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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상 높아진 ‘상하이 점령지 문학’, 항전 서사만 있었을까
위상 높아진 ‘상하이 점령지 문학’, 항전 서사만 있었을까
  • 송가배
  • 승인 2022.10.26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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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연구자대회 27 무엇이 중국현대문학인가

<교수신문> 창간 30주년 특별기획 ‘천하제일연구자대회’는 30~40대 인문·사회과학 연구자들의 문제의식과 연구 관심, 그들이 바라보는 한국사회와 학계의 모습에 대해 듣는 자리다. 새로운 시야와 도전적인 문제의식으로 기성의 인문·사회과학 장을 바꾸고 있는 연구자들과 이전에 없던 문제와 소재로써 아예 새 분야를 개척하는 이들을 만난다. 어려운 상황에서 분투하고 있는 젊고 진실한 연구자들을 ‘천하제일’로 여겨도 된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연구자문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민교협 2.0’과 함께한다.(연재를 시작하며: 새 세대 한국 인문사회 연구자를 만난다

 

현재 중국 지식인이 생산한 틀과 개념에서는 해석되지 않는 역사들을 밝혀내면서, 
그러한 망각이나 무시 뒤에 존재하는 곤혹과 고뇌를 이해하고자 한다. 
계속 그 ‘비판’의 사회적 의미와 역할이 무엇인지를 반성함은, 
현재 중국을 비판하는 것이 당연시되는 상황에서 더욱더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1941년 12월 8일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중국 상하이는 전역이 일본군의 점령 아래 놓여 있었다. 이 시기 내륙지역으로 후퇴하지 않고 남아서 문학 활동을 계속했던 문인 중 다수가 중화인민공화국 건설 후 30여 년 동안 한간(漢奸)으로 배척받았다. 

상하이 점령지 문학의 굴곡진 역사

이들의 문학은 1980년대 신시기(新時期)에 이르러서야 중국현대문학의 정당한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문학사 다시 쓰기 운동이 문학 연구의 정치화를 반성하고 철저한 역사화의 방법을 주창하면서 가능해진 일이었다. 현재 상하이 점령지 문학의 높아진 위상은 장아이링(張愛玲)이 루쉰(魯迅)과 대등한 위치에 놓이기도 한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그런데 점령지 문학의 발굴 및 재평가 작업이 상당히 축적되었음에도 여전히 중국현대‘문학’ 범위에서 배제된 것들이 있다. 바로 대일(對日) 협력진영에서 생산한 문학으로, 왕징웨이(汪精衛) 난징정부의 기관지 『중화일보(中華日報)』 문예 부간(副刊), 일본인 배경이 있는 『중문 오사카마이니치(華文大阪每日)』, 『문우(文友)』, 중일문화협회 기관지 『중일문화(中日文化)』 등이다. 이곳에 실린 작품은 중국인에 의해 창작되고 수용되었음에도 대륙 학계에서는 중국현대문학의 일부가 아닌 일본 제국주의의 문화식민 내지 문화침략의 흔적으로 여겨진다.

친일 대중운동기관 ‘흥아건국운동본부’의 대중매체들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당시 상하이의 협력진영에서 일본 외무성과 관계가 깊었던 흥아건국운동(興亞建國運動, 이하 흥건운동) 세력이다. 운동의 주간(主幹)이었던 위안수(袁殊)는 훗날 중국공산당 지하공작자로 밝혀졌으나, 당시에는 이른바 문화한간의 신분으로 중일합작사업을 주관하였다.

그는 운동의 목적이 중국의 자주독립과 발전이며, 따라서 친일 역시 궁극적으로는 항일을 위한 것이라는 독특한 주장을 하였다. 이 때문에 흥건운동본부를 협력진영이 아닌 평화진영이라 불러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흥건운동은 광대한 대중을 획득하기 위한 기관으로서 일군의 대중적 간행물을 운영하였다. 정치적 간행물로 흥건운동 기관지 『흥건(興建)』(1939.10~1940.12), 『신중국보(新中國報)』(1940.11.7~1945.8.16), 『정치월간(政治月刊)』(1941.1~1945.5)은 왕징웨이의 평화운동과 중일합작, 대동아공영권 건설 등을 선전하는 매체 공간으로, 장제스 국민당, 공산당 통치하의 지식인을 포섭하고자 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직접적인 정치 선전과는 거리가 있는 문예지인 『신문원(新文苑)』(1939.11~12), 『문학연구(文學研究)』(1939.10~1940.5), 『잡지(雜誌)』(1942.8~1945.8) 등이 발행되었다. 특히 『잡지』는 대중적으로 가장 큰 성공을 거둔 문예지였다. 시사, 지식란과 함께 각종 형식의 문예란(비평, 소설, 시, 산문, 수필, 서평, 여행기, 보고문학, 인물론, 희곡 등)으로 구성되어, 상이한 교육 수준이나 관심사를 지닌 독자집단의 수요에 폭넓게 부응하였다.

종합문예월간 『잡지』, 정치와 문학의 이분법을 넘어서

종합문예월간 『잡지』는 무엇이 중국현대문학인가라는 문제를 쟁점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잡지』는 당시 한간 잡지로 여겨졌다가 다른 점령지 문학과 함께 1980년대 역사화의 흐름 속에서 중국현대문학의 일부로 복귀하였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이때 『잡지』에서 친일적 내용이 담긴, 이른바 ‘오염된[有染]’ 텍스트는 배제되었다는 사실이다. ‘일본괴뢰[日偽]’, 즉 왕징웨이 정부와 일본을 옹호하는 내용의 국제시사란(전시 현지보고, 여행기, 시평, 국제뉴스 등)은 모두 문학이 아닌 ‘정치적 보호막’으로 여겨졌다. 당시 『잡지』 편집부가 생존을 위해 전략적으로 ‘정치’적인 시사란을 함께 배치했다는 것이다. 물론 ‘반민족적’인 문학을 문학사의 일부에 포함할지는 당사자인 중국인에 의해 합의된 민족윤리에 따라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학술 연구의 관점에서 볼 때 이 같은 취사 선택의 방식은 『잡지』라는 문화 현상, 그리고 그것이 반영하는 점령지 상하이의 현실을 파편적으로 이해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전시하 상하이는 국민당과 공산당, 일본(군과 정부), 왕징웨이 정권, 조계의 영국, 미국 등의 정치세력이 각축하고 있었고, 문단은 유파, 세대, 신문학(新文學)과 통속문학 진영, 개인적 인맥망 등에 따라 나뉘어 있었다.

이른바 ‘오염된’ 텍스트가 포함된 『잡지』는 바로 이처럼 복잡한 상하이 문학장(文學場)의 축소판이었다. 『잡지』에는 대동아공영권 건설에 참여할 것을 설득하는 일본제국, 중일합작을 통해 또 다른 국가의 건설을 기획한 왕징웨이 정권, 각자의 문학 전통을 이어나가면서 전시하 현실을 묘사하였던 작가, 지하에서 대중문화 공작을 수행하면서 잡지 시장에서 생존해야 했던 지하당원과 편집부의 목소리가 뒤섞여 있었다.

조각글로서의 문학작품이 드러내는 역사적 진실

필자는 『잡지』 연구를 통해 지금까지 연구되지 않은 텍스트를 발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신시기 이래의 중국현대문학사 서술과 연구를 재검토하고자 시도하고 있다. 다시 말해 상하이 문학장의 전체상을 파악하기 위해서 문학사가 규정한 것 이전의 문학 현장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지금까지 진행한 작업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신시기 확립된 점령지 문학 정전의 질서가 아닌, 문학과 매체의 관계를 중심으로 『잡지』 소설란을 구조적으로 파악한 것이다. 기존의 점령지 문학연구는 보통 유명 작가의 작품이나 단행본 작품집을 분석 단위로 하면서, 잡지는 보조적인 자료로 이용하였다. 『잡지』의 경우에는 편집부가 중공 지하공작자였다는 사실을 근거로 편집부의 문화 사명과 기획이 강조되기도 하였다.

이와 달리 필자는 『잡지』에 출현한 작가의 문학세계가 매체라는 변수와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 상하이 문학장 전체 속에서 보고자 하였다. 『잡지』 소설란은 탄웨이한(譚惟翰), 장아이링(張愛玲), 쉬간(徐淦)이라는 세 가지 전형으로 정리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전형이 『잡지』에 모인 구조적인 배경에는 일본군 점령 이전부터 존재한 중국현대문학 전통, 전시점령지의 정치 환경, 작가 개인의 특성, 편집부의 지하문화공작, 잡지 시장 논리의 복합적인 작용이 있었다.

다른 하나는 항전서사와 비판적 거리를 두면서 점령지 문학사를 재구성하는 작업이다. 일본군 점령지 문학을 연구할 때 존재하는 어려움은 점령시기 관련 사료가 부족한 것 외에도, 1980년대 점령지 문학가가 복권된 후 자기 검열적인 회고를 한다는 사실이다. 대표적으로 상하이 점령지에서 장아이링과 비견되는 인기작가였던 선지(沈寂)는 회고록에서 자신의 창작 의도, 주제의식을 모두 항일이라고 설명하였다.

또한 그는 자신이 전성기를 보냈던 『잡지』에서의 창작과 활동을 회고록에서 배제하였다. 『잡지』가 중공지하당을 배경으로 하였다 하더라도 당시 대외적으로는 한간 잡지였던 사실에 정치적인 부담감을 느꼈기 때문일까. 작품분석 과정에서 작가의 자기 진술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선지가 활동하였던 문학 잡지 『소설월보(小說月報)』, 『만상(萬象)』, 『잡지』, 『춘추(春秋)』와의 관계 속에서 30여 편의 소설을 분석한 결과, 항일이라는 단일한 주제로는 설명될 수 없는 그의 활동과 창작이 드러났다.

선지는 각 매체 공간의 구체적인 편집 방침에 호응하면서 항일뿐만 아니라 향토성, 오락성 짙은 작품을 다수 발표하였다. 그가 부정하였던 『잡지』에서는 대중화라는 편집 방침에 호응하면서 ‘오사(五四)’ 신문학 전통을 계승하여 수준 높은 1940년대 대중문학을 만들어냈다. 

상하이 점령지 문학의 지평을 넓히기 위하여 

기존의 항전문학사와 혁명사의 틀을 넘어서는 것, 정치와 문학의 이분법을 비판하고 보다 전면적으로 상하이 점령지 문학을 이해하는 것. 이런 주장은 이미 당연한 사실로 들릴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과제가 과연 사례연구의 축적을 통해 충분히 수행되었는지는 의문이다. 

한편 잡지 연구는 중국, 한국의 중문학계에서 낡은 접근법으로 취급된다. 그러나 적어도 상하이 점령지 문학 영역에서는 때 지난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잡지는 점령지 문학에 씌워진 특정한 당파적 이념과 문학관의 틀에서 벗어나 또 다른 역사를 엿볼 수 있는 날것의 텍스트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 가운데 협력진영의 잡지는 월경하는 주체들이 뒤섞이는 공간으로, 현재의 견고해 보이는 중국현대문학, 나아가 중국성을 검토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 근년 간 일본의 중국문학, 상하이사 연구자들이 계속해서 관련 간행물의 자료와 연구를 출판하는 것도 그 중요성을 방증하는 것이다.

필자는 앞으로 범위를 확장하여 당시 협력진영의 중요한 문예 생산 진지였던 『중화일보』 문예 부간, 『중문 오사카마이니치』, 『문우』, 『여성(女聲)』 등을 살펴볼 계획이다.

이상의 점령지 문학연구는 계속 ‘비판적’, ‘대안적’ 역사 연구를 지향한다. 하지만 무엇을 위한 비판인지, 대안적 역사서술이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는 아직 스스로 명확한 그림을 갖고 있지 아니하다. 한 국가의 민족문학사는 단순히 객관적 사실의 집합에 그치지 않고 민족의 미래의 방향성까지 담아낸 것인데, 과연 외국인이 쓴 ‘대안’적 역사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아직 뚜렷한 연구방법론은 없지만, 지금 단계에서 필자가 내린 결론은 계속 중국 내부와 대화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연구하자는 것이다. 점령지라는 아픈 역사에 대해 중국인이 지닌 감정기억을 무시한 채 그저 외부인의 시선에서 ‘객관적’인 연구를 하지 말자는 것이다.

필자는 현재 중국 지식인이 생산한 틀과 개념에서는 해석되지 않는 역사들을 밝혀내면서, 그러한 망각이나 무시 뒤에 존재하는 곤혹과 고뇌를 이해하고자 한다. 계속 그 ‘비판’의 사회적 의미와 역할이 무엇인지를 반성함은, 현재 중국을 비판하는 것이 당연시되는 상황에서 더욱더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송가배 서울대 중어중문학과 강사
중국 화동사범대학 중문과에서 「상하이 윤함구문학과 비밀전선 문화투쟁에 관한 연구―『잡지(雜誌)』를 중심으로(1942-1945)」(2020.6)라는 제목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중일전쟁시기 상하이의 협력진영에서 나온 문학 잡지를 연구하면서, 동남아시아 일본군 점령지의 문학 경험에 관해서도 관심을 두고 있다. 「일본군 점령시기 상해 문예월간 『雜誌』 소설란 연구―張愛玲, 譚惟翰, 徐淦을 사례로」, 「일본군 점령시기 상하이 작가 선지(沈寂) 소설 연구-문학과 매체의 관계를 중심으로」 등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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