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7 15:50 (토)
한 명의 문인을 파고드는 한문학을 연구하는 이유 
한 명의 문인을 파고드는 한문학을 연구하는 이유 
  • 오보라
  • 승인 2023.09.14 08:2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천하제일연구자대회 51 조선 후기 주변부 문인의 한문 산문 연구
오보라 고려대 한문학과 강사·퇴계학연구원 연구원

특별기획 ‘천하제일연구자대회’는 30~40대 인문·사회과학 연구자들의 문제의식과 연구 관심, 그들이 바라보는 한국사회와 학계의 모습에 대해 듣는 자리다. 새로운 시야와 도전적인 문제의식으로 기성의 인문·사회과학 장을 바꾸고 있는 연구자들과 이전에 없던 문제와 소재로써 아예 새 분야를 개척하는 이들을 만난다. 어려운 상황에서 분투하고 있는 젊고 진실한 연구자들을 ‘천하제일’로 여겨도 된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연구자문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민교협 2.0’과 함께한다.(‘천하제일연구자대회’ 시즌2를 시작하며_우리 학술장의 ‘소통 공간’ 함께 키워 갑시다)

 

 

우리 학계가 ‘한문학’을 ‘근대의 분과 학문’으로 정착시키는 과정에서 
거대 담론에 집중해, 정작 기초적인 작업을 소홀히 했던 것은 아닐까. 
광범위하게 한문 문헌을 읽고 정리하여 그 계보를 밝히는 작업은 
상대적으로 평가 절하되었던 듯하다. 

흔히 한문학은 문·사·철을 아우르는 학문이라고 일컫는다. ‘한문학’에 대한 이러한 정의는 ‘한문학’이라는 학문이 포괄적 성격을 지니며, 동시에 ‘근대의 분과 학문’으로서는 다소 모호한 성격을 띠고 있다는 뜻이다.

20세기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의 지적 탐구의 성과는 대부분 ‘한문’으로 기록되었다. ‘한문’으로 기술되는 지적 활동이 곧 ‘학문’이라고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전통 시대에 ‘한문학’이라는 말은 굳이 필요치 않았다. 그렇다면 ‘한문학’이라는 용어는 ‘한문’이라는 표기 수단이 지적 세계에서 헤게모니를 잃기 시작하면서 생겨났다고 볼 수 있다.

20세기 초반에 탄생한 ‘한문학’은 한편으로는 다카하시 토오루(高橋亨)로 대표되는 일본 제국주의 ‘조선학’과 대결하며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고투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나라 내부의 ‘순국문주의’와 논쟁하며 제도권 내 학문으로서 정착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처럼 ‘한문학’은 지난한 세월을 거쳐 ‘근대의 분과 학문’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한문학’의 성격과 정체성에 대해서는 학계 내에서 명확하게 합의된 바가 없는 듯하다.

한문학의 ‘포괄성’과 ‘모호함’에 이끌리다

한문학 연구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법한 한문학의 형성 과정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한 이유는, 현 학계의 문제점을 진단하거나 한문학의 미래에 대한 청사진을 제시하기 위함이 아니다. 이런 이야기를 꺼낸 까닭은, ‘한문학’이 지닌 ‘포괄성’과 ‘모호함’이 바로 나를 이 학문으로 끌어들인 계기이자, 현재 내가 한 사람의 학자로서 학문의 방향성을 고민하는 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나는 학부 시절에 정치외교학을 전공하여 동서양 정치사상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던 중, 우연한 계기로 한문학을 부전공으로 선택하게 되었다. 그 당시 특히 재미있게 읽었던 것은 「맹자(孟子)」였다. 비유나 인용을 다양하게 활용한 「맹자」의 언어적 수사는 한문 고전을 읽는 재미를 느끼게 해주었다. 나는 처음에는 다양한 주제의 한문 원전을 읽는 일 자체에 매력을 느꼈다.

나는 석사논문을 쓰게 되면서 비로소 학문의 방향성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한문학은 문·사·철을 아우른다고 하지만, 사실 한문학계 연구의 중심은 문, 즉 ‘문학’에 맞추어져 있다. 석사논문 주제를 고민할 당시의 나는 이러한 ‘문학’ 중심의 연구 경향에 모종의 반발심을 갖고 있었다. 근대 이전의 한문산문은 실용적 성격의 글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한시도 정치나 교유의 장에서 지어진 경우가 꽤 많았다.

따라서 작가적 개성이나 문예미를 밝히는 데 초점을 두는 연구로는 전근대 한문 문헌의 의미를 제대로 밝힐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한편, 문예이론 분석에 그다지 관심이 없던 개인적인 학문 취향도 ‘문학’에 대한 반발심을 갖는 데 한몫을 했다. 이런저런 고민 끝에 석사논문은 ‘일기(日記)’를 주제로 하여 전근대 지식인의 ‘기록의식’이라는 문제를 다루었다. 

반발했던 ‘문학’으로 다시 돌아오다

그런데 이후 박사논문은 ‘문학’을 키워드로 한「서파(西陂) 유희(柳僖) 문학 연구」라는 제목으로 발표하게 되었다. 이러한 주제를 정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첫 번째 이유는 ‘문학’ 중심 연구 경향에 대한 나의 반발심이 학계 연구 동향을 세밀하게 파악하지 못한 데에서 기인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기존의 ‘문학’ 연구가 역사적·사회적 맥락을 고려하고 있다는 점을 석사논문 집필 당시의 나는 간과하고 있었다.

그 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한문으로 된 여러 문체를 두루 장악하고 있어야 한문학을 거시적 관점에서 조망할 수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이에 나는 한 명의 문인(文人)을 대상으로 다양한 문체를 종합적으로 고찰하는 박사논문을 써야겠다고 결심했다. 그 대상 인물로 선택한 문인이 바로 ‘서파 유희’였다.

유희(1773~1837)는 경학·문학·역사학·천문학·수리학·음률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 걸친 저술을 모아 문통이라는 저작을 남겼다. 문통은 내용면에서나 형식면에서나 전근대 시기 한문 저술의 다양한 양상을 담고 있다. 문통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이 소장하고 있다.

「물명고(物名考)」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유희(1773~1837)는, 경학·문학·역사학·천문학·수리학·음률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 걸친 저술을 모아 「문통」이라는 저작을 남겼다.  「문통」은 내용이나 형식면에서 전근대 시기 한문 저술의 다양한 양상을 담고 있다. 이처럼 다양성을 지닌 「문통」은 나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왔고, 「문통」에 수록된 여러 문체의 글을 종합적으로 연구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박사논문의 연구방법론을 고민하고 있던 차에, 그 무렵 일본에서 발간된 『日本「文」学史』 제1책(2015)과 제2책(2017)이 나에게 영감을 주었다. 이 책은 ‘Literature’의 번역어인 ‘문학(文學)’이 아니라, 전근대 시기 ‘文’이라는 말에 내포된 다양한 의미에 주목하여 일본의 문학사를 재조망한 책이다.

구체적으로 이 책은 ‘文의 개념’, ‘文과 사회’, ‘文이 만들어지는 장(場)’, ‘사회에서 文의 기능과 문인의 활동’ 등을 키워드로 일본 문학의 흐름을 고찰했다. 나는 이 책에서 힌트를 얻어, 언문(諺文)·물명(物名)·여성·불교 등 몇 개의 키워드를 설정하고 유희의 사상·학문과 시문 창작의 상호 영향 관계를 규명했다.

거대 담론이 놓칠 수 있는 다양성

박사논문을 쓰면서 나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첫째, 시대적 필요성에 의해 제기된 거대 담론이 개별 문인이 지닌 다양한 모습을 가릴 수 있다는 점이다. 유희는 시대적 필요성에 의해 호명되고 발굴된 작가 중의 한 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평생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광주·용인을 기반으로 생활했으며, 그의 저술은 당대 학계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정인보의 「조선고서해제(朝鮮古書解題)」에서 「문통」의 가치를 언급하고서부터, 유희는 비로소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정인보의 「조선고서해제(朝鮮古書解題)」는 일제에 맞서 우리 민족의 주체성을 확인하려는 작업의 일환이었다.

정인보가 유희에 대해 “所値 마침 朝鮮學의 潜興期였었으므로 國故에 대한 열쇠 한둘이 아니니, 朝鮮語訓釋을 附한 物名類考, 詩物名考와 訓民正音의 奧義를 探索한 諺文志 等이 다 이것이다”라고 평가한 것 또한, 민족 주체성을 확인하려는 작업의 일환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후 우리나라 학계에서 실학이 대두하면서, 유희는 대표적인 실학자 중의 한 명으로서 거론되었다.

1931년 2월 23일 <동아일보> 4면 「조선고서해제: 문통」

하지만 「문통」을 살펴보면, ‘실학자’라는 말로는 유희의 다기한 학문·사상을 표현할 수 없다. 유희는 불교에도 관심을 갖고 선가의 양각직일편(兩脚直一篇)을 비판적으로 수용한 한시를 지었으며, 원중도(遠中道)의 「선문본초보(禪門本草補)」에서 영향을 받은 「희보본초(戱補本草)」를 짓기도 했다.

또 경전을 주해하면서 자신의 천문학적 지식에 근거해 성리학의 주요 개념을 풀이하기도 했다. 즉 ‘실학’에서 한 걸음 떨어져 유희의 저술에 밀착하여 그의 학문·사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여전히 진보적 문인에게 집중돼 있지 않았나

둘째, 한문학 분야 연구자의 관심이 여전히 특정 인물군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이다. 유희의 집안은 소론계이며, 유희는 자신의 학문 연원이 ‘파로(坡魯)’, 즉 파주(坡州) 우계(牛溪)의 성혼(成渾)과 노서(魯西) 윤선거(尹宣擧)에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유희는 윤선거의 아들이자 소론의 영수인 윤증(尹拯)을 사숙했으며, 윤증의 후손인 윤광안(尹光顏)을 스승으로 섬겼다.

유희처럼 ‘파로’를 학문 연원으로 삼은 소론계 문인들은 윤증의 학문을 이어받아 성리학 연구에 힘썼는데, 이들에 대한 연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강화학파나 서유구 집안 등, 다른 소론계 문인에 대한 연구가 활발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내재적 발전론이나 근대 중심주의에 대한 학계 내 비판이 상당히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연구자들의 관심은 ‘진보적’인 성향을 갖는 문인들에게 집중되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셋째, 주변부 문인의 글쓰기 양태를 연구하는 작업이 조선시대 문화사·지성사 연구에 일조한다는 점이다. 유희는 ‘송두신문(送痘神文)’, ‘신루상량문(蜃樓上樑文)’ 등의 독특한 글을 지었다. 그런데 ‘송두신문’은 중국·일본에서는 보기 드문, 우리나라에서 유독 유행한 글쓰기 양식이다.

‘송두신문’의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숙종이 두창에 걸렸다가 나은 이후 우리나라 사대부 사이에서 두창신을 섬기는 주술 행위의 대체물로써 ‘송두신문’이 지어졌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또 신루상량문(蜃樓上樑文)의 전개 양상을 살피다 보면, 갑오개혁 때 과거제가 폐지된 이후 여전히 전통적 학문의 영광을 꿈꾸던 향촌 지식인들 사이에서 까치집·신기루 등을 소재로 한 가상의 상량문이 창작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당대 정계·학계의 중심부에서 벗어나 있는 인물이 남긴 글을 통해, 조선 후기 사회의 모습을 다각도로 조명할 수 있다.

소장학자에게는 흥미로운 논쟁이 없다?

박사논문 집필 이후 나는 두 가지 방향에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첫째, 윤광소(尹光紹)·강필효(姜必孝) 등 ‘파로’를 학문 연원으로 삼은 소론계 문인들의 계보와 학문·사상을 추적하는 연구이다. 둘째, 주변부 문인들이 남긴 다양한 문체의 산생 배경과 전개 양상을 분석하여 조선후기 사회상을 밝히는 연구이다. 나는 이 두 가지 범주에 해당하는 한문 문헌을 정리하고 개별 문헌의 의미를 밝히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런 나의 연구는 거시적 담론이나 뚜렷한 쟁점을 지니고 있지 않다. ‘소장학자들에게는 흥미로운 논쟁이 없다’는 선배 학자들의 우려 섞인 탄식에, 나 역시 원인 제공을 하고 있는 셈이다. 나 자신도 내 연구에 ‘논쟁성’이 부족하다는 점에 대해 반성과 고민을 하고 있다.

그런데 한편으로 드는 생각은, 그동안 우리 학계가 ‘한문학’을 ‘근대의 분과 학문’으로 정착시키는 과정에서 거대 담론에 집중하여, 정작 기초적인 작업을 소홀히 했던 것은 아닐까. 광범위하게 한문 문헌을 읽고 정리하여 그 계보를 밝히는 작업은 상대적으로 평가 절하되었던 듯하다. 앞으로 나의 연구가 한문학의 토대 구축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기를 바란다.

오보라 고려대 한문학과 강사·퇴계학연구원 연구원
고려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국어국문학과에서 「申絢의 『日錄』 연구: 기록의식을 중심으로」로 석사학위를, 「西陂 柳僖 文學 硏究」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연구원, 연세대 박사후연구원, 한국고전번역원 번역위원 등을 지냈다. 조선후기 한문산문을 당대의 정치적·사회적 배경과 관련지어 고찰하여, 글쓰기 양식과 사회 현상의 영향 관계를 연구하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 「西陂 柳僖物名考의 체계 및 의의 재탐색」, 「조선 후기 送痘神文의 창작 양상」, 「素谷 尹光紹 孤舟錄의 저술 배경 및 자기서사 양상」 등이 있다. 번역서로 『승정원일기』, 『현주집(玄洲集)』, 『산골 농부로 태어난 책벌레 (서파 유희 산문선)』 등이 있다. achwobr@hanmail.net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