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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양장점, 전후 ‘여성의 경제’ 축소판
1950년대 양장점, 전후 ‘여성의 경제’ 축소판
  • 김미선
  • 승인 2023.09.07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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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연구자대회 50 한국근현대사에 대한 젠더·문화연구 
김미선 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원 학술연구교수

특별기획 ‘천하제일연구자대회’는 30~40대 인문·사회과학 연구자들의 문제의식과 연구 관심, 그들이 바라보는 한국사회와 학계의 모습에 대해 듣는 자리다. 새로운 시야와 도전적인 문제의식으로 기성의 인문·사회과학 장을 바꾸고 있는 연구자들과 이전에 없던 문제와 소재로써 아예 새 분야를 개척하는 이들을 만난다. 어려운 상황에서 분투하고 있는 젊고 진실한 연구자들을 ‘천하제일’로 여겨도 된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연구자문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민교협 2.0’과 함께한다.(‘천하제일연구자대회’ 시즌2를 시작하며_우리 학술장의 ‘소통 공간’ 함께 키워 갑시다)

 

 

1950년대 양장점 분석을 통해 전후 ‘여성의 경제’는 
지역사회를 기반으로 경제적 생산과 사회적 재생산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면서, 
생계경제와 자급경제는 물론 가족을 넘어선 여성중심의 경제적 관계와 
다양한 관계망을 구성하는 공동체경제임을 밝혔다. 

여성학 연구자로서 역사 연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여성학이 한국 여성의 현재적 문제를 구성해온 식민통치, 한국전쟁/분단, 냉전과 산업화 등 한국의 역사적 맥락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수반되어야 한다는 문제의식 때문이었다. 

서구 여성의 경험과 서구적 맥락 속에서 구성된 페미니즘 이론만으로는 한국적·아시아적 맥락에서 살아가는 한국 여성의 경험을 문제화하는데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1990년대와 2000년대를 지나면서 일본군 ‘위안부’를 비롯해 신여성, 제주4·3 피해여성, 전쟁미망인, 공장노동자 등 한국 근현대사에서 여성의 경험이 어떻게 구성되었는지를 분석한 여성학 연구가 등장했다.

나는 그런 여성학의 흐름에서 식민지배를 경험한 비서구 아시아 여성의 경험에 대한 여성학적 구성을 통해 이론화하는 연구가 중요하다고 보았다.

구술사를 통한 여성노동 연구의 새로운 접근

나의 문제의식을 한층 발전시킬 수 있었던 것은 구술사 연구를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석사논문으로 신여성의 소비문화에 대한 담론분석을 통해 식민지적 자본주의에 의한 여성소비주체의 구성에 주목하면서, 식민지 시대를 살았던 여성의 구체적인 경험 세계에 다가가고 싶었다.

나는 구술사 연구를 통해 노동과 경제영역에서 여성의 역할과 위치가 어떻게 구성되었으며, 이러한 과정이 한국 근현대사에서 갖는 의미를 밝히는데 관심을 갖게 되었다. 여성학에서는 문헌자료의 부족을 보완하는 차원을 넘어서 여성이 자신의 경험을 어떻게 의미화하는지에 초점을 두며 구술사 연구가 전개되어왔다. 

나는 국사편찬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구술채록 사업을 하면서 임형선을 만났다. 이는 한국 여성노동사에서 임금노동과 가사노동에 가려 간과된 여성의 자영업 연구에 관심을 갖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임형선 예림미용고등기술학교장의 수업 장면이다. 1950~1960년대 모습이다. 사진=구술자 제공

임형선은 식민지 시대 가난한 임금노동자인 미용사였으나 해방 이후 경제적으로 자립한 자영업자였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에는 계층 상승을 한 미용(기술)교육자이자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여성 명사로 거듭났다. 그녀의 생애를 통해 ‘여성적 기술’로 저평가된 미용·양재·수예·편물 등을 활용해 사업체를 운영한 여성이 자신의 노동과 경제적 경험을 어떻게 의미화했는지, 나아가 그들이 한국 경제사에서 어떤 위치에 있으며,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여성학, ‘노동·계급·경제’ 역사적 논의는 저조

나의 연구 주제에 천착하게 된 데에는 신자유주의로 인한 노동문제가 심각한 상황이지만 사회과학연구 전반에서 노동과 계급에 대한 비판적인 논의가 부족한 상황이라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 

여성학이 부상하던 1980~1990년대만 해도 여성노동자와 계급 문제는 주요한 관심사였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여성의 차이에 대한 주목이 정체성, 특히 섹슈얼리티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성폭력과 성매매, 그리고 2000년대 이후 부상한 디지털 성범죄를 비롯한 여성혐오와 백래시의 부상 등으로 젠더 폭력에 대한 논의와 비중은 지속적으로 확대되었다. 이러한 상황이다 보니 젠더 폭력과 섹슈얼리티 연구가 여성학을 대표하는 연구로 이해되는 경향이 강하다. 

이와 달리 여성 노동을 비롯해 계급과 경제에 대한 페미니즘 관심은 저조한 편이다. 지금의 여성노동 연구는 젠더와 섹슈얼리티 연구에서 논의된 새로운 이론과 충분히 소통하지 못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기존 논의의 흐름을 답습하는 경향이 강하다 보니 여성노동 연구의 새로운 패러다임 전환을 시도하지 못하고 있다. 

여성의 ‘노동·경제적 실천’ 역사화·이론화 시도

이런 현실에서 나는 여성의 노동과 경제에 대한 역사적 접근을 통해 새로운 논의를 이끌어내고자 했다. 나는 한국전쟁으로 초래된 경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수많은 여성이 행상과 소규모 사업체 운영 등 자기고용을 통해 자영업에 진출한 변화에 주목했다.

이 연구로 박사논문 「양장점을 통해 본 1950년대 전후(戰後) ‘여성의 경제(Female Economy)’」를 완성했다. 이는 명동의 장소성에 초점을 두면서 여성의 소비와 노동, 그리고 여성 커뮤니티를 다룬 『명동아가씨: 근현대 여성 공간의 탄생』(마음산책, 2012)을 이론적 측면에서 한층 심화한 것이다.

양장점은 전후 여성의 노동과 경제적 실천이 이뤄지는 공적 ‘장(field)’이 새롭게 구성되는 과정에서 여성 중심의 경제 영역이 구성되는 메커니즘과 구조를 드러낼 수 있는 핵심적인 공간, 즉 전후 ‘여성의 경제’ 축소판으로 보았다.

자기고용을 통한 전후 여성의 자영업 운영은 대량생산과 자본축적이라는 자본주의적 가치보다는 맞춤복이라는 소생산 방식을 통해 타인·관계·돌봄·지속가능성의 성격을 가졌다. 전후 여성의 새로운 경제적 실천인 자영업과 이를 기반으로 전개된 경제활동의 양상과 성격을 밝히는 이론적 개념화를 시도했다. 

1950년대 명동의 양장점 풍경이다. 사진=한영수 작가, 명동, 1956~1960년, 한영수문화재단 제공

‘여성의 경제’는 ‘여성적 기술’을 기반으로 여성 대상의 상품을 생산 및 판매하며 여성이 주도적으로 운영하는 자영업을 통해 구성된다. 여성의 경제는 여성 위주로 전개된 경제활동의 장·영역·구조·양식을 뜻한다. 이는 여성의 경제활동을 경제영역에서 특정한 방식으로 구성하는 성별 정치를 조망할 수 있는 전거가 된다.

이에 1950년대 양장점 분석을 통해 전후 ‘여성의 경제’는 지역사회를 기반으로 경제적 생산과 사회적 재생산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면서, 생계경제와 자급경제는 물론 가족을 넘어선 여성중심의 경제적 관계와 다양한 관계망을 구성하는 공동체경제임을 밝혔다.

이러한 이론화 과정은 양장점을 운영한 여성 구술자들이 자신의 생애를 재해석하면서 의미화한 여성의 경제적 실천을 역사적 맥락 속에 위치시키고 페미니즘 관점에서 분석함으로써 가능할 수 있었다. 

역사학·경제학 넘나들며 ‘한국젠더경제사’ 정립 필요

나의 연구는 임금·가사노동으로 이원화되어 20세기 한국여성노동사가 놓친 여성의 자기고용, 즉 자영업이 여성 중심의 새로운 경제영역을 구성하면서도 상품생산은 물론 사회적 재생산을 동시에 수행하면서 유동적인 공사영역을 구성하였음을 보여주었다. 더욱이 1950년대 여성의 삶에 대한 기존 논의가 가부장제와 민족주의에만 지나치게 집중하면서 경제적 맥락을 간과한 문제를 파고들었다.

나는 새로운 자료와 시각을 제공함으로써 전후 사회가 자본주의 초기라는 점에 주목하고 ‘자본주의(대량생산) 역사 이행’ 논쟁에 개입하고자 했다. 이는 국가와 남성 주도의 대기업, 그리고 경제성장과 경제정책 일변도의 한국경제사 논의의 패러다임을 전환하면서 젠더 관점에서 그리고 아래로부터 한국(현대)경제사를 다시 쓰는 작업이었다. 

한국경제사 다시쓰기 작업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경제(사)학에서의 젠더 관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하지만 이런 연구는 찾아보기는 어렵다. 앞으로 ‘여성의 경제’에 관한 연구를 식민지와 산업화 시기로 확장하는 것은 물론, 한국 근현대사에서 경제의 역사적 구성 과정을 젠더 관점에서 분석해야 한다.

또한 노동·경제·계급과 관련한 지식·실천·의미가 어떻게 성별화된 방식으로 구성되었는지를 비판적으로 고찰하는 한국 젠더경제사 연구를 정립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나의 문제의식과 새로운 연구영역에 대한 학문적 가치의 확신을 가지며 연구를 지속할 수 있었던 건 ‘역사에서 사라진’ 자신들의 경험과 생애를 나눠주고 또 응원해준 구술자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앞으로 역사학과 경제학 등 분과학문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노동·경제·계급에 대한 젠더 접근을 통해 한국 근현대사가 구성한 여성의 경험, 동시에 여성이 구축한 한국 근현대사를 계속 연구하고자 한다. 

김미선 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원 학술연구교수
여성의 노동·경제와 관련한 경험·실천·지식을 페미니즘 관점에서 역사적으로 개념화하고 이론화하는 작업을 시도하고 있다. 이화여대 여성학과와 위스콘신주립대(메디슨) 역사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마쳤다. 이화여대 여성학과에서 「양장점을 통해 본 1950년대 전후(戰後) ‘여성의 경제(Female Economy)’」 박사논문으로 우수학위논문상을 수상했다. 저서로 『명동 아가씨: 근현대 여성공간의 탄생』(마음산책, 2012)과 『모던걸, 치장하다』(국사편찬위원회, 2008)가 있다. 대표 논문으로 「양장점을 통해 본 전후 1950년대 ‘여성 자영업주’의 탄생」, 「이승만 정권 초기의 직업여성담론에 관한 연구 : 여성지 『職業女性』(1950.6) 창간호를 중심으로」, 「근대적인 ‘직업여성’의 여성 정체성과 직업의식의 형성과정에 관한 연구: 1세대 미용사 임형선의 구술생애사를 중심으로」 등이 있다. 한국연구재단 지원 과제로 「1950-70년대 자영업의 젠더화와 여성 자영업주의 경험·기억·역사」를 5년간 진행할 예정이다. meesun.kim76@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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