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켄터키에서 다시 만난 이승만 대통령…조국에 공헌 당부 뭉클
켄터키에서 다시 만난 이승만 대통령…조국에 공헌 당부 뭉클
  • 김일평 코네티컷대 명예교수
  • 승인 2012.12.07 19: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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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평 교수 회고록(24) 애스베리대에서의 강의와 역사 공부6

한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는 미국의 조지 부시 대통령과 같이 미국 남부의 보수주의적 정서와 근본주의적 기독교를 한국외교 정책에 적절하게 융합해서 외교정책을 수립한 대표적인 국가원수라고 말 할 수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 남부의 기독교 보수주의자들의 반공이념을 잘 이용하면서 미국사람들의 외교적 지원과 경제원조를 얻어내고 한국전쟁을 지속시킬 수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전쟁과 똑같은 원칙을 세우고 그 원칙에 따라서 미국으로부터 경제원조와 군사지원을 얻어낸 것이다. 그는 한국전쟁의 휴전협정이 체결된 후 전후복구사업과 경제건설은 물론 군사력도 강력한 100만 대군으로 확대 강화해 놓았다고 평가 받고 있다(Robert T. Oliver, Syngman Rhee: The Man behind the Myth, 1960. 참조)

이승만 대통령의 미국방문

1954년 8월 5일 미국 시카고에 모인 우리 한국 유학생은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서 한번 악수라도 해보겠다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시카고라는 도시는 미국의 뉴욕시 다음으로 인구가 많고 중부의 수도라는 말에 걸맞은 대도시였다. 한국인 학생들은 여름방학이 되면 매년 6월부터 8월말까지 3개월간의 여름방학동안 시카고에서 썸머 잡(Summer Job)을 구해서 학비에 보태 쓰는 것이 ‘여름방학 의무’였다.

노년의 이승만 대통령이 프란체스카 여사와 함께 경무대 뜰을 거닐고 있다.

이 대통령은 7월 27일 워싱턴에 도착하고 7월31일에는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끝 마친 다음 뉴욕을 거쳐 8월초 시카고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한국전쟁 와중에서 승리도 패전도 하지 못한 미국은 휴전협정을 맺고 전쟁을 끝마치는 것이 새로 당선된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선거공약이었기 때문에 다른 길은 없었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 휴전협정을 반대했으며 북진통일만이 한국이 살 길이라고 주장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과 한마디의 협상도 하지 않고 거제도의 반공포로를 석방시켰으며 미국의 한반도 정책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그리고 그는 노골적으로 미국의 한반도 정책을 보이콧 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이승만 대통령의 휴전반대를 무마시키기 위해 미국에 초빙했다는 말도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러나 미국은 이승만 대통령의 고집을 꺾고 미국의 정책을 반대하는 그의 입장을 무마하기 위해 한미방위조약을 체결하는 것과 또 전후 복구사업을 위한 경제원조를 하겠다는 것을 약속해야 했다. 또 한국군을 대폭 증가해 군사력을 강화해 준다는 약속도 동시에 하고 이 대통령을 설득하고자 했다. 무엇보다 1953년 7월에 체결된 한미방위조약을 미국의회에서 비준하는 일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이 대통령의 방문이 필요했다. 게다가 이승만 대통령의 미국방문은 미국의 여론 형성에도 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게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생각이었다. 이런 이유에서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이승만 대통령을 국빈으로 미국에 초빙했다고 볼 수 있다.

나는 켄터키주에 있는 애스베리대에서 1년간의 공부를 마치고 시카고에 올라가서 여름방학 동안 학비를 벌기 위해 직장에서 아르바이트 일을 하고 있었다. 한국을 떠나기 전 38도선 이북인 중부전선의 최전방에서 육군 연락장교로 복무할 때, 나는 이 대통령을 몇 차례 공식석상에서 만나본 일은 있었지만 국빈 대우로 미국을 방문하는 우리 대통령을 유학생으로서 만난다는 것은 감회가 다른 일이었다. 나는 미국 땅에서 조국의 대통령을 만나는 것이 매우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부풀어 오르는 나의 가슴을 달래며 집합장소로 갔다.

썸머 잡 찾아 시카고에 모인 유학생들

그 당시 시카고에는 여름방학을 이용해 썸머 잡을 찾기 위해 몰려든 50여 명 정도의 한국 유학생이 있었다. 시카고대, 노스웨스턴대, 그리고 일리노이공대 등에 등록한 한국 유학생은 20여명 정도였고, 여름방학동안 아르바이트하기 위해서 미국중부 지방의 각 대학으로부터 시카고에 모여든 한국유학생은 30여명이 훨씬 넘었다. 그러나 뉴욕과 로스앤젤레스 다음으로 큰 도시 시카고에 모인 우리 한국학생들은 중부지방 여러 곳에 산재해 유학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로 연락도 잘 안됐으며, 또 시카고의 어느 한 곳으로 집합하는 것도 매우 힘든 일이었다.

여름방학동안 시카고에서 아르바이트하는 학생들은 주일날이 되면 시카고의 유일한 한인교회에 모여서 아침예배를 드린다. 그리고 그 교회의 목사님 사모와 여성교인들이 준비한 한국식사를 함께 하며 가깝게 지냈다. 우리들 유학생은 한국의 미래에 대해 종종 토론한 일도 있다. 시카고에서 내가 가까이 지낸 친구는 서울대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시카고대에 와서 석사학위를 공부하고 있었던 김치선(후에 서울대 법과대학장 역임)과 시카고 매코믹 신학대학에서 신학공부를 하는 백예원 목사 두 사람이었다. 우리 셋은 주말이 되면 서로 만나서 식사를 함께 나눴으며, 조국의 미래에 대해서도 종종 토론할 정도로 매우 가까운 친구로 우정이 깊어졌다.

이즈음 시카고에는 1930년대에 한국 유학생으로 건너온 정보라 씨가 초대 한인회장을 지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시카고 주재 대한민국 명예영사라는 직함도 갖고 있었다. 정씨는 치과의사로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 유학생보다 경제적으로 훨씬 더 윤택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는 시카고에 모인 우리 유학생들에게 연락하기 위해 당시 시카고에 하나 밖에 없었던 한인교회를 불쑥 찾아왔다. 그리고는 주일예배가 끝난 후 이승만 대통령이 시카고를 방문하신다는 소식을 느닷없이 광고했다.

당시 한인들은 주일날에는 시카고에 하나밖에 없는 한인교회에 모여서 오후 3시에 예배를 드렸기 때문에 한인교회에 나가야 한국사람도 만날 수 있고, 또 한국인 사회의 소식도 전해들을 수 있었으며, 한인사회의 집회 연락도 받을 수가 있었다. 1950년대 초반에 시카고에서 유일한 한인교회 담당 목회자는 감리교의 이 아무개 목사였다. 주말이 되면 우리 한인들은 교인들은 물론 교인이 아닌 학생들도 이 교회에 모여서 인사도 서로 나누고 한인사회의 소식도 전해 듣곤 했다. 교회가 신앙의 중심처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고국의 소식을 들을 수 있는 공식 창구 역할을 하기도 했던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1954년 여름 시카고를 처음 방문했을 때 한국학생들은 환영행사의 일환으로 시카고의 아름다운 번화가 미시건 애버뉴(가로수길)에서 퍼레이드(시가행열)를 벌였다. 시카고의 지방 유지들은 시카고에서 일류 호텔로 유명한 드레이크 호텔(Drake Hotel)에서 이 대통령 환영 리셉션을 개최했다. 따라서 우리 유학생도 이승만 대통령을 접견할 수 있었다. 그 당시 1950년대는 전자우편(E-Mail)도 아직 발명되지 않았고, 또 인터넷도 없었으며, 개개인의 휴대전화도 없었던 시절이다. 때문에 한인들의 연락망은 시카고의 한인교회에 모인 한국유학생들에게만 구두로 전달될 수밖에 없었다. 통신기술이 아직 발달하지 못한 구식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시건 애버뉴에서 대통령 따라 퍼레이드

드디어 이승만 대통령이 시카고에 도착하는 날이 다가 왔다. 우리는 한 손에는 태극기를 들고 또 한 손에는 미국 성조기를 들고 미시건 애버뉴에 모여서 이 대통령 일행을 기다렸다. 그리고 이 대통령의 승용차를 뒤따르면서 미시건 애버뉴를 행진했다. 우리 유학생은 드레이크 호텔에서 이 대통령의 환영 리셉션 겸 간담회가 열리는데도 참석했다. 우리는 이 대통령이 무슨 말씀을 할 것인지 매우 궁금했고 또 주최측에서 우리를 왜 불렀는지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는 조국의 초대 대통령이 시카고에 오셨다고 하니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한번 들어보자는 호기심에 가득 찬 마음으로 간담회에 참가한 것이다.

이 대통령은 내가 연락장교로서 38선 북쪽인 화천군 저수지 북방에 위치한 육군 제2군단 사령부에 복무할 때인 1952년에 처음 만나 본 일이 있었다. 이 대통령은 4년 전인 그 때 보다는 좀 더 연로해 보였다. 그리고 그는 미국식 한국말로 우리에게 웅변을 토하시며 강조하는 말이 있었다. 그의 말씀은 아직도 내 귀에 쟁쟁하다. “나도 미국유학생 출신 임네다. 우리나라는 매우 가난하고 힘이 없는 나라입네다. 한국전쟁 때문에 더욱 빈곤한 나라가 되었습네다. 여러분이 미국에서 공부하면서 기술도 배우고 전문분야에서는 무슨 기술이든 하나씩 배워 가지고 한국에 돌아와서 조국에 봉사할 수만 있다면 애국자가 되는 것입네다.” 라며 우리 유학생의 애국심에 호소했다. 전쟁으로 황폐해진 나라의 대통령이 유학생들에게 바라는 것이 공부 잘 해서 기술 한 가지씩 배워오라고 말한 것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것은 이승만 대통령의 미국 유학시대 한국유학생이라면 누구나 다 정치를 공부해서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 통치에서 벗어나고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뜻을 함께 모았던(물론 파벌싸움도 많이 했다고 들었지만) 그런 경험에서 우러나온 당부로 느껴졌다.

앞에서 둘째 줄 왼쪽 이대통령 부부, 셋째 줄 우로부터 네 번째 화살표가 필자

이 대통령은 이어 한미관계를 공고하게 다지기 위해서는 미국 친구를 많이 사귀고 그들로 하여금 한국을 많이 돕게 하는 것이 유학생들의 의무라고 강조했다. 그는 강연이 끝난 후 우리 유학생들 한 사람 한 사람과 일일이 악수를 했다. 1953년 7월 미국과 북한이 휴전협정을 서명할 때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의 공산주의에 대한 유화정책에 반대하며 휴전협정도 보이콧 했다. 그리고 이승만 대통령은 38도선을 넘어 북진을 해야만 남북통일을 실현할 수 있다고 고집을 부린 것은 우리가 다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다.

그런 대통령이었지만, 시카고에서 만난 연로한 대통령의 당부를 듣는 순간, 우리 유학생들은 무엇을 어떻게 공부할 것이며 어떤 방법으로 한국에 공헌할 수 있을 것인지 마치 도전장을 받은 것과 같이 감개무량 할 뿐이었다. 그리고 우리들은 이 대통령 부부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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