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19 19:15 (금)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그리고 꿈틀대는 한인사회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그리고 꿈틀대는 한인사회
  • 김일평 코네티컷대 명예교수
  • 승인 2013.02.08 11:4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일평 교수 회고록(33) 뉴욕학생회와 뉴욕한인회 창립 4

한말 고종시대에 먹고 살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온 한인들과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 통치시대(1910~1945)에 미국으로 옮겨온 한인들은 주로 하와이 사탕수수 밭이나 파인애플 농장에서 노동자로 일했다. 미국본토에는 일본 식민지 통치시대에 유학생으로 건너와서 미국에 정착한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미국의 한인사회는 도산 안창호 선생이 이끌고 있는 국민회와 이승만 박사의 태평양 동지회의 두 계파로 나눠져서 파벌싸움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조의 당파싸움을 연상케 했다. 이승만계의 동지회와 안창호계의 흥사단간의 싸움은 해방 이후 이승만 박사가 1948년 대통령으로 집권한 이후 자유당 시대에도 계속됐다. 따라서 한국인 학생들도 한국의 이승만계 자유당 지지파와 야당인 민주당의 윤보선과 장면 지지파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하야성명을 발표하고 이화장으로 돌아가고 있는 이승만 대통령. 그의 하야로 재미 한인사회도 급격한 변화의 바람이 일기 시작한다.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되고 자유당이 전성시대(1948-1960)를 누리던 때에는 뉴욕과 샌프란시스코의 국민회를 지지하는 한인들은 이승만 정권의 독재 정치를 반대하며 조용히 자기가 맡은 직업에 충실하게 일했다. 도산 안창호를 지지했던 흥사단은 재미동포의 교육과 개화 운동을 전개하면서 이승만 정부의 독재정치를 비판하고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전개했다. 다시 말해 이승만 정권의 자유당 전성시대에는 동지회 사람들이 재미교포사회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됐으며, 도산 안창호의 국민회 계열 사람들과 또 그의 흥사단 사람들은 음지에서 조용히 교포들의 계몽운동과 교육활동에 전념했던 것이다. 따라서 자유당파의 사람들이 매우 편파적인 활동을 많이 했으며 흥사단 계통의 사람들은 주로 계몽운동과 이승만 정권의 독재정치를 비판하며 반대하는 민주화 운동을 많이 했다. 따라서 4·19 학생운동의 결과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고 하와이로 망명한 후 흥사단 사람들의 활동은 더욱 활성화 되기 시작했다.

4·19혁명 이후 한인사회의 변화

한국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고 하와이로 망명한 후 뉴욕 일대에 정착해 살고 있는 원로 한인 몇 사람들은 뉴욕한인회를 조직하겠다는 뜻으로 나에게 접촉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내가 뉴욕한인학생회장으로서 4·19학생운동에 참여한 전력과 관계있다. 그렇게 해서 나는 뉴욕과 뉴잉글랜드 등 미국 동부지역에 흩어져서 공부하고 있는 한국인유학생 200여명을 대표해서 뉴욕한인회 조직에 참가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한국의 민주화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뉴욕의 원로 한인들은 나에게 접근해 한인회 창립에 한국인 학생들도 협조해 달라고 부탁했다. 뉴욕의 원로 한국인들은 이승만 독재정치를 반대했을 뿐만 아니라 1960년 3월 15일에 시행된 이승만 대통령의 3선 개헌도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있었다.

한국학생들의 데모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고 민주주의 운동이 시작될 당시 뉴욕의 한인 원로들은 뉴욕한인회를 창립하기 위해 여러 차례에 걸쳐 준비모임을 가져왔다. 한인회를 조직하는 목적은 한인상호간의 친목과 연락을 도모해 한인들의 생활 복리를 증진하고 뉴욕한인 들의 의사를 대표하는 기관이 된다는 것이라고 회칙은 규정했다. 그리고 뉴욕한인회 재건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30~40명을 발기위원으로 구성했다. 1960년 5월 23일 준비위원회를 소집했을 때 23명이 참석했다. 그리고 뉴욕의 한인 명단을 작성했는데, 여기에는 일반교포는 52명과 한국에서 인턴으로 와 있던 의사 30명도 포함됐다. 뉴욕의 한인 수는 학생과 인턴의사를 포함해서 100여명 정도에 불과했다.

1960년의 4·19 혁명후 이승만 대통령이 물러나고 한국에서는 새로운 민주당 정부가 수립됐을 때, 뉴욕에서는 뉴욕한인회 창립이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그 당시 한인회 재건준비위원회라고 한 것은 1920년대 조병옥 씨가 콜럼비아대 대학원에서 공부할 때 한인회를 조직했다고 그의 회고록에 기록해 놓았기 때문에 이미 조직된 한인회를 재건한다는 의미에서 재건준비위원회로 발족한 것이다. 뉴욕한인회 재건에 공헌이 매우 큰 사람들은 김준성, 강한모, 김형린, 윤치창, 서상복 등 원로들이다. 이 가운데 김준성 목사는 뉴욕한인교회 목사를 역임한바 있었고, 사리에 매우 밝은 분으로 예리한 두뇌를 사용해 회칙을 만들고 또 회의록을 작성하는 데 공헌이 많았다. 준비위원들은 모두 제각기 초대회장이 되겠다고 감투싸움을 벌였지만, 매우 겸손한 사람이었던 김준성은 기독교 정신으로 한인회를 위해 많은 묵묵히 봉사하는 데만 집중했다.

뉴욕한인회를 만든 사람들

그 당시와 오늘날 한인회가 당면하는 문제는 비슷한 것이 많이 있다. 지도자들의 비전과 미래전략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회장이나 이사장을 하나의 감투로만 생각하고 있을 뿐 뉴욕 한인회가 나아갈 방향과 어떻게 뉴욕일대 한인들에게 참여의식을 불어 일으키는 리더십은 부족했다. 한인회는 과연 뉴욕일대 40만의 한인을 대표하고 있는지 그렇지 않으면 이사회와 간부 몇 사람만 대표하는 한인회인지 알고 싶은 사람도 많이 있었다.

4.19혁명으로 출범하게 된 장면 내각. 대통령 윤보선 내외(왼쪽)와 장면 총리 내외(오른쪽)가 함께 행사에 참여했다. 새로운 바람은 국내에서도, 국외인 미국에서도 불고 있었다.

뉴욕의 원로인 김준성 목사는 나에게 전화를 걸고 콜럼비아대학 부근 115가에 있는 뉴욕한인교회에서 뉴욕한인회 조직을 토론하기 위해 만나자고 제안했다. 뉴욕 한인교회는 나의 숙소에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였고, 또 나는 주일에는 한인교회의 주일예배에도 종종 참여했기 때문에 집회장소는 잘 알고 있었다. 우리는 저녁식사 후에 만나 보기로 했다. 김준성 목사는 뉴욕한인회 창립 취지서와 규약(회칙)을 초안하고, 한글타자기로 작성해서 한 부를 내게 건네주면서 한국 유학생들에게도 널리 홍보해서 많은 한국 유학생들이 뉴욕한인회 창립식에 참여해 주도록 부탁했다. 이와 관련, 뉴욕의 교포 몇 사람이 여러 차례 만나서 회칙에 관한 토론을 한 것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 당시 한인사회를 대표해서 참석한 사람들은 초대한인회장을 선출할 때 강한모와 김형린 이사가 싸우는 와중에서 서상복이 어부지리로 회장이 된 일화를 잊지 않고 있다.

내 기억에는 강한모는 끈질기고 집착이 매우 강한 사람이었다. 그는 초대 한인회장을 목표로 모든 일을 열심히 했다. 그 과정에 김형린과 의견충돌이 종종 있었다. 강한모와 김형린은 1930년대 유학생으로 미국에 와서 태평양전쟁 때는 미군부대의 요원으로 근무한 경험도 있던 사람들이다. 그리고 해방이 된 후에도 미국시민권을 얻어 한인회를 조직하고 제2대와 제3대 회장에 추대 될 때까지 미국에 체류하면서 일생을 보냈다는 공통점도 있다. 김형린은 학구적이고 매우 온화한 성품의 소유자로 하버드대에서 심리학으로 석사학위도 받았으며 박사학위과정도 다 끝내고 학위논문만 남겨놓고 중도하차한 학구파였다. 또한 경제생활 일선에 뛰어 들어 비즈니스에도 상당한 재능이 있다고 평가받은 사람이다.

그 반면에 강한모는 감투를 좋아해 초대 한인회장이 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다. 그 당시의 한인회장 선거는 오늘과 같이 전체회원이 투표하는 것이 아니라 실행위원회에서 선출했는데 몇 사람이 모여서 다음 회장을 선출했다. 뉴욕한인회의 초대회장은 연령이 제일 많은 김형린이 되는 것이 타당하다고 나는 주장했으나 강한모의 감투욕심으로 두 사람이 감투 싸움하는 바람에 서상복씨가 어부지리로 초대회장이 된 것이다. 그리고 강한모는 제2대 회장이 되고 김형린은 제3대 회장으로 추대됐다. 제4대 회장에는 송애나라는 여류 인사가 됐고, 제5대는 한영교가 됐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한영교는 기독교 목사로 한국동란 이후 미국장로교 선교본부의 주선으로 미국에 방문비자로 와 있었고 한인회 창립당시 뉴욕에 있었기 때문에 참여했다. <계속>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