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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하는 시민’을 국가는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저항하는 시민’을 국가는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 권혁은
  • 승인 2023.01.05 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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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연구자대회 34 시위 진압을 통해 국가 폭력을 들여다 보다

<교수신문> 창간 30주년 특별기획 ‘천하제일연구자대회’는 30~40대 인문·사회과학 연구자들의 문제의식과 연구 관심, 그들이 바라보는 한국사회와 학계의 모습에 대해 듣는 자리다. 새로운 시야와 도전적인 문제의식으로 기성의 인문·사회과학 장을 바꾸고 있는 연구자들과 이전에 없던 문제와 소재로써 아예 새 분야를 개척하는 이들을 만난다. 어려운 상황에서 분투하고 있는 젊고 진실한 연구자들을 ‘천하제일’로 여겨도 된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연구자문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민교협 2.0’과 함께한다.(연재를 시작하며: 새 세대 한국 인문사회 연구자를 만난다

 

이제 시민은 물대포로 죽는다. 
진압 무기는 변화했을지언정 저항하는 시민은 공격해야 한다는 
국가의 태도에는 변화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얼마 전 화물연대 파업에는 ‘업무개시명령’이라는 무기가 사용되었다. 
4월 혁명과, 부마항쟁과, 5·18항쟁을 현재화한다는 것은 
결국 국가와 저항하는 시민 간의 관계를 끊임없이 고민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얼마 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위원장 임명을 둘러싸고 논란이 일어났다. 신임 위원장이 2020년 발표한 한 글에서 북한군 개입설, 헬기 사격 허위론 등을 언급했기 때문이다. 5·18에 관한 허위사실이 광범위하게 유포되고 무려 과거사정리위원장이 된 이까지 그것에 동조한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곰곰이 들여다보면 거기에 국가와 시민의 관계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이 깔려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국가가 어떻게 시민을 ‘공격’할 수 있느냐는 인식 말이다. 5.18항쟁기의 폭력을 부정하는 주장 저변에는 아이러니하게도 국가가 시민을 적으로 상정하고 자행한 행위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어려운 고뇌가 발견된다.

나는 「박정희 정권기 시위 진압 체계의 형성과 변화」라는 박사논문을 통해 5.18항쟁기 국가의 시민에 대한 공격이 어떻게 가능했는지를 역사적으로 파헤치고자 했다. 내가 주목한 것은 시위 진압에 관철되는 군부통치의 기구적·법적·제도적 배치와 전략적 실천, 그리고 그 실천을 구조화하는 미국헤게모니였다.

1980년대 이후 군부통치의 성격에 대해 군부파시즘, 발전국가, 개발독재국가 등 많은 논의가 있었지만 정작 그 작동방식을 구체적으로 규명한 연구는 많지 않았다. 나는 발전주의 시기 사회적 저항을 억압하기 위한 효율적 기제로 군부통치가 등장했다는 점에서, 시위 진압을 통한 국가 폭력이 군부통치의 작동방식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저항하는 시민의 등장, 그리고 미국헤게모니

물론 한국현대사 초기부터 국가는 국민을 대량 학살하는 등의 폭력을 저질렀다. 5.18항쟁에 대한 진압 역시 그와 유사했다. 그러나 나는 한국전쟁 전후의 학살이 ‘빨갱이’ 내지 ‘비국민’을 대상으로 한 ‘학살’이었다면, 5.18항쟁기의 폭력은 ‘저항하는 시민’을 상대로 한 ‘공격’이었다는 점에서 종류가 달랐다고 보았다. 거기에는 4월 혁명의 유산이 존재했다. 

4월 혁명기 이승만 정권은 시위대에게 발포하여 무려 186명을 사망하게 했다. 그로 인해 이승만 정권이 붕괴했다는 사실은, 이제 국가가 ‘빨갱이’나 ‘비국민’으로 쉽게 치부해 학살할 수 없는 ‘저항하는 시민’을 다루어야 한다는 점을 의미했다. 다른 한편, 해방 이후 한국에 막대한 영향력을 미친 미국에게도 4월 혁명의 의미는 무거웠다.

한국전쟁 이후 미국은 동아시아 냉전 체제의 유지를 위해 남한의 정치적 경제적 안정을 추구했다. 따라서 혹여나 박정희 정권이 시위를 유혈 진압해 또다시 4월 혁명과 같은 사태가 발생한다면 미국으로서는 상당한 골치가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미국은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보유했기 때문에, 군을 동원한 유혈 진압은 곧 미국의 책임이 될 수 있었다.

4월 혁명의 유산과 미국의 영향력은 한국에 ‘발포의 제약’이라는 특수한 조건을 창출했다. 5·16쿠데타 이후 한국의 시위 진압 체계를 구성하는 두 기구, 경찰과 군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경찰은 최루탄의 광범위한 사용을 통해 시위 진압 능력을 점차 발전시켰다.

사진은 한일회담 반대운동기 군 작전통제권 해제 관련해 미 국무부가 주한미대사관에 보낸 문서이다. 국무부는 빨간색으로 표시된 부분에서 군의 시위 진압에 유엔군사령관이 개입하기 때문에 유혈이나 가혹한 진압을 피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사진 제공=국립중앙도서관 해외 한국 관련 자료

그러나 군부통치 하에서 군의 시위 진압 구조는 오히려 확대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수도경비사령부를 창설했고, 계엄 선포 요건을 자의적으로 완화했으며, 한국전쟁 이후 거의 유명무실해진 법령이었던 위수령을 발견해 시위 진압에 활용했다. 1.21사태 이후 특수전 부대가 확대된 것도 중요한 분기점이었다. 군의 시위 진압은 군부통치의 자연스러운 귀결이 아니라 이처럼 장기간 체계적이고 꼼꼼한 노력이 축적된 결과였다.

군은 폭력적으로 시위를 진압했지만, 그럼에도 발포는 억제되었다. 미국은 늘 박정희 정권의 작전통제권 해제 요구를 신속히 승인해주면서도 군이 발포한다면, 정권에 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를 표출했다. 박정희 정권 역시 4월 혁명을 잊지 않았다. 10.26 당시 박정희가 부마항쟁에 발포 명령을 내리겠다고 말하면서 4월 혁명을 언급했다는 사실은 그것을 반증해준다.

따라서 군 동원 구조가 확대되고 군이 시위 진압에 일상적으로 동원되면서도 약 20여 년간 군의 역할은 시위를 발포 외의 수단을 통해 최대한 신속하게 ‘종결’짓는 것이었다. 반면 경찰의 역할은 중앙정보부와 함께 사전에 시위를 예방하고, 학생시위가 발생하면 대량의 최루탄을 사용해 대중시위로 전화하지 않도록 ‘봉쇄’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1960년대 시위 진압 체계는 ‘근대화’되면서 ‘군사화’되었다. 그리고 이 체계는 장기간 꽤 효과적으로 작동했다.

군의 시위 진압, 시위자를 ‘공공의 적’으로

그러나 이 과정은 두 가지 문제를 내재했다. 첫째로, 군의 시위 진압 교리가 애초에 적을 상대로 한 전투 교리에서 출발했다는 문제였다. 한국군의 시위 진압 교리는 미군 교리를 모방해 발전했다. 후자는 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도 시위자들을 ‘공공의 적’으로 상정했으며, 1980년대까지도 발포를 배제하지 않았다.

따라서 교리상 ‘시민’에 의한 ‘시위’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으며 오로지 ‘폭도’에 의한 ‘폭동’이라는 개념만이 존재했다. 이러한 인식은 분단과 전쟁을 거친 한국에서 큰 이질감 없이 받아들여졌다.

다만, 미국에서는 1960년대 사회운동 진압 과정에서 발포가 흔히 일어난 반면 한국에서는 4월 혁명의 유산과 동아시아 냉전으로 그것이 오히려 억제되었다는 차이를 지녔을 뿐이었다. 즉, 군은 언제나 시민을 적으로 상정하고 작전에 임했다.

1968년도 미군의 시위 진압 교범에 실린 시위 진압 작전도. 공중에 헬리콥터를 띄우고, 지붕 위를 사수해 저격병을 배치한 그림이다. 군의 시위 진압 교리가 가진 전투적 성격을 잘 보여준다. 사진 제공=Headquarters, Department of the Army, FM 19-15 Civil Disturbances and Disasters, September 1968, p. 7-15.

둘째로, 한국군에서는 발포가 억제된 나머지 도리어 총검과 진압봉을 결합해 시위대를 구타하는 기술이 개발되었다는 것이다. 군이 신속히 시위를 종결시키려면, 막대한 병력 투입과 함께 발포 외에 시위대들을 공포에 빠뜨릴 방법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한국군은 미군보다 진압봉을 훨씬 광범위하게 사용하며 시민을 공격하는 진압 방식을 발전시켰다. 

유신체제는 특정 관할 구역 없이 언제든 전국에 배치될 수 있는 특수전 부대를 대규모로 확대했다. 그에 따라 국가의 군 동원 능력은 엄청나게 증가했다. 게다가 유신체제는 작은 저항도 용납하지 않았다. 실제로 군이 동원된 적은 한 번뿐이었지만, 대부분의 긴급조치에는 군 동원 조항이 존재했다. 이는 소규모 시위조차 군을 동원해 신속히 종결하려는 의지의 소산이었다. 부마항쟁은 유신체제의 군 동원이 여전히 효과적으로 작동한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만약 군을 동원해도 시위가 바로 종결되지 않는다면? 시민들을 가혹하게 공격함에도 저항이 오히려 항쟁이 된다면? 5·18항쟁기 신군부는 군의 시위 진압 작전이 본질적으로 가졌던 전투적 성격을 극대화했고, 발포의 제약을 해제해 항쟁을 진압했다.

4월 혁명 이후 발포의 제약이 존재하긴 했지만, 군부통치는 ‘저항하는 시민’을 상대로 행사하는 폭력의 강도에 상한을 설정하지 않았다. 결국, 5·18항쟁기의 폭력은 박정희 정권기 만들어진 구조가 전면화된 결과였다.  

시위 진압 체계 재조정…국가의 태도는 여전

요즘 나의 고민은 1980년대로 연구시기를 확장하는 것이다. 1980년 이후 시위 진압 체계는 재조정되었다. 군 대신 전투경찰이 더 적극적으로 동원되었고, 안기부보다 보안사와 대공경찰의 비중이 커졌으며, 최루탄이 국산화되었다.

이는 한편으로는 5·18의 영향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민주화운동 억압에 군의 역할이 중요했던 발전국가의 시대가 끝나고 신자유주의 시대가 도래했기 때문일 것이다. 민주화운동의 급진화·대중화 역시 중요한 요인이었다.

연구시기를 확장할수록 안타까운 점은 1987년 당시 통치 체계 개편이 거의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것이다. 세부적인 조정은 이루어졌지만, 국가기구의 배치나 기능에 중대한 변화는 나타나지 않았다. ‘저항하는 시민’을 대하는 국가의 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1987년이 승리의 서사로 기억되고 기념되면서 오히려 현실의 구체적 저항에 대한 대응이 본질적으로 어떠해야 하는지, 즉 국민국가를 구성하고 민주주의를 창출해내는 ‘저항하는 시민’을 국가가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은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이제 시민은 물대포로 죽는다. 진압 무기는 변화했을지언정 저항하는 시민은 공격해야 한다는 국가의 태도에는 변화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종류는 조금 다르지만, 며칠 전 화물연대 파업에는 ‘업무개시명령’이라는 무기가 사용되었다. 4월 혁명과, 부마항쟁과, 5·18항쟁을 현재화한다는 것은 결국 국가와 저항하는 시민 간의 관계를 끊임없이 고민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언제나 그 지점에서 출발하고 싶다.

권혁은 성공회대 민주자료관 연구교수
서울대 국사학과에서 「박정희 정권기 시위 진압 체계의 형성과 변화」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헤게모니와 한국 현대 국가의 성격 간의 관계에 관심을 두고 공부해왔다. 주요 논문으로 「5·18 항쟁기 시위 진압의 기원 - 충정훈련, 특전사, 그리고 대반란(counterinsurgency) 전략」(『역사문제연구』45, 2021), 「5·16군사정부기 미 대한원조정책의 성격과 AID-유솜의 역할 - 초기 울산공업단지 건설과정을 중심으로」(『역사와 현실』105, 2017) 등이 있고, 저역서로는 『근대화라는 이데올로기』(2021, 공역), 『한뼘 한국사』(2018, 공저), 『해방의 공간, 점령의 시간 : 解放占領』(2018, 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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