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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전쟁에도 서정시는 유난히 목소리를 내고 있다 
오늘의 전쟁에도 서정시는 유난히 목소리를 내고 있다 
  • 이종현
  • 승인 2024.01.22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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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연구자대회 65 현대의 전쟁과 러시아 서정시
이종현 서교인문사회연구실 회원

특별기획 ‘천하제일연구자대회’는 30~40대 인문·사회과학 연구자들의 문제의식과 연구 관심, 그들이 바라보는 한국사회와 학계의 모습에 대해 듣는 자리다. 새로운 시야와 도전적인 문제의식으로 기성의 인문·사회과학 장을 바꾸고 있는 연구자들과 이전에 없던 문제와 소재로써 아예 새 분야를 개척하는 이들을 만난다. 어려운 상황에서 분투하고 있는 젊고 진실한 연구자들을 ‘천하제일’로 여겨도 된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연구자문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민교협 2.0’과 함께한다.(‘천하제일연구자대회’ 시즌2를 시작하며_우리 학술장의 ‘소통 공간’ 함께 키워 갑시다)

 

 

키이우에 공습이 멎을 줄 모르는데, 가자에서도 전쟁이 벌어졌다. 
우크라이나 침공을 규탄하던 유대계 러시아인은 이제 팔레스타인을 저주한다. 
전쟁이 일어나기 몇 달 전에 읊조렸던 아흐마토바의 시는 다음과 같이 끝난다. 
“그러나 누가 우리를 공포로부터 지켜줄 것인가,/ 시간의 흐름이라는 그 공포.”

박사논문을 제출하고 심사를 위해 끔찍한 행정 절차를 밟고 있던 2021년 가을, 코로나바이러스는 기세가 꺾인 지 오래였다. 전염병이 한창일 때도 그랬지만 특히 그 가을에는 60년 전 안나 아흐마토바가 쓴 사행시의 첫 행이 혀끝에 맴돌았다. “전쟁이 무엇이냐, 역병이 무엇이냐? 그것들 끝날 날 얼마 남지 않았으니……”

즐거웠으나 고생스러웠던 유학 생활도 끝이 보이는 듯해 장중한 6음보 약강격의 이 구절이 더욱 마음에 와닿았다. 그렇게 비자 갱신을 위해 한국에 돌아왔다. 겨울철 산해진미를 맛보며 새해를 맞이했고 심사가 있을 4월을 기다렸다.

박사논문을 제출하고 전쟁이 터졌다

2022년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아흐마토바의 시구를 읊으면서도 ‘전쟁’이라는 단어에는 조금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전쟁’이라는 것에 인생이 휘말리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했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러시아는 이미 서구의 온갖 이기를 즐기고 있었기에 굳이 전쟁을 일으킬 이유도 없어 보였다. 젊은이들은 스타벅스에 앉아 맥북을 두드렸고, 친구 야코프는 서방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지 않다더니 프랑스인과 인사를 나누게 되자 넉살 좋게 말했다. “아임 제이콥.”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할지 모른다는 얘기가 서방에서 간간이 나왔지만, 가짜뉴스로만 여겼다.

러시아는 정말 전쟁을 일으켰다. 그때만큼 내 전공을 저주한 적이 있을까? 있긴 하다. 따뜻한 방콕에 갔을 때, 나는 왜 얼음구덩이 나라의 문학을 선택했을까 하고 통탄했다. 또, 영하 30도의 한파가 모스크바를 덮쳐 가스레인지를 켜고 부엌에서 생활할 때도 그랬다. 

그런데 이번에는 저주하는 까닭의 성격이 달랐다. 현실적인 이유 하나와 나이브한 윤리적 이유가 하나 있었다. 첫째, 나는 3월에 무사히 모스크바로 돌아가 심사를 치를 수 있을까? 친미 국가에서 온 나를 러시아 땅으로 들여보내 주기는 할까?

둘째, ‘특수군사작전’을 일으키는 나라의 문학을 공부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다른 잘 사는 나라들도 전쟁 일으키기로 둘째가라면 서럽지만, 유난히 러시아가 원망스러웠다.

첫 번째 저주는 헛된 것으로 밝혀졌다. 두바이를 거쳐 모스크바로 돌아가 별일 없이 심사를 통과했기 때문이다. 어떤 선생님들은 페이스북에 반전 메시지를 올리고, 또 어떤 선생님들은 조국 찬가를 목청껏 외치던 것과는 별개로 말이다.

온갖 과일 절임을 주시던 선량한 집주인 할머니께서는 갓 태어난 다섯 번째 손녀의 사진과 함께 푸틴 대통령의 고뇌를 담은 영상을 보내셨고, 현상학을 전공하는 친구는 자기네 러시아인은 평생 세계에 사죄해야 한다고 한탄했다.

이런 일들과 아무 상관 없다는 듯 나는 심사를 마친 뒤 수십 가지 서류를 교육부에 착실히 제출하고는 모스크바의 추억이 깃든 소소한 물건을 챙겨 무사히 귀국했다.

한동안 러시아에서는 ‘전쟁 반대(Нет войне)’라는 말만 해도 체포되는 바람에 사람들은 ‘Нет в****’라는 구호를 사용했다. 생략된 말이 전쟁(война)을 뜻하는 것 아니냐고 경찰이 추궁하면, ‘잉어(вобла)’라고 답하자는 밈이 유행했다. 그리고 톨스토이의 소설 『전쟁과 평화』를 ‘잉어와 평화’라고 부르는 밈도 생겨났다. 사진=브콘탁테 '보르시' 계정, 2022년 10월 17일 게시글

러시아 시를 공부해 박사가 됐지만

5년 반을 돌이켜 보면 ‘우크라이나’와 관련된 것은 거의 없었다. 기억을 헤집어보니 어느 수업에서 우크라이나 출신 조부모를 둔 학생이 레샤 우크라인카라는 민족시인의 시를 서툰 우크라이나어로 낭송했던 것 정도가 떠올랐다. 

그러자 두 번째 저주, 즉 ‘러시아 문학을 공부하는 것이 다 무슨 의미인가’라는 저주를 조금이나마 상쇄할 방법이 떠올랐다. 우크라이나어를 배워서 우크라이나 시를 읽자는 것이었다. 서둘러 문법책을 한 권 떼고 한 단어 한 단어 사전을 찾으며 시를 번역했다. 왠지 마음이 편해졌다. 러시아 시를 공부해서 박사가 됐지만 우크라이나 시도 읽는다는 나름의 정당성을 갖추게 된 듯했다. 우크라이나의 시인 오스타프 슬리빈스키가 전쟁 발발 직후에 시작한 프로젝트 ‘전쟁사전’을 발견하고는 어서 우리말로 옮겨 책으로 내야겠다며 어깨에 힘을 주기도 했다.

그러던 중 할리나 크루크라는 시인의 다음 구절을 옮기게 되었다. “당신은 ‘no war’가 적힌 피켓을 들고 서 있다, 돌이킬 수/ 없는 일에 면죄부라도 된다는 듯 [...] 당신이 시위 현장에서/ 집으로 돌아가다가 쓰레기통에 내버린 ‘no war’ 피켓의/ 고르지 않은 굴곡을 따라 세계가 ‘전쟁 전’과/ ‘전쟁 후’로 나뉜 곳, 러시아의 시인이여// 전쟁은 무심한 이들의 손으로 죽인다,/ 하릴없이 동정하는 이들의 손으로도 죽인다.

우리나라에 잘 알려지지 않은 우크라이나 시를 옮기며 연대의 마음을 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돌이켜보면 나는 이 일을 ‘면죄부’를 얻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한 것이었다. 덤으로 ‘업적’까지 챙기자는 꿈까지 야무지게 꾸다니 나는 “무심한 이들”보다 더 모질었다. 죽어가는 사람들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볼 뿐 “시로 죽이지 못해 분하다”라고 말하는 크루크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전쟁과 서정시에 얽혀 있는 이야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지켜보며 러시아의 시를 공부한다는 것에 대한 자책은 이상한 방식으로 꼬이기만 했고 조금도 해결되지 않았다. 전쟁을 일으킨 나라의 시를 공부하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전쟁을 당한 나라의 시를 공부하는 것으로써 얻겠다니. 애초에 문제설정 자체가 잘못된 것 아닐까. 그렇다고 앞으로 우크라이나 시를 읽지 않을 것도 아니었다. 러시아 시를 공부하지 않겠다는 것은 더욱 말이 되지 않았다.

그렇게 전쟁은 한 해를 넘겼다. 졸업을 못 하는 것 아닐까 하는 걱정은 추억이 되었고, ‘호전적인’ 나라의 문학을 공부한다는 자괴감도 얄팍해졌다. 그러다가 대학에서 ‘러시아문학특강’이라는 수업을 맡게 되었다. 강사가 주제를 정해서 한 학기 동안 관련 내용을 다루는 것이었다. 현대의 전쟁과 관련된 러시아의 문화 텍스트를 읽기로 했다.

그리고 전쟁과 서정시에 얽혀 있는 이야기를 알게 되었다. 두 가지만 꼽아보자. 1900년대 남장을 즐기던 시인 지나이다 기피우스는 제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자 『우리는 전사들에게 어떤 편지를 썼으며 그들은 우리에게 무엇이라 답했는가』라는 시집을 펴냈다. 그녀는 전선의 군인에게 보내는 시 형식의 편지를 직접 썼으면서도 자기네 하녀들(다리야, 악슈샤)이 작가라고, 자신은 이 책의 편찬자라고 내세웠다.

우아한 외모와 세기말적인 시로 이름을 날린 이 모더니스트는 어째서 이런 애국적 기획을 꾸며냈을까? 글도 간신히 알았을 악슈샤는 어째서 그토록 소박한 편지에 세련된 각운을 입혀야 했을까? “쉬고 계시나요, 전투가 한창인가요? / 여러분의 훌륭한 일에 관한 / 소식을 어서 보내 주셔요.

애국 이데올로기와 현대 러시아 서정시

오늘날의 전쟁에도 서정시가 유난히 뚜렷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사실은 퍽 흥미롭다. 2022년에는 우크라이나 침공에 반대하는 러시아 시인들이 ‘최근의 시’라는 제목의 선집을 발표했다. 대응 사격이라도 하듯 2023년, ‘러시아의 여름의 시’라는 선집이 출간되었다. 여기서 ‘러시아의 여름’은 ‘러시아의 봄’이라 불리는 시위들, 즉 2014년 우크라이나 남동부 도시에서 일어난 일련의 친러시아적 시위를 계승해 승리로 일궈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게다가 러시아어로 시를 뜻하는 ‘포에지야’는 러시아군의 상징인 ‘Z’를 품고 있어서(ПоэZия) 제목이 곧 애국주의적 구호가 된다. 심지어 정부의 민원플랫폼인 ‘고스우슬루기’는 이 시집을 소개하며 인터넷에서 무료로 내려받을 수 있게 하기도 했다.

노골적인 적의를 드러내는 시가 대부분이지만 러시아의 영원한 무기인 자원을 우주론적으로 성찰하는 것도 있다. “이 삶에서/ 우리는 모두 피난민들/ 보라: 지구는/ 임신한 여인의/ 배와 같고/ 그 밑에는 석유가 있다.”(블라트 말렌코)

또, 한때 컴퓨터와의 체스 대결로 유명했던 가리 카스파로프가 전쟁을 반대하는 러시아인에게 발급하자고 제안한 ‘좋은 러시아인을 위한 여권’에 반대하며 이렇게 외치기도 한다. “좋은 러시아인을 위한 여권 따위는 없어 [...] 시대가 사나우니까 우리도 나빠지기로 했어, [...] 러시아에 영광 있으라!”(알렉산드르 펠레빈)

이렇게 애국 이데올로기는 현대 러시아에서도 서정시라는 장르를 통해 굴절되고, 서정시는 어느새 행정적 장치와 결합해 작동한다.

시는 어떻게 국가의 장치로 기능하는가

사회비판적 발언으로 유명한 역사 교사 타마라 에이델만은 유튜브에서 이렇게 말했다. “러시아 문화가 본래 군국주의적이라며 배척하려고들 한다. 그러나 러시아 문화의 근본은 휴머니즘이다.” 그의 말을 곱씹다 보면 2년 전의 내 모습이 떠오른다. 나는 러시아 문화가 군국주의적이라며 책망했고 윤리적 변명을 구하며 우크라이나 시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전쟁광이라며 단죄하거나 휴머니즘의 산실이라며 옹호하는 두 가지 말고는 러시아 문화를 바라볼 길이 없는 걸까? 러시아 문화를 거부하는 쪽과 마찬가지로 ‘러시아식 휴머니즘’을 외치는 쪽도 서둘러 면죄부를 사려는 것 아닐까? 휴머니즘을 상찬하다 보면 러시아 문화에서 드러난 폭력의 계기를 외면하게 될지도 모르니 말이다. 그 계기가 어떻게 시와 문화의 옷을 입는지, 그리고 시는 어떻게 국가의 장치로서 기능하는지 살펴보아야 하지 않을까?

키이우에 공습이 멎을 줄 모르는데, 가자에서도 전쟁이 벌어졌다. 우크라이나 침공을 규탄하던 유대계 러시아인은 이제 팔레스타인을 저주한다. 전쟁이 일어나기 몇 달 전에 읊조렸던 아흐마토바의 시는 다음과 같이 끝난다. “그러나 누가 우리를 공포로부터 지켜줄 것인가,/ 시간의 흐름이라는 그 공포.” 시간이 흐르는 것은 두렵지 않다. 계속되는 전쟁 속에서 시간이 멈춘 것 같아 두렵다. 부디 시간이 흘러 전쟁이 끝나기를. 우리를 공포로부터 지켜주기를.

이종현 서교인문사회연구실 회원
모스크바에서 20세기 러시아 서정시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교인문사회연구실 회원으로 활동하며 웹진 <인-무브>(en-movement.net)에 러시아 현대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된 글을 올린 바 있다. 서울대와 경북대 노어노문학과에서 강사로 일하고 있기도 하다. 러시아 서정시와 현대의 정치적·사회적 맥락이 어떻게 얽혀 있는지 관심을 두고 있다. 그런가 하면 서정시의 전통적 형식에도 매혹을 느껴 음보, 운율, 각운 따위에 집착하기도 한다. 역서로는 LGBT 세계시선집 『우리가 키스하게 놔둬요』(공역, 큐큐, 2017), 마리나 츠베타예바 시선집 『끝의 시』(ㅤㅇㅣㄷ다, 2020), 미하일 쿠즈민의 소설 『날개』(큐큐, 2021), 이반 투르게네프의 소설 『사냥꾼의 수기』(근간)가 있다. jhlee31277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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