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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한인학생회 맡아 '한국문화축제' 성황리에 개최
뉴욕한인학생회 맡아 '한국문화축제' 성황리에 개최
  • 김일평 코네티컷대 명예교수
  • 승인 2013.01.10 17: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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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평 교수 회고록(29) 콜럼비아대학원의 국제정치학 연구 2

콜럼비아 대학원에서 1년간 강의를 주로 듣고 대학원 1학년 동안 학점 따는 것을 무난하게 끝마칠 수 있었다. 나는 뉴욕시의 생활에도 적응을 잘 했고, 또 뉴욕의 복합문화 생활도 즐길 수 있었다. 그리고 뉴욕에서 유명한 브로드웨이 연극과 버라이어티쇼와 외국영화도 종종 볼 수 있었다. 특히 미국은 소련과 문화교류협정을 1959년에 체결하고 러시아의 새로운 영화는 물론 볼쇼이 발레단과 같은 웅장한 소련의 연예 프로그램도 교류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보고 감상 할 수 있었다.

소련이라면 과거 한국 육군 복무 시절의 동료 장교로부터 전해 들었던 이야기가 있었다. 당시 나의 그 동료 장교는 북한이 고향이었는데, 해방직후 북한에 주둔했던 소련군을 직접 보고 경험했던 것이다. 소련군과 미군이 한반도를 38선에서 분단했을 때 그는 평양에서 중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그는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38선을 넘어 남하했다. 그는 북한에 있을 때 소련의 영화를 많이 접할 수 있었다. 그에 말에 따르면 소련의 예술과 문화는 미국의 예술보다 훨씬 앞서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소련문화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고, 또 대학원에서는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공부도 했다.

소비에트 시절 강조된 공연미학은 볼쇼이 발레단에도 잘 반영돼 있다. 소비에트 체제가 종식되고 '러시아'로 복귀했지만, 볼쇼이 발레단은 그 명맥을 잇고 있다. '잠자는 숲 속의 미녀' 리허설 중인 볼쇼이 발레단.

뉴욕의 각 대학에는 한국 학생들이 등록해 공부하고 있었다. 한국 학생은 여러 대학에 한국학생회 또는 학생클럽을 조직해 친목을 도모하고 있었다. 그러나 뉴욕과 뉴저지 그리고 코네티컷 일대에는 한국 유학생이 늘어남에 따라 ‘뉴욕지방 한국학생회’를 조직할 필요성이 대두됐다. 한국 학생 상호간의 친목을 도모하는 동시에 학생 복지와 여권 연장 문제 등 학생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학생단체가 필요했던 것이다. 따라서 뉴욕지역 한국 학생회가 확대 조직돼 뉴욕 일대와 뉴저지, 코네티컷 등지의 대학에 등록하고 공부하고 있는 모든 한국인 학생들을 포함하는 ‘뉴욕지역 한국학생회’라는 명칭으로 확대 조직됐다.

동료 선배들, 뉴역지역 한인학생회장 출마 권유

이러한 상황 전개에 따라 필자 역시 뉴욕지역 한인 학생회 운동에 참여하게 됐다. 나와 가깝게 지내던 콜럼비아대 동창들과 선배들은 내가 뉴욕지역 학생회 회장에 출마해야 한다고 强勸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학생회 회장 자리는 결코 쉬운 자리가 아니었다. 훗날 한국 외무장관을 지내게 되는 이 아무개 씨는 한국 학생회 초대 회장을 하느라 공부를 소홀히 해서 콜럼비아 대학원의 박사학위 종합시험에 낙제하고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이른바 디필(D. Phil.) 학위를 받아야 했다. 영국의 D. Phil.이라는 학위는 영국의 식민지에서 오는 유학생들에게 주는 학위로 미국의 Ph. D.학위와 석사학위의 중간 정도라는 말을 들었다. 콜럼비아 대학원의 헨리 로버트 교수도 영국 옥스퍼드대의 D. Phil.학위를 받은 후 콜럼비아 대학원에 와서 역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선배들의 계속되는 학생회장 출마 권유로 결국 나는 뉴욕지역학생회 회장에 출마할 수밖에 없었다. ‘New York Metropolitan Area’으로 알려진 뉴욕지역을 중심으로 조직된 이 한국학생회는 콜럼비아대는 물론 뉴욕대, 뉴욕시립대(헌터 칼리지, 퀸스대학 등), 뉴저지 주립대학인 럿트거스대, 그리고 프린스턴대, 코네티컷주의 예일대를 비롯해서 코네티컷주립대 등 뉴욕시 근방의 대학에 등록한 모든 한국 학생을 포함해 150여명의 한국 유학생이 학생회장 투표에 참여할 수 있었다. 나는 1959년 9월에 뉴욕지역 한인 학생회장에 당선됐다. 뉴욕지역 한인 학생회장으로 있을 때 한국 문화제를 개최해 한인사회 뿐만 아니라 미국인 사회에도 한국문화에 대한 매우 깊은 인상을 심어놓은 것이 나의 업적의 하나였다고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한국문화제(Korean Cultural Festival)는 콜럼비아대 맥밀런 극장에서 개최됐다. 1959년 10월 25일이었다. 물론 한국전쟁 이후 미국에서 열린 최초의 한국문화제였다. 미국인과 한국인 500여명이 참여했다. 극장의 좌석이 꽉 찰 정도로 참여 열기가 뜨거웠다. 뉴욕지역의 한국인은 물론 미국인들 특히 6·25전쟁에 참전한 용사들이 가족과 함께 많이 참여했다. 그들은 한국에 가서 전쟁터에만 있었기 때문에 한국문화를 감상할 수 있는 기회가 전혀 없었다고 말하면서 콜럼비아대 학생들의 열정과 노고를 많이 칭찬했다. <뉴욕타임스>도 한국문화의 긍정적인 면을 칭찬하는 기사를 실었다. 한국전쟁 당시 <뉴욕타임스>의 종군기자로 참여했던 조지 배럿(George Barret) 기자는 매우 인상적인 기사를 <뉴욕타임스>에 싣기도 했다.

큰 문화축제를 개최하는데 소요되는 경비도 만만치 않았다. 이 행사는 한국총영사관과 ‘한국 UN 참관단’(Korean Observer’s Mission to the United Nations)으로 활동하고 있던 한국 UN대표부가 적극적으로 후원했다(한국이 UN회원국에 가입돼 있지 않은 때였다). 당시 한국 UN 대표부에는 임병직 대사와 이수영 참사관, 그리고 현직 학생 고용원들이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Empire State Building) 70층에 사무실 두 곳을 빌려서 UN에서의 외교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한국총영사관에는 남궁 연 총영사와 2명의 부영사 정도가 참여했다. 한국 UN 대표부 임병직 대사는 축사도 했으며 이수영 참사관은 벤프리트 장군이 ‘코리아 소사어티’의 대표로 참여해 축사를 하는데 모든 힘을 다 해 도왔다. 이런 도움에 힘입어 문화제는 성공적으로 진행될 수 있었다.

뉴욕에서 김일평 교수가 한인학생회장으로 한국문화제를 성황리에 마친 후에 얼마 안 있다가 3.15부정 선거를 계기로 4.19 학생운동이 일어났다. 시위중인 당시 서울의 대학생들. 사진 출처 http://www.histopia.net

한국문화제가 열리고 얼마 안 있다가 1960년 3월 15일 대통령 선거에서 이기붕 부통령 당선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면서 한국에서는 드디어 4·19 학생운동이 일어났다.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의 여론이 들끓자 마침내 하야하고 하와이로 망명했다. 한국에는 민주당 정부가 들어서고 이승만 시대의 대통령중심제에서 내각중심제로 바뀌고 새로운 행정부가 출범했다. 이른바 민주당의 장면 정부가 새로 출범한 것이다. 이에 따라 한국 유학생들의 약진이 이어졌다.

4·19학생의거와 유학생들의 한국 官界 진출

우리 한국 유학생 가운데 하버드 법과대학에서 국제법을 공부하던 고광림 박사가 민주당 정권의 워싱톤 한국대사관의 공사로 임명됐으며, 유엔 대표부에는 유학생 출신 최운상 씨가 공사로 임명됐다. 샌프란시스코의 영사도 유학생 출신이 대행했다. 우리와 함께 뉴욕학생회의 문화부장으로 <한국학생신문>을 편집하던 뉴욕대의 노재봉 씨는 30여년 후인 1990년에 한국정부의 국무총리로 등용되기도 했다. 콜럼비아대의 동문인 김병훈 씨는 전두환 대통령의 특보로 통역을 전담했다.

4·19 학생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진 후 민주당 정부가 출범했을 때 많은 미국 유학생이 민주당 정부에 등용됐다. 나에게도 귀국해 민주당 정부에 참여하라는 초청장이 왔으나 나는 콜럼비아 대학원의 박사학위과정을 끝마쳐야 했기 때문에 이 초청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나는 학위를 마치기로 결심했다. 콜럼비아 대학원의 박사학위를 받은 후 한국에 기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 때 한국에 나가기로 결정한 것이다. 따라서 박사학위를 끝마치는데 모든 힘을 다 쏟아 부었다.

『문명의 충돌』을 발표하게 된다.

나는 박사학위 과정의 일환으로 소련정치와 중공정치를 비교 연구하는 방향으로 공부했다. 소련이 한반도의 38선 이북에 주둔한 탓에 북한은 소련식 정치와 경제 제도를 도입했으며, 남한에는 미군이 주둔해 미국식 민주주의 정치를 시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소분쟁이 생겼을 때 중공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이미 연구논문도 많이 출판돼 있었던 환경도 한 몫 거들었다. 따라서 나는 박사학위를 위해 전공분야로 소련, 중공, 그리고 미국정치를 비교 연구하는 ‘비교정치학’으로 방향을 잡았고, 부전공은 국제정치학 분야의 ‘외교정책’을 선택해 소련과 미국, 그리고 중공의 외교정책에 관한 대학원 강의를 등록했다. 또한 박사학위 종합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그 방면의 책도 많이 읽었다. 따라서 나는 미국정치 쪽은 사무엘 헌팅턴(Samuel Huntington) 교수의 강의와 세미나를 등록한 후 그의 강의를 통해 많이 공부했다.

헌팅턴 교수는 1960년대에 젊은 부교수였으며 아직 『문명의 충돌』이라는 책을 쓰기 전이었다. 그리고 리처드 뉴스태트(Richard Newstadt) 교수의 『대통령의 권력 (Presidential Power)』이라는 책을 읽고 대통령학 강의도 들었다. 뉴스태트 교수의 강의는 10년 후에 책으로 출판돼 호평을 받았다. 그리고 소련 정치 부분은 주로 존 해자드(John N. Hazard) 교수의 강의를 등록해 공부했는데, 그의 책도 몇 권 읽을 수 있었다. 중공에 대한 공부는 도크 바네트(A. Doak Barnett) 교수의 중공정치 강의를 들었고 또 중공외교정책의 세미나에도 참석했다.

도크 바네트 교수는 당시 '중공' 전문가였다. 김일평 교수는 바네트 교수에게서 중공문제를 공부했다.

바네트 교수는 미국외교협의회(Council on Foreign Relations)에서 1년간 중공의 외교정책에 관한 연구를 하면서 미국 정부의 중국정책에 관한 자문역할도 했던 인물로, 중미외교관계를 수립하는데 공헌도 많이 했다. 그의 저서 『중공과 아시아 (Communcist China and Asia: Challenges to American Policy)』는 미국외교협의회에서 출판했다. 나는 이 책을 1965년에 우리말로 번역해 1967년에 동아출판사에서 출판했다. 고려대 부설 아세아문제연구소의 번역총서로 출판될 수 있었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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