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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컬 오디세이] '맨발의 겐' 둘러싼 표현의 자유, 창작자들 뿔났다
[글로컬 오디세이] '맨발의 겐' 둘러싼 표현의 자유, 창작자들 뿔났다
  • 김효진
  • 승인 2023.06.02 10: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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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컬 오디세이_김효진 서울대 일본연구소 교수
「맨발의 겐」은 히로시마를 덮쳤던 원폭의 비극과 그를 전후한 전전 일본과 전후 일본의 상황, 나아가 전쟁의 비극을 가장 극적으로 증언하는 작품이다. 사진=북워커 웹사이트
「맨발의 겐」은 히로시마를 덮쳤던 원폭의 비극과 그를 전후한 전전 일본과 전후 일본의 상황, 나아가 전쟁의 비극을 가장 극적으로 증언하는 작품이다. 사진=북워커 웹사이트

2023년 2월말, 히로시마 교육위원회는 지금까지 사용해 오던 평화교육 프로그램 교재에서 나카자와 게이지의 만화 「맨발의 겐」의 교재사용을 중지하고 다른 피폭경험자의 수기로 변경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은 일본 국내 뿐만이 아니라 한국에서도 주목을 받았는데, 그 이유는 「맨발의 겐」이 갖는 상징성 때문이다.

작가인 나카자와 게이지 본인이 주인공이 작가 본인임을 명시하고 있으며, 히로시마 원폭 투하시 본인을 포함한 가족 전원이 피폭을 당했던 피해자이자 당사자로서 히로시마를 덮쳤던 원폭의 비극과 그를 전후한 전전 일본과 전후 일본의 상황, 나아가 전쟁의 비극을 가장 극적으로 증언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히로시마시 교육위원회의 결정 이전에도 「맨발의 겐」은 일본사회에서 지속적으로 문제시돼온 작품이었다. 1970년대에 일본의 가장 대표적인 만화잡지인 <주간쇼넨점프>에서 연재가 시작된 이후 그 내용의 파격성과 전쟁체험의 묘사에 대한 논쟁으로 인해 이후 여러 매체를 전전한 결과, 연재가 마무리된 것은 1980년대 후반이었다.

그리고 가까운 사례로는 2013년 시마네현 마쓰에시 교육위원회, 2014년 오사카부 이즈미사노시 교육위원회에서 각각 이 책에 잔혹한 장면이 대량 포함돼 있다는 이유, 그리고 현대의 기준에서는 인권적으로 문제가 있는 차별적 표현이 사용됐다는 이유로 각각 초등학생에 대해 열람제한 조치가 취해지기도 했다. 

이중에서 전자의 경우, 전후 일본사회를 관통하는 과거사 문제, 즉 일본제국주의와 아시아태평양전쟁이라는 과거를 둘러싼 지속적인 논쟁과 직접적으로 연결돼 있는 반면, 후자의 경우는 그 양상이 조금 다르다.

특히 후자의 경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맨발의 겐」의 열람을 둘러싼 쟁점이 작품에서 사용된 표현에 대한 문제 제기이고 그 근거로서 제시된 것이 아동과 청소년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논리라는 점이다.

즉 과거에는 「맨발의 겐」을 둘러싼 논의는 좌파와 우파라는 정치적 입장의 차이, 그리고 과거사 문제에 대한 입장의 차이로 부각됐다면 2010년대 이후 「맨발의 겐」에 대한 논의의 초점이 점차 작품의 의미나 가치, 세계관의 문제에서 벗어나 표현의 문제로 이동하고 있다.

2020년 도쿄올림픽 개최가 확정된 이후 일본사회는 '다양성(diversity)'을 강조하는 흐름이 두드러졌다. 이와 관련해서 가장 확실한 변화는 지방자치체 차원의 동성 파트너쉽제도 도입, 그리고 통칭 「헤이트스피치 규제법」의 제정 및 시행이다.

일견 이는 일본사회의 진보적인 흐름으로 보인다. 차별적이고 폭력적인 표현 대신 바람직하고 부드러운 표현을 쓰자는 것은 반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창작의 영역, 특히 과거 역사를 다룬 창작물의 영역에 오면 문제가 달라진다. 앞에서도 살펴본 바와 같이 2010년대 이후, 「맨발의 겐」과 같은 비판적인 시각에 입각해 과거사를 그려낸 작품을 아동과 청소년이 열람하는 것을 막는 합법적인 이유로서 등장한 것이 바로 잔혹한 장면, 그리고 차별적 표현 사용이었기 때문이다.

당사자로서 작가가 자신의 경험과 지식에 바탕해 과거의 참상과 죄악을 재현한 작품에 대해서 현재의 기준으로 이를 평가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 것인가? 그리고 흔히 이런 상황에서 대안으로 제시되는 '일부 표현을 수정'한다는 식의 해결방안은 과연 어떤 것을 놓치고 있는가? 이런 문제는 결코 일본사회만의 문제가 아니다. 

실제로 일본에서는 작가들이 먼저 나서서 이런 상황을 비판적으로 다루는 창작물을 내놓고 있다. 2천년대 큰 인기를 끈 라이트노벨 「도서관전쟁」 시리즈에서는 표현의 검열이 극도로 진행돼 문제표현이 있는 책이 무조건적으로 압수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자 그에 대항하기 위해 도서관이 스스로 도서관군대를 조직해 검열에 대항하는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

최근에는 일본에서 최초로 여성으로 펜클럽회장에 취임한 기리노 나쓰오가 신작 「일몰의 저편」에서  가상의 미래에서 문제적인 표현을 강제로 수정하도록 지시받는 작가의 고통을 묘사한 바 있다.

현실의 잔혹함과 차별은 그대로인 상황에서 표현만을 바꾸고자 하는 욕망은 가장 보수적이고 반동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맨발의 겐」을 둘러싼 논쟁이 증명하고 있다. 
 

 

김효진 서울대 일본연구소 교수

서울대 인류학과에서 학·석사를, 하버드대 인류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고려대 글로벌일본연구원 HK조교수를 거쳤다. 오타쿠문화를 중심으로 한 현대 일본사회의 대중문화 및 젠더 정치학, 한일문화 교류와 인터넷 커뮤니케이션 등을 주로 연구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BL진화론: 보이즈러브가 사회를 움직인다』(역서, 2018), 『원본없는 판타지: 페미니스트 시각으로 읽는 한국 현대문화사』(공저, 2020), 『퀴어돌로지 전복과 교란, 욕망의 놀이』(공저, 2021)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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