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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 유학생 2세대가 평가한 이승만 … 배타주의자의 비극
한인 유학생 2세대가 평가한 이승만 … 배타주의자의 비극
  • 김일평 코네티컷대 명예교수
  • 승인 2012.12.21 23: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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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평 교수 회고록(26) 애스베리대에서의 강의와 역사 공부8

우리들이 드레이크 호텔 커피숍에서 매우 진지한 토론내용은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미국유학생 이승만은 조선조 시대 1874년에 황해도 평산에서 상류층 가정의 6대 독자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 서울로 이사하고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했다. 그의 한학공부는 훗날 한국정치에도 여러 가지로 독단적으로 정책결정을 하는데 막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16세에 두 살 연상인 박씨와 결혼한 이승만은 배재학당에 입학하고 신학문(즉 서양문화)을 배우는 한편 김규식과 함께 <매일신문>을 편집하기도 했다. 그는 서재필이 미국유학에서 돌아와서 조직한 독립협회의 주요간부로 발탁됐다. 만민공동회의를 주도하는 등 민중계몽에 투신한 일도 있었다. 그는 1898년 독립협회와 대결관계에 있었던 황국협회의 모함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일도 있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이승만이 일제시대에 독립운동을 하다가 잡혀서 사형선고를 받았다고 잘못 전해졌다.

그의 죄목은 조선조 왕위를 폐지하고 정부를 타도하는 음모에 가담했다는 것이다. 다음해 그는 탈출했다가 다시 잡혀서 감옥에 투옥된 후 감옥에서 영어를 공부하는 한편 한글로 『독립정신』이라는 책을 썼다. 『독립정신』은 2002년 영어로 번역돼 미국에서도 출판됐다. 그는 선진국의 제도와 문화를 수입하고 국민교육을 확장하며 외국과의 통상을 증대해야 한다는 경제정책을 강조하고 또 민족의 대동단결을 역설함으로써 한민족의 이목을 끌었다. 그는 도산 안창호, 서재필, 박용만 등과 함께 미국유학생 출신의 민족주의자이다.

필자가 해방 뒤 원주의 삼촌댁에서 중학교에 다니고 있을 때 삼촌은 한국의 전형적인 보수주의자로 대한독립촉성국민회(독촉군민회)의 강원도 지부의 이사로 임명됐다. 그는 이승만 박사의 『독립정신』을 읽은 후 감명을 많이 받았다고 말씀하시면서 나에게도 한번 읽어 보라고 권유한 일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중학교에 다닐 때 읽어본 기억이 있다. 나는 이승만 박사에 대해 많이 배웠다. 이승만은 1904년 옥중에서 기독교로 개종하고 그해 8월 9일 황제의 사면 명령에 의해 석방됐으며 조선조의 개혁주의 실세였던 민영환과 한규설 등의 도움으로 미국에 밀사로 파견됐다. 유학생 여권을 받은 후 인천항을 출발하고, 일본을 거처 미국선박 시베리아호를 타고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그는 그곳에서 사탕수수 밭에서 일하기 위해 노동이민으로 도착한지 얼마 안 되는 한인들 앞에서 조국의 미래를 염려하는 구국연설을 했다. 그리고 한인 이민자들의 통역으로 온 윤병구 목사와 친해지고 또 그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일본과 러시아와의 전쟁(일로전쟁) 후 1905년부터 일본이 한국을 통치하려는 야욕을 막기 위해서는 때마침 미국 뉴햄프셔 주 포츠머스 평화회의(일-러 전쟁 후 미국의 중재로 개최된 평화회의)에 이승만을 한국대표로 참석시킨다는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그리고 이승만은 하와이로 돌아가지 않고 워싱턴에 가서 로비활동을 벌이고 윤영구 목사는 하와이에 남아서 한인들로부터 모금운동을 시작했다.

이승만은 워싱턴에서 알칸소주 상원의원 휴 딘스모어를 만나서 자신의 밀명을 알리고 그의 주선으로 미국 국무장관 존 헤이스와 면담을 하게 됐다. 존 헤이스, 딘스모어, 이승만의 3자 회담에서 헤이스 국무장관은 일본-러시아 평화조약에서 한국의 독립을 위해 최선을 다해 보겠다고 매우 호의적인 대답을 했다는 것이다. 헤이스 미 국무장관은 1904년 중국에 대한 개방정책(Open Door Policy)을 새로 주창한 국무장관으로서 역사기록에 남아있는 인물이다.

하와이의 윤병구 목사는 1904년 6월 극동을 방문하는 길에 하와이에 들른 미국 국방장관 윌리엄 태프트를 한인교포 4천명의 이름으로 환영했다. 그는 태프트 장관으로부터 테오도어(테디)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날 수 있는 소개장을 얻는데 성공했다. 윤병구 목사는 태프트 국방장관의 소개장을 들고 워싱턴에 와서 이승만과 함께 루즈벨트 대통령을 면접하려고 모든 힘을 다했다.

테디 루즈벨트 대통령(왼쪽)의 유산을 물려받은 우드로 윌슨. 이승만은 윌슨에게 독립 탄원서를 냈지만, 윌슨은 이를 듣지 않았다.

이승만과 윤병구는 1904년 7월 6일 아침(오전)에 루즈벨트 대통령과 역사적인 면담을 성사시킨 것으로 역사가들은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매우 회의적으로 평가하는 역사학자도 있다. 그 이유는 루즈벨트라는 사람은 러시아세력의 동아시아 침투를 막기 위해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는 것이 오히려 미국에게는 더 유익하다고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미국은 필리핀에 대한 지배를 일본이 승인해 주는 대가로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승인하는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미국과 일본 사이에는 이른바 태프트-가쓰라 밀약(태프트-桂秘密條約)과 같은 비밀조약이 준비되고 있었던 시절이었다. 이 조약은 1904년 7월에 체결됐다.

1905년 11월 17일 乙巳保護條約이 체결된 후 이승만은 조국에 돌아갈 마음을 던져버리고 미국에 그대로 주저앉아 공부하기로 작정했다. 6·25전쟁 후 미국에 와서 공부하겠다는 우리 유학생들처럼 말이다. 그는 조지워싱턴대에 입학하고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 세례도 받았다. 1905년 2월에 조지워싱턴대에 등록한 이승만은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강의를 열심히 들었다. 방학동안 그는 한국독립을 위한 공개강연도 여러 차례 하면서 그 연설보상으로 학비를 조달했다. 그리고 그와 동감하는 미국친구들도 사귈 수가 있었다. 그는 1907년 6월 5일 우수한 성적으로 조지워싱턴대의 학부를 졸업했다.

조지워싱턴대를 졸업한 후 이승만은 보스턴으로 올라가 하버드대 대학원에 등록하고 석사학위 과정을 밟기 시작했다. 다음 해인 1908년 봄 그는 우수한 성적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편집자주: 그러나 김일평 교수의 회고와 달리 그가 하버드대에서 낙제를 받았으며, 석사학위를 받은 것은 그 이후 프린스턴대에서 박사를 받기 전이라고 지적하고 있는 한국 역사학자들도 있다]. 그리고 그는 그의 동지 윤영구 목사와 함께 7월 10일부터 15일까지 6일간 콜로라도주 덴버 시에서 한국인 국제회의를 개최하는 일에 몰두했다. 이 회의에는 중국 상해, 런던, 러시아의 연해주 블라디보스톡 등 각지의 한인들의 대표 36명이 참석했다. 이들은 이승만을 의장으로 선출해 한인들의 국제단체를 창립하려고 힘썼으나 일본의 방해로 무산되고 말았다.

이승만은 다시 뉴욕으로 돌아와서 맨하튼 120가에 있는 유니온 신학교에 숙소를 정하고 콜럼비아대 대학원에 등록해 박사학위과정에 들어갔다. 그러나 장로교 선교사 어네스트 힐 목사의 알선으로 1908년에 프린스턴대 대학원으로 옮기고 2년 동안 열심이 공부해 박사학위논문 「미국의 영향을 받는 영세중립론」이라는 제목으로 학위논문을 쓰고 1910년 7월 18일 프린스턴대에서 철학박사(Ph.D.)학위를 받았다.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조약이 체결됐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이승만은 루스밸트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보내고 조국의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미국의 적극적인 후원을 얻지 못한 이승만은 조국에 돌아가서 독립운동을 하겠다고 결심한 후 한국으로 귀국했다. 6년간의 미국유학생활을 청산하고 1910년 9월 발틱호를 타고 유럽을 경유해 귀국한 것이다. 오랜 해외생활을 청산하고 조국에 돌아온 그는 YMCA 총무로서 기독교사업을 통해 조국에 봉사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전국 각지를 순회하면서 대중 강연도 하고 또 각 교회의 집회를 통해서 은근한 방법으로 조국독립에 대한 인식을 한국인 대중의 마음속에 심어주었다. 한양 Y학당의 교장 직함을 인계 받은 후 이승만은 국제법(만국공법)을 강의할 때 제자 임병직(후에 대한민국 초대 외무장관 역임), 이원순, 허정(1960년 4·19 혁명 후에 과도정부 내각총리) 등을 만나서 그들의 존경을 얻어낸다. 그들은 후일 이승만 박사의 충실한 추종자가 됐으며, 1948년 한국정부가 수립된 후에는 이승만 정부의 각료로 입각했다.

한인유학생1세대였던 독립운동의 리더 안창호와 박용만은 이승만과 정치노선이 극명하게 달랐다. 이것이 이후 파벌갈등을 불러오게 된다. 왼쪽이 안창호. 오른쪽이 군대를 통한 독립운동을 주장했던 박용만이다.

이승만 박사는 1910년에 입국해 1년간의 고국체류를 끝마치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다. 1911년 3월 26일 미네아폴리스에서 개최된 국제 감리교 대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했던 이승만은 대회가 끝나자 한국에 돌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워싱턴으로 돌아가서 옛 친구들을 만나고 미국 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계획을 세우고 미국 장기체류를 준비했다. 그는 프린스턴대 대학원 시절 자기의 스승이었든 우드로 윌슨 대통령에게 한국독립을 위한 탄원서를 보낸 후 한국의 독립을 위해 강력한 대책을 세우고 그것을 밀고 나갔다. 윌슨 대통령은 테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극동정책을 그대로 이어받고 미국과 일본 사이의 우호적인 외교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으로부터 조국의 독립을 바라는 한국인 민족주의자들의 독립운동을 돕지 않았다. 테디 루스벨트는 일본의 한반도 식민지화를 그대로 방관만 한 대통령이다. 자기 스승 윌슨 대통령으로부터 실망을 느낀 이승만은 그 당시의 독립운동가로 알려진 박용만의 초청으로 1913년에 하와이로 건너갔다.

1913년 1월 하와이에 도착한 이승만은 33년 동안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그와 같은 운동은 재미동포의 재정적 또는 정신적 후원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물론 이 박사의 독립운동에 관한 업적은 대한민국이 수립된 후에 미화된 부분도 많이 있다. 1948년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되고 1952년에는 헌법을 고쳐서 재임할 수 있었고, 또 1960년에는 3선 대통령으로 장기집권은 물론 종신 대통령이 되기 위해 부정선거를 감행한 일도 있었다. 4·19 학생혁명으로 대통령직에서 하야할 때까지 그의 업적에 대한 비판도 많았으며, 그의 장기집권에 대한 욕망은 신랄한 비판의 대상이 되고도 남았다.

이승만이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그의 업적을 인정해 상해임시정부는 그를 초대 대통령으로 영입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독립운동가의 탄핵을 당해서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정치란 타협의 예술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는 이미 타협을 전혀 할 줄 모르는 고집불통의 정치가로 변해 있었다. 한국의 어용학자와 일부 언론인들이 그의 업적을 신화로 만든 부분도 많이 있었으며 또 날조한 부분도 있었다. 그러나 학계와 전문가 중에는 새로운 자료를 발굴해 객관적이고 공정한 입장에서 역사를 바로 쓰고 또 그가 남긴 교훈도 잘 전달하는 학자도 있다는 것은 퍽 다행한 일이다.

1950년대의 우리 한국 유학생들은 이승만 박사의 미국유학시절의 경험과 독립운동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면서 그를 하나의 모델로 삼았다. 우리는 그로부터 무엇을 배우고 우리가 어떤 방법으로 조국에 공헌할 수 있을 것인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승만, 안창호, 박용만과 같은 한인유학생 제1세대는 일제 통치하에 있는 우리 민족의 자결권과 한국의 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친 것이다. 우리 유학생 제2세대는 남북으로 분단된 조국의 통일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우리가 한인유학생 선배들로부터 배울 점은 많이 있었다. 그러나 배워서는 안 되는 것도 있었다. 그것은 사색당쟁 즉 파벌싸움이다.

우리는 역사의 교훈에서 무엇인가 배우기 위해 한인유학생 출신이며 독립운동가의 대표적인 리더인 이승만, 안창호, 박용만 등의 독립운동 경험과 이들 세 사람의 정치노선을 분류해봤다. 이승만은 정치외교를 통해서 조국의 독립을 성취하겠다는 운동노선을 따랐고, 안창호는 교육과 계몽운동을 통해서 한민족의 인간개조 그리고 정신적이고 도덕적인 정신적 재무장운동을 하는 정치노선을 선택했으며, 박용만은 군대를 양성해서 무력을 통해 조국의 독립을 이룩하는 정치노선을 걷고 있었다. 그들의 독립운동 정신은 높이 평가할 수 있지만 그들이 보였던 당파싸움은 배워서는 안 된다는 것이 우리들의 결론이었다.

우리는 이승만이 매우 독선적이고 배타주의자라고 평가했다. 자기와 뜻이 맞지 않고 노선이 다르면 政敵으로 몰아서 쫓아내 버렸다. 자기를 미국에 초청해 준 박용만과는 의견충돌 때문에 갈라섰고, 정치노선이 달라서 자기 스스로 태평양 동지회를 만들어 안창호의 국민회의에 맞서 정치투쟁을 한 것은 이승만이 독립운동에서 범한 매우 중대한 과오라고 평가하는 학자도 있다. 이승만은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파벌투쟁의 리더로 부상했으며, 대한민국 수립 후 초대 대통령이 됐지만 끝내 파벌투쟁으로 밀려나게 됐으니 역사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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