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7 20:25 (토)
여성, 자연, 동물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여성, 자연, 동물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 황주영
  • 승인 2023.09.20 08:4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천하제일연구자대회 52 타자의 철학으로서 페미니즘 철학
황주영 서울시립대 강사

특별기획 ‘천하제일연구자대회’는 30~40대 인문·사회과학 연구자들의 문제의식과 연구 관심, 그들이 바라보는 한국사회와 학계의 모습에 대해 듣는 자리다. 새로운 시야와 도전적인 문제의식으로 기성의 인문·사회과학 장을 바꾸고 있는 연구자들과 이전에 없던 문제와 소재로써 아예 새 분야를 개척하는 이들을 만난다. 어려운 상황에서 분투하고 있는 젊고 진실한 연구자들을 ‘천하제일’로 여겨도 된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연구자문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민교협 2.0’과 함께한다.(‘천하제일연구자대회’ 시즌2를 시작하며_우리 학술장의 ‘소통 공간’ 함께 키워 갑시다)

 

 

페미니즘 철학은 배제되고 억압되고 무가치화된 것의 관점에서 
삶의 방식과 우리와 관계 맺는 삶에 대한 사고를 
근본적으로 재구조화하려는 노력이다. 
우리가 여기에 주목해 이 배제돼 온 주제와 가치를 회복시키려고 한다면, 
인간 사회가 직면한 많은 문제를 해결할 방도를 구할 수 있지 않을까? 

보통 페미니즘 철학은 특수한 영역으로 치부돼 왔다. 생물학적으로 여성인 학자의 영역이라고 여기거나, 보편적인 철학적 주제가 아니라 여성에게만 한정된 주제를 다룬다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페미니즘 철학은 유명한 (남성) 철학자의 주장을 페미니즘 관점에서 비평하고, 그들의 개념이나 주장을 페미니즘 이론에 적용하거나 아니면 여성이나 성차별과 관련된 문제만 다루는 것이라고 치부된다. 

뤼스 이리가레는 『성차의 윤리학』(1984)에서 “성차가 우리 시대의 쟁점이며 그것을 철저히 사유한다면 우리의 구원이 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페미니즘 철학은 그동안 부차적이거나 부분적이라고 취급하던 영역이 실은 가장 중요하고 보편적이라고 생각하는 영역을 떠받치고, 거기서 발생한 문제를 해결할 자원을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만일 철학이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라면, 철학의 타자는 그 보편을 구성하고 확정하기 위해 외부로 던져진, 보편적 진리의 동일성을 의심케 하는 모든 것들이다. 여성적인 것, 성적인 것, 물질적인 것, 감각적인 것, 육체적인 것, 동물적인 것이 그것들이다. 그러므로 페미니즘 철학은 보통 동일성 대신 차이에 주목하고 권력관계를 사유하며 타자와의 관계를 성찰한다. 

따라서 페미니즘 철학은 ‘여성만의’ 철학이 아니다. 페미니즘 철학은 ‘여성’이나 ‘여성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철학의 외부로 혹은 지하로 보내져 철학의 우아함을 보장해주는 비천한 것에 관한 학문이다. 여성 또는 여성적인 것을 비롯해 이 타자를 주목하는 것은 철학의 근본적인 토대와 질문을 재설정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여성이 왜 철학의 타자가 되는가를 물어가다 보면 철학의 가장 근본적인 개념이나 주제에 대해 재고하게 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페미니즘 철학은 여성/여성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타자화된 이들, 유색인종이나 식민화된 사람들, 성소수자, 노동자, 장애인이나 난민, 아동 청소년과 같은 이들에 대한 이론 및 실천과 연결된다.

이리가레(사진)와 앨러이모는 모두 페미니즘이 생물학이나 물질에 더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말한다. 

페미니즘의 쟁점으로서 자연

자연과 인간 외의 동물도 페미니즘과 연결된 타자다. 18~19세기의 자유주의 페미니즘, 제2 물결 시기에 시작된 에코페미니즘, 존재론이나 과학철학, 정치철학 영역에서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자연과 생명에 대한 논의를 전개해왔다.

필자는 박사논문 『페미니즘과 자연: 성차이론과 에코페미니즘의 절합』에서 자연에 관한 페미니즘의 논의를 탐색하고자 했다. 특히 성적 육체를 이해하는 문제와 생태 위기에 대응하는 문제를 함께 다룰 수 있는 통합적 틀을 모색하는 것을 목표로, 이리가레의 성차의 존재론과 에코페미니스트 스테이시 앨러이모의 횡단-육체성 개념의 종합을 시도했다.

이 기획은 성적 육체와 자연을 좀 더 유물론적인 방식으로 이해할 때, 페미니즘이 기후변화로 대표되는 생태위기의 시대에 적절히 대응할 수 있는 대안적 사유이자 삶의 양식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됐다. 

여성과 자연, 인간 외 동물은 그들의 재생산 능력이 그들의 주인을 위한 무상 자원처럼 취급된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특히 자본주의적 가부장제에서 이들은 주인의 생산수단이자 재생산 노동자이다. 이들의 일은 본능이나 사랑에 의한 것이라서, 상품생산이 아니라서, 특별한 재능이나 노력이 필요하지 않아서 셈에서 제외되거나 저평가된다.

하지만 이들이 종과 사회(혹은 이윤)의 지속을 위해 필수적인 이 일을 보상 없이 계속하게 하려면, 이들이 본래 지닌 자율성과 창조성을 제거하거나 통제해야 한다. 가부장제는 여자만 지배하지 않는다. 그것은 여성적 특성을 가졌거나 여성과 동일시되는 모든 것을 지배한다. 

대부분의 페미니스트는 가부장제가 구축한 여성과 자연 사이의 연결을 끊으려고 했다. “여성도 인간이다”라는 말은 더 열등한 자연의 영역에서 남성이 독점한 문화의 영역으로 여성도 포함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가부장제의 지배 논리를 반박하는 과정에서 대개 페미니즘 이론은 육체와 자연, 성차의 중요성을 낮게 평가하는 탈자연화 경향을 점점 더 강화해 왔다. 앨러이모는 페미니즘의 이런 경향을 “자연으로부터의 탈출”이라고 비판하고, 발 플럼우드는 이런 “무비판적 페미니즘”이 가부장제적인 주인 정체성 모델인 이원론적 관점을 답습한다고 평가한다.

왜 우리는 자연에서 도망가면 안 될까? 첫째로, 자연과 육체 또는 동물성에 대한 혐오와 여성혐오는 서로를 강화하기 때문이다. 둘째로 탈자연화 경향에 속하는 페미니즘이 사용하는 섹스, 젠더와 같은 핵심 개념은 육체와 자연에 대한 특정한 철학적 전제에 의존하고 있는데, 우리는 바로 이 전제를 바꾸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전지구적 생태 위기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육체·자연·물질에 주목하는 페미니즘

철학의 언어적 전회는 현대 페미니즘에도 큰 영향을 끼쳐 주류를 형성했지만, 그 흐름 바깥에 이미 육체·물질·자연에 주목하는 여러 페미니스트가 있었다. 성차 페미니즘과 에코페미니즘은 본질주의라는 오해 속에서도 꿋꿋하게 육체와 물질, 자연이라는 존재의 힘과 역량을 강조해왔다. 이리가레와 앨러이모는 모두 페미니즘이 생물학이나 물질에 더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말한다. 자연과 육체를 이해하는 새로운 방식을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만들어 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연과 육체가 단순히 주어져 있는 물질이거나 정신에 의해 인식되고 구성되는 수동적 대상이 아니라 역동적인 행위자이며, 그 행위가 정신과 문화의 형성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인식하는 관점이다.

최근 페미니즘이 주디스 버틀러처럼 육체나 자연이 ‘물질화’되는 방식에 초점을 맞춰왔다면, 성차 페미니즘과 에코페미니즘은 육체로 살아가는 존재자들 사이의 물질적이고 감각적인 관계를 어떻게 ‘담론화’해야 페미니즘 관점에서 생명의 문화를 만들 수 있는지 사유한다. 

두 페미니즘은 모두 여성에 대한 남성의 지배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 사이에 연결고리가 있다고 본다. 이리가레는 플라톤 이래 서양 형이상학이 정신적인 것에서 존재의 기원을 발견하고자 했던 움직임이 모성적-여성적 육체의 생성력을 무력화하고 남성이 생성 권력을 전유함으로써 가능했다고 본다.

에코페미니스트들 역시 지배의 논리로서 이원론이 육체와 정신, 자연과 문화 사이의 단절과 위계화를 조장함으로써 자연의 파괴를 부추기고 정당화하며, 더 육체적이고 자연적이라고 여겨지는 집단을 타자화한다고 비판한다.

또한 이들은 모두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데 육체와 자연, 다른 종이나 물질과의 상호관계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이 관계를 잘 길러내고 유지하는 것이 윤리적 과제라고 본다. 문제는 육체와 자연을 이용해서 차별을 정당화하는 규범적 근거로 해석하는 방식이지, 육체와 자연이 인간 삶에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아니다. 에코페미니즘과 성차 페미니즘은 육체와 자연에 대한 우리의 사고방식과 관계 방식을 전면적으로 바꿔야만 인류가 처한 여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성차 페미니즘과 에코페미니즘

여러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성차 페미니즘과 에코페미니즘은 서로 의견 교환을 많이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페미니즘의 탈자연화 경향을 멈출 필요가 있다는 관점에서 보자면, 두 페미니즘이 발전시켜온 통찰이 모두 필요하다. 남성중심주의와 인간중심주의를 함께 철폐하려면, 공통의 지배구조인 위계적 이원론을 해체해야 한다.

이는 육체와 자연을 수동적 대상이 아니라 정신과 문화의 구성에 개입하는 행위자로 이해한다는 의미이다. 이럴 때 여성의 재생산 노동은 생물학적 과정이자 동시에 사회적 과정인 창조적 활동으로 설명되고, 성적으로 분화된 육체는 인간 존재의 기원이자 실존의 토대로서 재가치화될 수 있다. 

성차 페미니즘과 에코페미니즘은 이원론을 해체하고 육체와 정신, 자연과 문화를 연속성 속에서 이해한다. 특히 이리가레와 앨러이모는 육체와 자연의 역동성과 행위자성을 인정하는 유물론적이고 실재론의 관점에서, 본질주의가 아닌 방식으로 육체와 정신, 자연과 문화, 그리고 종 사이의 상호관계를 역설한다. 앨러이모의 횡단-육체성 개념은 물질·에너지·기호가 종 사이와 몸 사이를 넘나들 때 형성되는 관계가 생명체가 공유하는 근본적인 존재 조건임을 보여준다.

이리가레는 성차가 이 육체적 관계에 다양성과 복잡성을 폭발시키고 새로운 생명체를 산출하는 원리이며 타자와의 관계 맺기를 추동하는 힘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성차 페미니즘은 에코페미니즘에 자연철학적 토대를 제공해주고 생태위기의 문제가 페미니즘의 쟁점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성과 자연의 근본적 관계를 통해 설명해준다. 반대로 에코페미니즘은 이리가레의 존재론에 정치적이고 실천적인 토양을 마련해주어, 성차의 존재론이 성차의 생태정치학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확장한다.

성차의 존재론과 에코페미니즘의 통찰을 결합하면 가부장제하에서 남성 철학자들이 의식적·무의식적으로 논의에서 배제해 왔던 것을 더 잘 다룰 수 있게 된다. 죽음만큼 혹은 죽음보다 태어남과 생명이 인간 존재에게 존재론적으로 더 중요하다는 것, 존재의 기원으로서 탄생이 어머니의 육체와의 관계에서 이루어진다는 것, 인간은 홀로 존재하지 않고 다른 인간, 다른 종과의 복잡한 관계 속에서 돌보고 노동하고 상호의존하며 다양성을 창조하면서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바로 그런 노동과 창조를 주로 여성이 도맡아왔다는 것, 우리가 다른 종과 함께 지구에서 잘 살아가기 위해서 여성이 보존해 온 이 영역의 가치를 모두가 배우고 실행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필자는 페미니즘 철학의 정수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페미니즘 철학은 배제되고 억압되고 무가치화된 것의 관점에서 우리의 삶의 방식과 우리와 관계 맺는 삶에 대한 사고를 근본적으로 재구조화하려는 노력이다. 우리가 여기에 주목해 이 배제돼 온 주제와 가치를 회복시키려고 한다면, 인간 사회가 직면한 많은 문제를 해결할 방도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황주영 서울시립대 강사
성의 문제와 생태위기를 함께 사유하는 에코페미니즘의 철학적 토대를 페미니즘 철학 내부에서 모색하기 위해, 뤼스 이리가레의 성차 철학과 에코페미니즘의 유물론적 주장의 통합을 시도하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시립대와 경희대에서 강의하고,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의 페미니즘학교 팀장을 맡고 있다. 여성환경연대 에코페미니즘 연구센터 ‘달과 나무’에도 연구위원으로 함께 하고 있다. 『뤼스 이리가레』를 썼고 이리가레의 주저 『반사경: 타자인 여성에 대하여』를 공역했다. 『현대 페미니즘의 테제들』, 『교차성 X 페미니즘』, 『고기가 아니라 생명입니다』 등을 함께 출간했다. 논문으로 「상호주체성의 가능성: 이리가레의 수평적 초월과 말의 창조」, 「페미니즘에서 자연의 위치들: 에코페미니즘과 그로츠의 조우 가능성의 탐색」 등이 있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