교에서 배운 영어단어를 몇 마디 사용해 회화연습을 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8·15 해방 후 우리가 레어드 선생으로부터 배운 영어회화는 우리 일생에 참으로 중요한 도구가 됐다. 내가 연락장교 시험에 합격해서 육군 장교로 임관 된 것도 레어드 선생이 가르쳐준 영어회화 덕택이다. 그리고 또 미국유학시험을 볼 때 미국대사관의 문정관이 질문하는 영어회화 테스트에도 무난히 합격해서 미국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게 된 것도 그녀의 새로운 영어교육과 희생적인 노력 때문이다. 그렇다고 레어드 선생은 영어회화를 가르치면서 그 어떤 보상도 보수도 받지 않았다. 그런 보수는 일체 없었다. 영어교육도 기독교 선교사업의 봉사정신 때문에 하는 것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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