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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직전 원주농업중학교로 내려간 사연
해방 직전 원주농업중학교로 내려간 사연
  • 김일평 코네티컷대 명예교수
  • 승인 2012.05.02 17: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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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평 코네티컷대 명예교수 회고록(5)

내가 미국 대사관에서 시행하는 유학시험에 무난히 합격할 수 있었고 또 미국유학을 떠나서 미국대학과 대학원에서 공부할 수 있게 된 것도 레어드 선생으로 부터 배운 영어회화의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레어드 선생은 우리 고등학생들로부터 한 푼의 代價도 받지 않았다. 그녀는 우리 한국의 청소년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공헌했으며, 영어를 가르치는 데 모든 노력을 충실히 잘했다. 60여년이 지난 오늘날 나의 기억에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은 레어드 선생이 그 당시 열정적으로 가르친 영어교육의 효율성이다. 그녀의 희생적인 봉사생활을 생각하면 그분에 대한 고마움을 잊을 수가 없으며 존경의 마음이 스스로 우러나온다.

김일평 교수는 자신의 미국 유학이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에, 미스 레어드 선교사(나애시덕 여사)의 '실용영어' 교육이 주효했다고 말한다. 한국기독교연구소에서 펴낸 레어드 선교사 전기 겉표지.
영어회화를 배운 후 거의 반세기가 지난 1980년대에 나는 한국에서 미국으로 유학한 한국 유학생을 여러 명 만나보고 또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들의 대부분은 한국의 일류 대학을 졸업하고 군복무를 마친 후 토플시험에 응시해 매우 우수한 성적을 거둬 미국대학 혹은 미국 대학원에 입학허가를 받고 온 대학원 학생들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뛰어난 토플 성적과 GRE (Graduate Record Examination) 점수를 미국 대학원 입학원서에 첨부해 보낸다. 나는 함께 한국 유학생들의 입학원서를 심사했던 동료 교수들은 나에게 "한국 학생들은 다른 나라 어느 외국학생들보다 토플 성적이 매우 우수하다"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우수한 대학교 성적과 500점이 넘는 토플시험 점수, 그리고 뛰어난 GRE 성적으로 입학허가를 받고 대학원에 진학하는 학생들이지만, 대학원 세미나에서 영어를 자유롭게 말하며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학생은 그리 많지 않다. 그들은 대학원 세미나에서 영어회화를 잘 하지 못했기 때문에 벙어리 신세를 면치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나는 대학원 세미나에서 한국학생들에게 "자기 자신 의견을 얘기해 보라"고 말하면 그들은 대부분 머리속에 암기 해 두었던지 아니면 마치 답장을 써서 암기한 영어문장을 암송하는 영어를 사용하는 것이었다. 내가 옆에서 듣기에도 너무도 답답하고 또 민망할 때도 종종 있었다.

한국에서 토플시험과 GRE 시험성적을 올리기 위해 영어학원에서 공부하는 영어는 암기식 영어 교육이기 때문에 실제로 영어회화를 잘 할 수 있는 보장은 없다. 물론 30여년 전의 일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경험을 통해서 외국학생의 영어교육 문제를 인식한 미국의 대학들은 한국 학생들의 영어평가기준을 바꾸기도 했다. 따라서 한국에서는 대학생들이 자신의 생각을 영어로 표현할 수 있게끔 교육방법을 빠른 시일 내에 바꾸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 내가 강원도 원주에서 미국선교사로부터 배운 영어의 발음과 회화방법은 60년이 지나갔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영어교육에는 큰 변화가 없는 것 같은 느낌이다. 60년이 지난 오늘까지 영어교육의 문제점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점차로 인식하게 됐다. 그리고 우리 동료 교수들은 한국 유학생들의 딜레마를 동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나의 동료 교수들은 "한국 학생들은 매우 우수한데 한국의 영어 교육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며 한국인 유학생들에 대한 동정심도 생겼다"라고 말한다. 그들은 한국의 영어교육이 실용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유학생들의 영어'를 통해 눈치 챈 것이다. 최근 한국 유학생으로부터 전해들은 말에 의하면 한국의 대학에서도 미국의 일상생활 영어를 중심으로 영어교육을 한다는 것이다. 이들의 말을 들으면서 어느 정도 안심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한국의 영어교육은 미국식으로 많이 변하고 있다는 사실도 인식하게 됐다. 한국의 영어교육도 반세기전 우리가 영어교육을 받을 때와 비교하면 장족의 발전을 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일제시대의 중학교 교육

내가 中·日戰爭 시대(1937-1945)에 일본이 중국을 침투공격하고, 1941년 12월 8일에는 진주만 공격을 시작해 제2차 세계대전을 시작한 1940년대에 서울에서 K 중학교를 다니고 있을 때다. 미군 B-29 폭격기가 서울 상공을 날아오고 있었으며, 곧 서울을 폭격할 것이라고 일본정부는 선전하면서 서울 시민 대부분을 지방으로 소개시킨 일이 있었다. 그때 나는 강원도 원주에 단 하나밖에 없었던 원주 농업중학교로 전학했다. 가정 형편도 서울유학을 더 계속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은 완전히 패망하고 조선(한국)은 해방됐다. 36년간의 일본 식민통치와 함께 일본식 교육이 종막을 내렸다. 그러나 일본 식민통치 시대에 내가 받은 교육은 문자 그대로 군사교육이나 다름이 없었다. 나는 일정시대에 국민학교와 중학교 과정 일부를 일본선생으로부터 배웠다. 때문에 나는 일본어 책을 읽을 수 있었고, 또 일본 소설책과 신문 잡지도 자유롭게 읽을 수 있었다.

중일전쟁은 1931년 일본이 만주를 침략함으로써 시작됐다. 그리고 10년 후 1941년 12월 8일에는 일본이 미국 영토인 하와이의 진주만을 공격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졌다. 1930년대의 중일전쟁은 1940년대에는 美?日전쟁으로 확대됐고, 이윽고 제2차 세계대전으로 확대됐을 때, 우리 중학생은 공부는 모두 집어치우다시피 뒷날로 미루고, 근로봉사에 참여했다. 우리 중학생은 일본이 운영하는 병기공장에서 일했다. 또 시골 농촌에 가서 고구마를 심고 또 쌀을 생산하는 모심기에도 참여했다. 그것은 젊은 학생들의 노력 동원이었다. 우리들은 때로는 부평에 있는 병기공장에 배치돼 총과 총탄 그리고 포탄을 만드는데도 동참했다. 일부 중학생들은 농촌에 내려가서 군량미를 생산하는데 일조하기도 했다.

나는 서울에서 하숙하면서 공장이나 농장에서 일하는 것보다 원주의 집으로 내려가서 원주농업중학교(일제시대에는 4년제, 해방 후에는 고등학교를 포함해서 6년제)에 다니기로 했다. 그 당시 강원도에는 춘천사범학교가 제일 인기가 있었다. 그것은 사범학교 5년간의 학업을 졸업하면 초등학교 선생으로 임명되고, 월급을 받으며 가족을 부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범학교는 집안이 가난하고 매우 우수한 학생들이 많이 지망해 초등학교 선생이 되기를 희망했다. 일본의 식민지 정책으로 조선의 각 도청 소재지에는 사범학교가 하나씩 설립됐다. 사범학교 제도는 소학교(국민학교) 교사를 배출하는 교육기관이었다. 한반도의 13개 도청 소재지에는 13개의 사범학교가 설립돼 경쟁이 매우 심했다. 일제 시대의 사범학교에서는 수업료와 학비, 기숙사비와 학생들의 제복을 포함해 모든 비용은 관비로 지급됐기 때문에 무료였다. 그만큼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교육을 통해서 한국과 같은 식민지의 국민을 일본화 시키는데 전력을 다 했던 것이다.

그외 직업학교가 있었는데 공업중학교를 직업학교라고 불렀다. 그리고 농업중학교, 상업중학교, 인문중학교의 경우 강원도에는 춘천중학교 하나 밖에 없었다. 일반적으로 부잣집에서는 아들을 춘천중학교에 보내고, 중학교 5년제(대동아전쟁 때는 4년제로 단축함)를 졸업한 후 일본 본토의 대학에 유학을 보내는 것이 유행이었다. 나의 외사촌 형은 춘천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의 '메이지 다이가꾸(明治大學)'에 진학했다. 1941년 大東亞戰爭이 나기 직전의 일이다. 그러나 대동아전쟁이 일어난 후에는 대학제도가 전시체제로 변했다. 그리고 중학교제도에도 변화가 생겨서 5년제 중학교를 1년 단축해 4년제로 바뀌었다. 그것은 한국의 청소년들을 일본군에 입대시키기 위한 조치였다.

바로 이러한 시기에 나는 더 이상 서울에서 공부할 수 있는 형편에 처해 원주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부모님이 해방 직전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학비조달이 문제였다. 결국 나는 더 이상 학비와 하숙비를 조달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렇게 시름과 좌절 속에서 선교사로부터 영어를 배우던 원주농업고등학교 2학년 때 해방을 맞았다. 원주에서 8?15 해방을 맞이한 나의 감격을 어찌 다 펜으로 쓸 수 있겠는가. 다만 그 때 그 감격과 삶의 순간들은 반세기가 훨씬 넘은 오늘까지도 생생하게 남아있을 뿐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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