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9 19:50 (금)
‘사회주의’ 인프라 중단…북한사회 유지 원동력 ’민중과학‘
‘사회주의’ 인프라 중단…북한사회 유지 원동력 ’민중과학‘
  • 박민주
  • 승인 2022.07.27 08:5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천하제일연구자대회 19 북한의 시장화 이후 주민 일상과 과학기술

<교수신문> 창간 30주년 특별기획 ‘천하제일연구자대회’는 30~40대 인문·사회과학 연구자들의 문제의식과 연구 관심, 그들이 바라보는 한국사회와 학계의 모습에 대해 듣는 자리다. 새로운 시야와 도전적인 문제의식으로 기성의 인문·사회과학 장을 바꾸고 있는 연구자들과 이전에 없던 문제와 소재로써 아예 새 분야를 개척하는 이들을 만난다. 어려운 상황에서 분투하고 있는 젊고 진실한 연구자들을 ‘천하제일’로 여겨도 된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연구자문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민교협 2.0’과 함께한다.(연재를 시작하며: 새 세대 한국 인문사회 연구자를 만난다

 

연구자는 시장화 이후 북한에서 ‘사회주의’ 인프라가 
사실상 가동을 중단하고 주민들에 의해 재구조화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인프라 공급 중단에 대한 북한 주민의 대응은 
생동한 일상생활, 기술사회적 주체성과 제한 조건들, 
정치-사회-기술-문화의 상호연결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쇠약해진 기존의 인프라 대신, 
주민의 지식과 기술은 일상세계와 북한 사회를 구성하는 주요 축으로 작동해왔다. 

북한학은 ‘북한’이라는 총체의 과거, 현재, 미래를 다각도에서 조명하는 간학제적 학문이다. 다만 냉전·반공 속에서 태동하고 분단·대치 상황에서 성장한 탓에 정치·군사, 경제 등의 분과학문과 지도자, 정치체제, 정책, (거시)경제·산업 구조 등에 다소 편중된 측면이 존재한다.

2000년대부터는 일련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이론과 방법론을 적용하여 북한 사회를 보다 세밀하게 살펴보려는 작업이 추진되고 있다. 특히 도시사, 여성사, 일상사 연구는 북한의 ‘보통사람들’과 그 일상생활로 연구 관점을 확대하며 북한에 대한 입체적 이해를 시도해왔다. 

‘북한’은, 2천500만 명(2020년 기준, 통계청) 주민과 그들의 일상, 지식, 수고가 빚어낸 결과물이다. 알프레드 슐츠(Alfred Schulz)의 명언처럼, 일상생활은 지고의 현실(The Paramount Reality)로서, 가장 날 것 그대로의 북한을 보여준다.

보통사람들의 삶은 법제, 정치, 국방, 경제, 산업과 같은 요소들뿐만 아니라 개별 사회구성원의 역량, 욕망, 실천, 지식, 기술 등을 통해서도 지속적으로 구성되고 있다. 또한 보통사람들의 일상에서는 무시할만큼 지극히 사소한 것도 없고 일상보다 앞서는 절대적인 것도 없다.  

북한 평양시의 위성 사진이다. 사진=위키미디어

기존 공급망 결렬에 대처하는, 북한의 호모 파베르들

필자는 북한을 구성하는 다양한 힘 중에서 주민의 일상과 그들의 과학기술에 주목해왔다. 구체적으로는 2000년대 시장화 이후 북한 사회와 주민 일상생활을 과학기술과 사회의 역동, 통치-시장의 혼종 관점에서 설명하는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 물·위생, 에너지, 보건·의료, 교통·이동 등이 연구자의 주요 주제이다.

특히 시장화 이후 ‘사회주의’ 인프라가 사실상 가동을 중단하면서 주민들에 의해 재구조화되는 과정에 주목해왔다. 인프라는 사회·기술 혼종체로서 기술을 매개하여 국가-개인, 개인-개인, 정치-경제-사회-문화-관행 등의 여러 요소들을 연결한다. 따라서 시장화 이후의 인프라는 기술적 측면 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 경제, 일상의 여러 측면에서 기존의 당국주도 방식과는 유사하면서도 다른 형태로 재구성된다.    

일련의 연구는 다음 질문에 대한 호기심에서 출발하였다. ‘배급제와 각종 인프라가 사실상 무너진 1990년대 초중반 이후, 대다수 북한 주민은 어떻게 생계를 유지하고 생존해왔는가?’ 다수의 선행연구는 그 원동력을 ‘각 가구 내 성인 여성의 장사활동과 자구적 조달’에서 찾는다.

그런데 물건이나 서비스가 실재해야 교환도 성립하는 법이다. 교환가치를 지닌 상품이나 서비스 능력이 없는, 넉넉하지 않은 보통의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돈을 벌기 시작했단 말인가? 자본과 연줄이 없다면, 무엇을 해서 장사를 할까? 사실상 끊겨버린 물, 전기 공급을 대체하여 개별 주민은 자기 상황에 따라 어떻게 물을 마시고 밥을 먹으며 전력을 조달할까? 

이러한 고민의 결과, 연구자가 만난 설명항은 ‘호모 파베르(Homo Faber)’이다. 학부에서 공학을 전공했던 영향인지도 모르겠지만, 연구자에게 ‘인간’이란 손으로 무언가를 만들고 도구를 쓰는 존재로 각인되어왔다. 특히 북한이탈주민을 만나 그들의 과거와 현재를 접할 때면 ‘과학기술’을 학교, 실험실, 전문기관, 훈련된 “전문” 과학기술인, 교과서, 실험기구와 같은 ‘공적·공식적’ 레벨에 한정하는 근대적 개념이 얼마나 협소한 것인지 다시금 깨닫게 된다.

예를 들어, 당장 가족의 하루 먹을 식량을 구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여성들은 거래할만한 자원과 연줄이 없으면 물을 길어서 나름의 방법으로 정제하여 판매하거나 비누를 제조하고, 꽈배기를 만들고 밀주(민간에서 제조한 술)를 빚어 팔아왔다. 용이한 기구와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최적의 배합비율, 순서, 가공시간, 재료, 온도 등을 찾아내는 작업은 여느 실험실에서의 실험보다 훨씬 치열한 과정이며 개별 주민의 과학기술적 전문성과 성실성을 배양한다. 

미국 항공우주국이 2000년에 촬영한 한반도의 야경. 북한 대부분의 지역이 어둡게 나타난다. 사진=위키미디어

인프라를 대신하는 북한 주민의 지식과 기술

인프라의 재구조화 과정 또한 생동한 주민의 일상생활을 보여준다. 기존의 당국 주도 인프라는 쇠약해졌으나, 주민의 기술과 지식은 일상세계와 북한 사회를 가동해왔다. 1990년대 초반부터는 하루 중 일정 시간만 급수되고 그조차 식수로는 이용하기 어렵다.

때문에 주민들은 개별 펌프를 설치하거나 단체로 우물을 파서 지하수를 이용한다. 집과 마을마다 개별·공공 변압기를 마련하여 미미하게 공급되는 전력을 조금이라도 높여보려 노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인프라는 거대 기술, 시설, 전문인력, 유관 인프라 등이 연루된 사회-기술적 복합체이기 때문에 개인적 노력보다 기존의 중앙집중적 방식이 훨씬 용이한 측면이 있다. 아무리 주민들이 적극적으로 지식과 기술을 활용하더라도 물질성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돈과 권력이 있는 주민은 공급이 원활한 노드에 비공식적 상수도관·전력선을 몰래 연결한다. 2010년대 이후 경제적 역량이 있다면 패널을 집에 설치하여 태양광 에너지를 이용하기도 한다. 이렇게 연결망의 재편 과정에는 정치·사회적 요인뿐만 아니라 물의 흐름 및 일조량과 같은 자연·지리적 측면, 기계 및 전기, 화학반응 등에 대한 다양한 지식과 기술이 동반된다. 

주민의 실천을 통해 새로운 역량과 사회기술적 관계가 탄생하기도 한다. 불안정하고 낮은 전압 때문에, 형편이 되는 가구는 가구원 한 명이 수시로 전력상태를 예의주시하며 전압변동이 있을 때마다 수동변압기의 눈금을 읽고 손으로 조절기를 세밀하게 조정한다. 이 과정에서 주민은 수동적 개체에서 벗어나 ‘전하-변압기-주민’의 사이보그를 이루고, 그간 당국이 전유해온 변압능력을 일시적으로 향유한다.

도나 해러웨이(Donna J. Haraway)의 “인간-기계”혼종과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의 “행위자-네트워크”는 서구 하이테크 사회뿐 아니라 2000년 이후 북한에도 포착된다. 개인의 경험은 실험실에서 누적된 데이터만큼 풍부하고 구체적이며, 경험과 지식은 널리 공유된다. 때로 수입 기계들은 북한적 방식으로 현지화되고 모방을 통해 새롭게 태어나기도 한다. 

물질·기술적 변화는 사회적 변화와 분리되지 않는다. 언급한 바와 같이 인프라 변화는 통치와 주민의 관계, 주민 간의 관계, 인식, 관행, 관계를 재조직하며 직업, 상품을 새롭게 등장시키고 때로는 탈락, 변주시키기도 한다.

가령 전문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수리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술자가 등장하고 오래된 상품은 시장에서 소멸한다. 주민들은 공동비용을 지불하며 ‘사회주의적’ 도움의 윤리와 무임승차에 대한 ‘불공평’ 논리의 충돌을 겪는다. 당국이 설계해두었던 차등적 공급 기준은 시장화 이후 인프라를 둘러싼 비공식적 거래의 급부(화폐가치)를 결정하는 기준으로 활용된다.

이처럼 민중과학사는 배급제와 인프라 붕괴 이후 북한이 어떻게 가동되고 있는지에 대해 중요한 설명 일부를 제공한다. 연구가 누적되면, 시간을 가로질러 북한 사회를 구성해 온 주요 벡터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북한 주민의 현실에 기초한 연구라는 점에서, 향후 남북협력 등의 정책적 사안에도 유효한 내용을 제공할 수 있다.  

북한과 그 일상세계를 ‘있는 그대로’, 입체적으로 분석하기

어느 분야 연구라도 나름의 어려움이 있겠지만, 북한학은 자료접근성 문제가 심각하다. 직접 방문해 관찰할 수도 없고 북한에서 생산된 문헌 그대로를 믿기도 어렵다. 북한의 모든 공식 출판물은 당국의 검열과 계획에 부합한 것이므로 문자 그대로가 아닌 행간을 읽어내야 한다. 자료의 빈칸을 채워 넣기 위해 많은 경우 북한이탈주민과 인터뷰를 하는데, 모든 인간 존재가 그렇듯 기억은 소멸되고 혼성된다. 연구자의 역량과 경험, 인터뷰이와의 상호작용에 따라 인터뷰의 결과도 크게 다르다. 북한학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못한 IRB(생명윤리심의) 기준, 학계를 배회하는 ‘검열의 유령’, 정치사회적 조건들 역시 연구를 제한하기도 한다. 

그러나 필자는 이런 난관을 감수하면서도 연구자로서 분명한 목표를 달성하고 싶다. 당국이 민생을 방치하는 가운데, 북한 주민이 자신의 조건에 따라 지식과 기술을 어떻게 활용하여 하루를, 사계절을, 일생을 살아가며 사회를 구성해왔는지 상세하게 설명하는 것이다.

이 때, 북한 주민은 초월적 주체도, 정치와 환경의 일방적 피지배 대상도 아니다. 제한은 제한 그대로, 역량은 역량 그대로, 우연은 우연 그대로 기록할 때, ‘북한’이 입체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할 것이다. 오랜 독재체제를 살아낸 북한 주민의 일상이 보다 지속가능한 방향으로 구성되기를, 그리고 이 소박하고 서투른 시도가 그 과정에 기여해주길 바란다.     

박민주 동국대 북한학연구소 연구초빙교수
이화여대에서 북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관심사는 북한, 과학기술, 일상, 젠더, 물질(성)이며 연구주제는 북한 주민의 일상생활과 인프라, 북한의 과학기술과 젠더, 북한 내 비인간-인간 연결망과 주민의 지식·기술 활용 능력 등이다. 주요 논문으로는 「북한 ‘인프라스트럭쳐’ 연구의 확장 가능성과 예시- 포스트 사회주의 인프라 연구 동향과 북한 연구에의 시사점-」(북한학연구, 제18권 1호), 「북한 주민의 열에너지 기술·생활사: 2000년 이후 북한 주민의 비공식적 난방·취사 실천을 중심으로」(통일인문학, 89집), 「북한 주민-전력 연결망의 재구조화와 기술·사회 변화」(북한연구학회보, 제25권 2호), 「북한 주민의 일상생활과 물/위생 시스템의 재구조화-2000년 이후 북한 물/위생 시스템의 혼종적 전환-」(북한학연구, 제17권 1호), 「김정은 시기 “조선옷 전통”의 재구성: 한복 정책을 중심으로」(현대북한연구, 제23권 1호)가 있다. 저서로 『“북조선 여성”, 장마당 뷰티로 잠자던 욕망을 분출하다!(공저, 선인)』가 있다. 이화여대 통일학연구원, 울산여성가족개발원, 숙명여대 등을 거쳐 현재 한국연구재단 학술연구교수지원을 받아 동국대에 북한학연구소 연구초빙교수로 있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