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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현실 세계를 설명할 수 없다면
내가 사는 현실 세계를 설명할 수 없다면
  • 이예슬
  • 승인 2023.10.31 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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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연구자대회 57 이론이 안내하는 경험적 연구
이예슬 계명대 국제학연구소 전임연구원

특별기획 ‘천하제일연구자대회’는 30~40대 인문·사회과학 연구자들의 문제의식과 연구 관심, 그들이 바라보는 한국사회와 학계의 모습에 대해 듣는 자리다. 새로운 시야와 도전적인 문제의식으로 기성의 인문·사회과학 장을 바꾸고 있는 연구자들과 이전에 없던 문제와 소재로써 아예 새 분야를 개척하는 이들을 만난다. 어려운 상황에서 분투하고 있는 젊고 진실한 연구자들을 ‘천하제일’로 여겨도 된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연구자문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민교협 2.0’과 함께한다.(‘천하제일연구자대회’ 시즌2를 시작하며_우리 학술장의 ‘소통 공간’ 함께 키워 갑시다)

 

 

내 주위의 세계는 청년이 취업도, 결혼도, 출산도 하지 않아 
국가의 근심이 이만저만 아닌 수도권 중심의 세계와는 다른 곳이다. 
소위 말하는 ‘MZ세대’가 ‘늦어도 결혼은 꼭 하겠다’고 답하는 
대학생이 대다수인 지역의 현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걸까?

#지역에서 공부하는 젊은 여자
한국 사회에는 학문조차 서울과 지역 사이의 위계가 존재한다. ‘지역’에서 학문을 평생의 업으로 공부하는 사람이 드문 이유다. 그렇다고 지역에 진정성을 가지고 학문에 힘을 쏟는 사람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나는 스스로 그런 사람 중 하나라고 여긴다. 박사 과정을 마치고 학위 논문을 제출하기까지 4년이 걸렸다. 학부부터 쉬지 않고 공부를 해왔다는 핑계를 대며, 박사수료생 신분으로 틈만 나면 여기저기 열심히 여행을 다닌 덕분이다.

그 시절 함께 대학원 생활을 한 여성학 전공자는 나를 지켜보다 말고 한숨을 내쉬었다. “지역에서 나이 든 여자가 공부하는 게 얼마나 힘든 줄 알아요?” 나는 움찔했다. 박사수료생이지만 학위논문 작성은 뒷전인 내 모습에서 지나친 여유와 한갓짐이 보였던 것일까? 민망함을 잠시 뒤로 하고 ‘지역에서 공부하는 젊은 여자’는 사정이 다른지 반문해 보았다.

쉽게 답할 수 없었지만, “저는 하나도 힘들지 않아요”라고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학비 마련과 지도교수와의 관계 설정, 집안의 반대와 같은 현실적인 고민을 털어놓는 사람에게 ‘학문 추구’라는 추상적이고 초월적인 언어가 무슨 호소력이 있을까 생각했다. 

#끌려가는 대학원
나는 지금 모교에서 사회학을 가르치고 있다. 어느 날 야무지고 똘똘한 모습으로 수업에 집중하던 한 학생이 슬며시 다가와 물었다. 처음에는 수업 내용과 관련된 질문인가 했다. “A 교수님이 언제든지 연구실에 놀러 오라고 말씀하셨는데, 진짜 가도 돼요?” 교수님과 미리 약속하고 찾아가는 것이야 문제가 없지 않겠느냐고 답했다. “근데, 연구실 놀러 가면 뭘 하나요?” 학교생활이나 학업과 관련한 상담일 거라고 말했다.

“선배들이 거기 놀러 가면 대학원 끌려간대요. 진짜예요?” 마지막 말을 듣고는 피식 웃고 말았다. 세상에나, 대학원에 ‘끌려간다’니. 대학원이 학문의 배움터가 아니라 교수 갑질의 고통장으로 여겨지고 있다는 생각에 씁쓸했다. 이제 막 학부 2학년이 된 학생에게 들려주기에는 너무나 진지한 이야기. 속으로만 되새겼다. “대학원은 학문적 탁월성을 키우는 장이란다. 주어진 세계를 초월하여 사유하고 성찰하는 방법을 배우지. 함께 글을 읽고, 토론하고, 비판하지. 학문적 진정성과 엄격성을 키워가는 학문 공동체라고.”

새로운 학문적 자아로 성장하다

나는 나 자신을 ‘지역에서 공부하는 젊은 여자’라는 특수한 범주로 정체화한 적이 없다. 사회학 공부에 뛰어든 이래 줄곧 ‘나는 공부하는 사람이다’라는 보편적 범주로 나를 정의해왔다. 물론 지역에 사는 사람으로서, 젊은 여자로서 여러 현상에 대한 사회학적 문제의식은 가지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특수한 범주로 인해 학문 세계에서 고뇌에 빠지지는 않는다. 나를 ‘지역’, ‘나이’, ‘여성’의 사회적 범주에 가두어 학문적 세계를 좁힐 이유가 없다. 사회학을 공부하며 현실 세계의 사회적 범주를 초월하는 새로운 학문적 자아를 형성해왔기에 가질 수 있는 생각이다.

새로운 학문적 자아는 지도교수를 포함한 여러 사회학자의 지지를 통해 매 순간 성장한다. 사회학 대가의 이론과 연구를 통해 내 삶과 연관된 질문을 사회학적으로 이해하고, 해석하고, 설명하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쁘고 좋다. 이 기쁨은 누군가의 강요나 강압으로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학문의 장에 초대받을 수는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학문을 평생의 업으로 삼는 것은 내적인 추동이 있어야 가능하다. 학문적 진리를 추구하는 삶이 있다는 강한 믿음이 필요하다. 그래야 학문에 자발적으로 헌신하고, 이 과정에서 학문적 자아는 구체적 현실을 뚫고 초월의 세계로 나아간다.

‘이론이 안내하는 경험적 연구’를 수행하고 또 해내야만 한다. 그래야 이론과 삶의 세계의 간극을 좁힐 수 있다고 필자는 말한다. 이미지=DALL·E3

이론과 ‘삶의 세계’의 간극

갈피를 잡지 못하던 박사학위 논문 주제는 현실 세계의 자아와 학문 세계의 자아가 결합하면서 구체적인 모습을 갖추었다. 대구라는 지역에서 살아가는 젊은 여성에게 주어진 현실과 긴박한 요구에서 벗어나 학문적 가치를 추구하길 바라는 학문의 이상이 접점을 이루는 과정은 평탄하지 않았다. 학부 4년, 석사 2년, 박사수료까지 2년 반 그리고 박사학위논문을 완성하기까지 4년. 무엇이든 한 길을 10년 이상 헌신하면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될 수 있다던 지도교수의 말처럼, 10년을 넘게 사회학을 공부해서 마침내 박사논문을 완성했다.

그 시간 동안 함께 대학생활을 한 선후배와 동기들은 하나둘씩 취직하고, 승진하고, 결혼하고, 출산하고 부모가 되었다. 사회학 전공이 특정한 일자리와 일대일 매치가 되지 않아 취업이 걱정이라던 그들은 오히려 어떤 한 분야에 몰리지 않고 다양한 영역에서 삶을 살아가고 있다. 공통점이 있다면 대부분 결혼-출산-육아의 삶의 과정을 성실히 수행한다는 것이다.

내 주위의 세계는 청년이 취업도, 결혼도, 출산도 하지 않아(또는 하지 못해) 국가의 근심이 이만저만 아닌 수도권 중심의 세계와 다르다. 소위 말하는 ‘MZ세대’에게 물어도 ‘늦어도 결혼은 꼭 하겠다’고 답하는 대학생이 대다수인 지역의 현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걸까? 

연애·결혼·출산·육아·비혼·비연애·비출산 등과 같은 친밀성과 관련한 일련의 주제에 대해서 사회학은 ‘친밀성의 구조변동’으로 설명한다. 근대 세계의 출현은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들뿐더러, 구조변동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의 새로운 질서를 자아낸다. 친밀성의 구조변동은 연애-결혼-출산-육아의 자연적 연계의 고리가 느슨해지고 이지러지는 지점을 설명하고, 새로운 친밀성의 실천을 포착한다.

문제는 친밀성과 관련된 이론이 내 주변에서 나타나는 삶을 설명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데 있다. 친밀성의 구조변동을 통해 접근하자니 자연적 연계를 너무 잘 따라 살아가는 지역 청년의 삶을 설명하지 못하는 모순에 처한다. 이론이 모든 경험적 현실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지만, 그 둘의 간극이 왜 발생하는지 설명해야만 한다. 현실 세계와 학문 세계가 분절된 채로 살아가다가는 스스로 지독한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 분명하다. 사회학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한국 사회에 ‘친밀성’의 영역이 존재하는가? 

한국 사회 에로틱 영역의 가치 미(未)분화

한국 사회학계에서 친밀성을 다루는 논의는 크게 네 가지로 나뉜다. 우선 친밀성과 폭력의 관계를 다룬다. 이성애와 가부장제에 기반한 낡은 친밀성 형식이 남녀 사이의 권력 위계를 만들뿐더러 친밀한 관계의 정서적이고 신체적 학대를 양산하는 현실을 폭로한다.

두 번째, 친밀성과 국가의 관계를 분석한다. 국가는 가족을 교묘하게 통치의 전략으로 활용한다. 특히 여성의 몸과 섹슈얼리티에 가해지는 국가의 통제에 관심을 기울인다. 세 번째, 친밀성의 시장화와 상품화에 대해 논의한다. 차가운 시장의 원리가 정서적 안온감과 연결된 친밀성을 어떠한 방식으로 변화시키는지 파헤친다.

네 번째, 대안적 친밀성에 대한 탐구인데, ‘정상가족’의 형태가 이지러지며 새롭게 출현하고 있는 친밀성의 실천을 탐구한다. 이러한 논의의 흐름은 친밀성의 논의를 개인의 내면이나 가부장제의 부당함 또는 국가의 폭력성을 폭로하기 위한 지엽적인 것으로 한정하는 한계를 지닌다. 

좁은 프레임을 걷어내자 친밀성과 근대성의 관계가 눈에 들어왔다. 사회가 합리화 과정(탈주술화와 주지주의화)을 통해 종교 영역, 경제 영역, 정치 영역, 심미 영역, 에로틱 영역, 지적 영역으로 분화한다고 설명한 막스 베버의 논의를 붙들고 늘어졌다. 친밀성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제안하기 위해 베버의 ‘에로틱 영역’의 분화 과정을 집중적으로 탐구했다. 이론적으로는 막스 베버의 가치분화론의 메커니즘을 파악하고 이에 걸맞는 분석을 구성했다.

이를 통해 한국의 ‘간통죄’ 폐지 논의를 경험적으로 분석했다. 결혼으로 맺어진 가족 밖의 에로티시즘을 금지하는 법인 ‘간통죄’ 폐지 논의를 역사적으로 재구성하고 텍스트 분석을 실시했다. 이 과정을 통해 한국 사회는 친밀성 영역의 원형적 형태인 에로틱 영역의 가치 분화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론이 안내하는 경험적 연구’를 선택한 이유

박사학위 취득 후, 기나긴 학문의 여정에서 제일의 길라잡이로 ‘이론이 안내하는 경험적 연구’를 선택했다. 연구를 수행하면서 사회학 이론을 통해 내가 사는 현실 세계를 조망하면 설명할 수 없는 지점이 곳곳에 드러났다. 친밀성에 대한 사회학 이론이 서구의 세계를 설명하고 해석하는 과정에서 출현한 탓이다. 한국의 역사적·문화적 맥락에서 잘 들어맞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고 체념할 수도 있다.

이 체념은 두 가지 길을 제시한다. 현실 세계의 경험적 연구는 미루어두고 추상적 이론만 탐구하는 방법과 이론은 뒤로하고 기술적인 방법론을 통해 경험적 연구만 하는 방법. 나에겐 이 두 가지 방법이 크게 매력적이지 않다. 내 삶을 설명할 수 없는 이론이 무슨 의미가 있나? 이론 없이 현실 세계의 사례를 기술하는 것이 사회학적으로 의미가 있나? ‘이론이 안내하는 경험적 연구’를 수행하고 또 해내야만 한다. 그래야 이론과 삶의 세계의 간극을 좁힐 수 있다. 

이예슬 계명대 국제학연구소 전임연구원
막스 베버의 에로틱 영역 가치분화론 재고찰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론적으로는 베버의 가치분화론에 대한 메커니즘을 파악하고 분석틀을 구성했다. 경험적으로는 한국의 ‘간통죄’ 폐지 논의를 역사적 맥락에서 분석하고, 에로틱 영역의 가치 분화 과정을 파악했다. 현재는 박사학위논문을 확장해 베버의 가치분화론을 통해 한국 사회의 여러 가치 영역 분화에 대한 심층적 연구를 하고 있다. 젠더·친밀성·에로티시즘·섹슈얼리티의 문제를 문화사회학적 관점으로 설명하는데 큰 관심을 두고 있다. ‘이론이 안내하는 경험적 연구’를 탁월하게 수행하는 연구자로 평가받기 위해 노력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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