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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 마침내 시작된 유학 생활
미국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 마침내 시작된 유학 생활
  • 김일평 코네티컷대 명예교수
  • 승인 2012.09.27 16: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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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평 교수 회고록(17) 미국유학준비 3

우리는 아무런 격의도 없이 진지한 토론도 할 수 있게 됐다. 여러 가지 문제를 놓고 토론했지만, 특히 우리 한인 유학생들의 미래에 대한 문제를 가장 많이 토론했다. 우리는 미국유학이 처음이고 무엇을 어떻게 공부하면 될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우리의 선배 유학생들은 무엇을 어떻게 공부했을까. 우리의 선배 유학생들 중에는 1920년대와 1930년대 일본의 식민통치시대에 미국에 와서 유학생활을 하면서 일본식민지 통치에서 벗어나서 한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다. 그들은 애국심도 강했고 또 헌신적으로 조국의 해방과 독립운동에 공헌한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공부할지, 조국에 무엇을 어떻게 공헌할 수 있을 것인지 생각하고 검토해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동료 유학생들의 의견은 ‘우리의 선배 유학생은 한국이 일본 식민지 통치에서 독립을 하는 데 공헌했지만 우리 세대의 한국유학생은 분단된 한반도가 전쟁을 피하고 통일을 모색하는 공부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내용이 많았다. 이런 문제의식 때문에 미국 유학생 중에는 국제정치와 국제법을 전공해 조국의 통일에 기여하겠다고 뜻을 품은 이들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우리의 꿈을 모두 실현시킬 수는 없다는 것을 상당한 시간이 흘러간 후 알게 됐기 때문이다.

부모님들 ‘한복’ 챙겨주며 한국문화 알리라고 당부

그 당시 우리세대가 미국유학을 떠날 때 한국의 부모와 친지들은 막연하게 미국에 가서 성공해 돌아와서 조국에 봉사하라는 부탁이 많았다. 그리고 미국 사람들 중에는 한국에 대하여 관심도 별로 없었고 한국이 어디에 있는지도 잘 모르고 있었으니 한국역사와 한국문화의 우수성을 그들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 우리 유학생의 의무라고 강조하는 선배도 있었다.

유학생 부모님들은 한복을 한 벌씩 여행 가방에 넣어주면서 미국의 교회 혹은 중고등학교와 사회단체가 초청해 한국전쟁과 한국역사에 관한 강연을 부탁할 때는 반드시 한복을 입고 나가라는 것이었다. 한국문화를 미국 사람들에게 알리는 좋은 방법이라고 가르쳐 준 셈이다. 또 우리 한국 문화를 상징하는 풍속도와 부채, 담뱃대 같은 선물도 우리 여행 가방에 넣어주기도 했다. 미국사람들은 한국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고 있을 것이니 한국문화의 특수성을 강조하며 한국을 열심히 소개하라는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우리 유학생은 한국문화의 대사역할을 하는 것이 우리들의 임무라고 우리 선배들은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상과 현실에는 많은 차이가 있듯이 우리가 생각했던 미국과, 유학 와서 직접 목격하고 당면하는 미국은 천양지차였다. 우리가 상상하고 생각했던 미국은 꿈속의 그림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나는 고향의 은사 정태시 선생이 책 두 권을 송별 선물로 주시면서 배에서 한번 읽어보라고 했다. 한 권은 서울대 국사연구실이 편찬해서 출판한 『조선역사 개설』 역사책이고 또 한 권은 『도산 안창호』라는 전기였다. 이 책은 한국의 유명한 소설가 이광수씨가 쓴 도산의 전기였다. 이 두 권의 책은 60년이 흐른 오늘 아직도 나의 서재에 있다. 문교부 유학생 자격시험을 치르기 위해 한국역사를 정독했기 때문에 『도산 안창호』라는 전기부터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의 저자는 한국현대문학의 개척자인 춘원 이광수로, ‘도산 안창호 기념 사업회’의 위촉을 받고 집필한 전기다. 1947년 5월에 출판돼 보급되기 시작했다. 60여년이 지난 오늘 나는 아직도 그 책을 소유하고 있으며 종종 읽어본다. 내가 켄터키주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뉴욕의 콜럼비아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 공부를 시작할 때 뉴욕을 비롯해서 미국의 각처에 이민 와서 살고 있는 한인사회에서 특강을 해 달라는 초청을 받을 때마다 반드시 이 책을 한번 참조해 보고, 갖고 가서 도산의 유학생 시대의 일화를 소개한 일도 종종 있었다.

귀감이 된 도산 안창호 전기

도산 안창호는 1899년 22세 때 渡美해 공립협회를 창립했다고 기록돼 있다. 그러나 후에 알려진 바에 의하면 20세기 초인 1902년에 부부동반으로 미국에 건너온 것이 사실이다. 그가 우리 민족의 지도자가 될 수 있는 자질을 발휘하는 일화가 하나 생각난다. 화창한 어느 봄날 도산은 샌프란시스코의 거리에서 한인 두 사람이 서로 상대방의 상투를 붙잡고 싸우는 것을 목격했다. 이를 구경하려고 모여든 미국사람들은 마치 닭싸움을 보듯 매우 신기한 옷차림을 한 동양인 두 사람이 싸우는 장면을 흥미진진하게 보고 있었다.

그때 구경꾼 틈에서 한 청년이 나타나 “여보시오, 우리 동포들끼리 이게 무슨 창피한 짓이오.” 하며 뜯어 말리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이 바로 도산 안창호였다. 이와 같은 일화는 오래 전 우리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렸던 유명한 일화다. 나는 이 에피소드를 다시한번 되새겨 보면서 그와 같은 일화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것인지 한번 생각해 보자고 동료유학생에게 말한 기억이 있다.

1903년 첫 이민자들을 싣고 호놀룰루 외항에 도착한 갤릭호의 모습. 한국의 미국 이민 1세대의 시작이다. 김일평 교수 역시 이러한 화물선을 타고 2주간 태평양을 항해한 끝에 시애틀항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도산은 유학의 꿈을 접고 우리 동포사회의 계몽운동과 생활개선 운동을 전개했다. 조선조 말이었던 1900년대 초의 미국에는 한국 유학생은 여러 명 있었으나 이른바 이민자로 온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어떤 이민 역사에는 샌프란시스코 부근에 20여명의 한인들이 인삼장사를 하기위해 들어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들 대부분은 중국을 거쳐서 중국인 상선이나 무역상 틈에 끼어 미국에 입국했다는 것이다. 1903년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한 한인 이민 노동자들 중에는 사탕수수밭의 노동 일이 너무도 어렵고 힘들어서 집어치우고 노동계약까지 어기면서 미국본토에 옮겨온 사람도 있었다.

도산은 미국의 한인 이민자들의 생활을 좀 더 교양 있고 깨끗하며 능동적인 이민생활로 바꾸기 위해 청결운동부터 시작했다. 한인들의 집은 더럽고 악취가 난다고 소문이 널리 퍼져있었다. 집 앞에 있는 뜰에는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있으나 그것을 그대로 내버려뒀으니 무성한 잡초를 깎고 화초를 심어서 미화시키는 작업부터 시작했다. 한국인이 살고 있는 집의 문창에는 텅 빈 유리창만 있으니 유리창마다 커튼을 사다가 달았다. 그렇게 해서 집안은 매우 밝은 모습으로 변했다. 한인 이민사회가 점차 변해 가는 것을 유심히 지켜보던 미국유지 한 사람은 한인들 사회에 새로운 지도자가 나타났다고 기뻐하며 도산을 한번 만나보고 싶어 했다.

캘리포니아 리버사이드 다운타운에 건립된 도산 동상

그 미국인은 한인들의 미국 이민 생활이 변해가고 있는 모습에 감탄했다는 것이다. 그는 한인들이 모여서 집회도 할 수 있고 또 영어공부도 하면서 민주적으로 토론하는 방법도 배우고 민주주의 제도를 이해하면서 서로 도와가며 살 수 있는 건물 하나를 기증했다. 도산은1904년 미주 한인이 최초로 조직한 단체인 공립협회를 설립하고 한인들의 의식개혁운동을 꾸준히 펴 나갔다. 그는 또 야간학교를 세우고 귤(오렌지) 농장에서 일하는 한인노동자를 모집해 영어 와 역사, 그리고 지리, 성경 등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도산이 교육과 교양이 있는 한인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 모든 힘을 쏟아 부었던 것은 자신의 피와 땀을 바치는 민족지도자의 자질을 그대로 발로한 것이다.

때 마침 캘리포니아주에서는 일본인 배척운동이 생겼다. 그와 같은 운동의 여파로 동양인들이 환영받지 못하고 있던 차에 한국인들이 미국사람들의 신용을 얻고 환영을 받게 되자 하와이 등 미국각지에서는 캘리포니아주의 리버사이드 부근으로 한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는 현상도 생겼다. 그리하여 리버사이드는 한국인 노동자들의 낙원에서 안창호의 소 공화국이라는 별명까지 생길 정도로 평화스럽고 안정된 한인 커뮤니티(공동체)로 탈바꿈하게 됐다. 한인이민역사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태평양 항해 2주만에 시애틀 항구에 도착

우리 한국 유학생은 이와 같은 우리 선조들의 신화 같은 이야기를 서로 나누면서 반세기 전에 미국에 건너와서 활동한 도산 안창호와 같은 민족지도자로부터 우리는 배울 것도 많고 미국에 대해 공부도 많이 해야 할 필요성을 새삼 느끼게 됐다. 우리가 미국에 대해 무엇을 알아야 하며, 미국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제기하게 된 것은 유학 왔을 때뿐만 아니라 반세기가 넘은 오늘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땅에 도착한 젊은이들은 우리와 같은 이 질문을 늘 던지고 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36년간의 쓰라린 일본 식민지통치를 받아온 우리민족이 해방됐을 때 미군부대는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목적으로 한국에 주둔하게 됐다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적인 사실이다. 그러나 미국 군대는 반세기가 넘은 오늘도 아직 한국땅에 남아있으며 미군의 한국주둔은 한국의 반미감정을 점차 부추기고 있다. 미국은 과연 우리에게 필요한 존재인가. 미국 유학생이라면 누구나 한 번씩 생각해 보는 문제다.

태평양 항해를 떠난 지 2주일 후 우리가 타고 온 배는 미국의 서부 워싱턴 주에 있는 시애틀 항구에 도착했다. 1953년 10월 5일의 일이다. 벌써 늦가을의 냄새가 물씬 풍기고 있었다. 길거리의 가로수는 붉고 노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단풍이 한창 절정을 이루고 있었다. 2주일동안 같은 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온 유학 동지들은 이제 여기서 하직인사를 해야 한다. 샌프란시스코(상항) 으로 가는 사람, 롱비치로 떠나는 친구, 그리고 뉴욕으로 떠나는 사람 등 다양했다.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성공의 앞날을 기약하면서 우리는 서로 갈 길을 서둘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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