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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 한인사회의 뿌리 깊은 갈등, 그 기원은 어디에 있을까?
재미 한인사회의 뿌리 깊은 갈등, 그 기원은 어디에 있을까?
  • 김일평 코네티컷대 명예교수
  • 승인 2013.02.01 13: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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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평 교수 회고록(32) 뉴욕학생회와 뉴욕한인회 창립 3

뉴욕의 한인학생과 원로 한인들

나는 하와이 동서문화센터의 연구위원으로 떠나기 전인 1950년대의 뉴욕의 한국인 학생회와 뉴욕한인회에 관여한 일이 있다. 뉴욕한인회는 1960년 6월 12일 창립됐다. 나는 뉴욕한인회 창립과정에서 창립준비위원으로서 활동했고, 또 창립된 후 뉴욕한인회 이사회의 일원으로 참여했다. 그리고 나는 제 2대 와 제 3대 한인회 이사로 참여했던 일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으며 나의 회고록에 기록해 놓기로 했다.

뉴욕한인회는 지난 50여 년 동안 장족의 발전을 거듭했다. 1960년 창립 당시의 한인회와 오늘의 한인회를 비교해 보면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우리는 역사인식이 매우 부족하고, 역사의 교훈을 망각하는 민족이라는 평을 종종 들어 왔기 때문이다. 우리가 역사를 모르면 비전(Vision)도 생기지 않을 것이고, 또 비전이 없는 민족은 망한다는 말을 종종 들었다. 우리는 우리 해외동포의 역사를 정확하게 기록해서 우리 후세들에게 역사의 교훈을 남겨 놓을 뿐만 아니라 선조들의 잘못을 바로 잡아서 좀 더 발전해 나갈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이글을 쓰게 된 것이다. 나는 뉴욕한인회에 대한 객관적이고 정확한 역사기록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뉴욕한인회의 역사는 곧 우리 한인들의 자화상이 아닌가. 우리 한인들이 미국에 이민 온 지도 어느덧 100년이 넘은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뉴욕한인의 역사기록은 『사반세기 뉴욕 한인회』라는 책 한 권만 있을 뿐이다. 뉴욕한인회의 반세기 역사를 준비하는데 필요한 자료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뉴욕한인회의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기 위해서 나는 창립당시의 숨은 이야기(비화)를 여기에 기록해 놓기로 했다.

아직도 생생한 창립 당시의 기억들

나는 뉴욕한인회의 창립에 참여했던 한 사람으로서 50년 전의 뉴욕한인회 창립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 당시 뉴욕에는 영주권을 받고 정착해 살고 있는 교민 수는 20여명에 불과했다. 따라서 한국 유학생들은 50~60명이 넘었기 때문에 이들이 뉴욕 한인사회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으며 한인들의 모든 행사를 주도하고 있었다고 앞에서 회고한 바 있다. 뉴욕의 원로한인들은 이승만 대통령이 통치하는 자유당 시대(1948~1960)였던 12년 동안 해외공관이 개최하는 행사에도 초청받지 못하고 망명생활을 그대로 계속하고 있었다. 때문에 그들은 그늘에서 움츠리고 사는 신세를 면치 못했다. 따라서 뉴욕의 한인교포들은 뉴욕한인회를 창립하고 새로 조직하기 위해서는 한국 유학생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협조가 필요했다.

4.19혁명으로 대통령직에서 하야한 이승만 대통령이 하와이로 망명하는 모습을 담은 당시 신문 기사.

 

한국에서 1960년 3월 15일 시행된 대통령 선거가 부정선거로 얼룩지고, 이에 한국학생들이 부정선거를 고발하며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외치면서 민주정부의 수립을 요구하고 있었을 때 뉴욕의 한인 유학생들도 이러한 흐름에 기꺼이 동참해, 고국의 민주주의를 응원했다. 이승만의 독재정권이 몰락한 후 한국의 학생들은 새로운 민주정부의 수립을 바라고 있을 때 뉴욕의 우리 한인 유학생은 한국학생들의 데모에 동조하면서 적극적으로 한국의 학생운동을 지지하며 긴밀한 협조를 하고 있었다. 한국의 4·19 학생 시위에도 우리 미국 유학생들은 동조했으며 간접적으로 협조했던 것이다. 뉴욕의 유학생들이 한국의 학생데모를 후원하면서 미국 내의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결과로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하고 자유당 정권은 무너진 것이다.

 따라서 음지에서 살던 뉴욕교포들은 활기를 다시 찾고 뉴욕의 모든 교포는 한국유학생들의 협조를 얻어서 뉴욕한인회를 창립하고 새로운 역사를 창조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1960년 뉴욕한인회를 창립 할 수 있었던 것은 뉴욕의 한국인 유학생들과 한인교포 사회가 긴밀하게 서로 협력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한국에서 1960년 4·19 의거가 일어나 12년간의 자유당 정권(이승만 대통령의 통치)을 무너뜨리기 이전의 뉴욕한인사회는 서울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캘리포니아의 한인사회 역사와 비슷한 점이 많이 있다. 친 이승만 계통인 동지회와 이승만을 반대하는 국민회 계통의 사람들 사이의 갈등은 서부와 동부에도 비슷한 형태로 나타났으며 매우 심각하게 전개 됐던 때도 있었다. 한국이 해방되기 전 일본 식민지 통치시대(1910~1945)의 미국의 한인사회는 매우 복잡하게 사분오열돼 있었으며, 이러한 심각한 갈등이 계속 된 것은 재미한인 역사에도 상세히 기록돼 있다.

 

2008년 8월 30일 KBS1 TV 다큐로 소개된 이승만과 그의 동지회 관련 장면.
그러나 일제시대의 재미동포는 한국의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또 참가 했다. 당시 미국의 한인사회는 도산 안창호 선생이 이끄는 국민회와 우남 이승만 박사가 조직한 태평양 동지회로 양분돼 있었다[일본 식민지 통치시대와 이승만 정권 탄생 이전의 미국한인사회의 분열과 갈등은 최봉윤(Bong-Youn Choy) 씨가 쓴 『미국의 한인들(Koreans in America)』에 자세하게 기록돼 있다].

 

마침내 한반도가 일제 식민통치에서 해방이 된 이후 이승만 박사는 한국에 돌아갔다. 미국 군정시대(1945~1948)의 한국정치현상은 미국한인사회의 파벌과 똑 같이 파벌 싸움의 소용돌이 속에서 권력 싸움이 극에 달했다. 우파와 좌파 간의 이념적 갈등이 매우 심각하게 전개됐다는 것은 주지의 내용이며, 이미 기록된 사실이다. 38선 이남의 한국은 미국 군정 3년을 거친 후 마침내 1948년에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했다. 그 때 이승만 박사는 한국 국회에서 간접선거로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초대 대통령은 일반 시민이 직접 투표해 선출하는 대통령 직선제가 아니라 국회에서 대통령을 선출하는 간접 선거제도였기 때문이다.

도산-우남 계열로 양분된 재미동포 사회

중국에 망명해 독립운동을 지속하며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한 백범 김구 선생과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박헌영, 여운형 등 좌파세력은 왜 대한민국 수립을 반대하고 참여하지 않았던 것일까? 그들은 남한에서 대한민국이라는 단독정부를 수립하는 데 반대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은 곧 한반도의 영원한 분단이 될 수도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또 이승만 계통의 태평양 동지회가 해방 후 한국정치의 주도권을 잡게 된 배경에 대해 여러 가지 의문을 제기했다. 동시에 미국정부의 대한반도 정책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했다. 해방 직후의 한반도 정치는 매우 복잡다단했으며 다양한 관점에서 분석하고 해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해방 전후의 한반도 정치에 관한 박사학위논문과 학술서적도 상당한 수에 달하고 있다. 그것은 해방 전후의 한반도 정치현상은 강대국의 정치 즉 미국, 소련, 그리고 중국의 영향력이 한반도에 미치는 것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재미한인의 인재양성을 목표로 1913년 5월 13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창립된 흥사단. 앞줄 왼쪽 네번째가 도산 안창호 선생이다.

 

대한민국 정부가 1948년에 수립되고 이승만 대통령이 집권 했을 때 재미동포 중 이승만 계열의 동지회 사람들이 많이 서울에 나가서 이승만 박사를 대통령에 당선되게끔 도왔을 뿐만 아니라 자유당 정부가 조직됐을 때 그들 가운데는 정부요직에 입각한 사람도 상당수에 달했다. 또 자유당 정부의 해외 공관장을 임명할 때에도 이승만 계통의 동지회 사람들이 주로 임명됐다. 따라서 해외교포 중 이승만의 집권을 반대한 국민회 계열 사람들은 한국정부 조직에서 제외됐고, 이승만파 일색으로 바꾸어 놓았다는 것이 그 당시의 여론이다. 그것은 재미 한인사회가 오늘과 같이 성장하기 이전, 數的으로도 극소수에 불과했으며 서부와 동부로 나누어도 각각 백여 명이 넘지는 못한 시대의 일이었다.

대한민국 초기의 이승만 정부에는 이승만 박사가 미국에 망명생활을 할 때 그를 적극적으로 도왔던 남궁련 씨가 뉴욕의 초대 총영사로 임명됐고, 서부의 샌프란시스코에는 주요한 씨가 총영사로 임명됐다. 그들은 1948년부터 1960년 4월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할 때까지 12년간 재임했다. 그동안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을 비판하거나 반대하는 야당 즉 국민회 사람들은 모두 소외돼 있었다. 중부의 시카고에는 치과의사인 정보라 씨가 한국의 명예총영사로 임명됐으나 그는 이승만의 직계도 아니었고 또 공관장 역할도 하지 못했으며, 중부지방의 영사업무는 주로 뉴욕의 한국 총영사관에서 집행했다. 그와 같이 재미한인사회가 분열돼 파벌싸움이 시작된 것은 미국에 이민해 온 1900년대 초기부터 시작된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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