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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협(文俠) 김삿갓이 알려주는 정신적 방랑의 가치
문협(文俠) 김삿갓이 알려주는 정신적 방랑의 가치
  • 김병희
  • 승인 2024.01.29 08: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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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광고로 보는 시대의 표정34 고려원의 『소설 김삿갓』

강원도 영월군에는 ‘김삿갓면’과 ‘김삿갓로’가 있다. 면의 이름과 도로명을 사람 이름을 따서 지은 연유는 관광객 유치를 위한 전략만은 아닌 듯하다. 중국에 이백(李白)이 있고 일본에 바쇼(芭蕉)가 있다면, 우리나라에는 영월에서 성장한 방랑시인 김삿갓이 있었으니, 영월군으로서는 자랑할만한 역사적 인물로 내세우고 싶었으리라.

김삿갓(김병연 金炳淵, 1807~1863)은 실존 인물이면서도 기행의 천재이자 천하의 바람둥이로 풍류를 즐기며 살다간 전설적 인물이다. 요즘 젊은이의 언어로 ‘힙(hip)한’ 오빠나 인플루언서에 가까운 그의 인생은 1964년부터 30여 년 동안 한국방송 제1라디오의 전파를 탔던 <김삿갓 북한방랑기>를 비롯해 이문열의 소설 『시인(詩人)』이나 정비석의 『소설 김삿갓』의 주제가 되었다. 

고려원의 『소설 김삿갓』 광고(한겨레, 1989. 1. 1.)

김삿갓의 일생을 총체적으로 그려낸 정비석의 소설은 정말 재미있었다. 『소설 김삿갓』을 발행한 고려원의 광고 ‘여인’ 편(1989)에서는 출판계의 관행대로 책 제목을 헤드라인으로 썼다(한겨레, 1989. 1. 1.). 제목 앞에 ‘풍류 소설’이라며 장르를 소개하고, “물은 흘러도 앞을 다투지 않고 구름은 있어도 서로 뒤지려 한다!”를 비롯해, “살아있는 것은 한 조각 구름이 일어남이요, 죽는다는 것은 한 조각 구름이 스러짐이다!” 같은 2개의 서브 헤드라인을 덧붙였다.

보디카피의 내용은 이렇다. “꽉 막힌 인습, 도가 통하지 않는 신분제도, 부와 명예에 대한 인간들의 탐욕스런 집착, 이 모든 잡사(雜事)를 훌훌 떨치고 방랑하는 김삿갓. 그의 드높은 예술정신과 선적(禪的)인 삶의 태도가 여기 있다! 작가 정비석이 호방한 필체로 그려낸 화제의 풍류소설 <소설 김삿갓>!”

시리즈 5권의 출간 사실과 6권의 출간 예정을 기념하는 광고에서는 전6권 모두가 국판 크기에 각 권 330쪽 내외이며 책값이 권당 3,500원이라는 사실을 알렸다. 아낙의 소쿠리를 잡아끌며 여인을 유혹하는 김삿갓의 표정을 그린 삽화도 흥미롭다.

작가 정비석(1911~1991)의 말년을 대표하는 소설에서는 김병연(김삿갓)이 조선팔도를 유람하며 백성들의 고된 삶을 증언하는 장면을 작가가 뒤따르는 형식을 취했다. 김병연이 영월의 과거 시험에서 장원급제한 장면부터 시작해 그의 집안 내력을 밝혀내는 방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김병연의 증조부는 홍경래(1771~1812)의 난 때 선천부사(宣川府使)이던 김익순(金益淳)인데, 그는 과거 시험의 시제(試題)에 따라 민란에 투항하고 격문까지 써 준 김익순에 대한 비판 글을 써 장원급제했다. 뒤늦게 증조부의 내력을 알게 된 김병연은 괴로워하다 관직을 유지하기 어렵다고 판단해 집을 떠난다. 김병연은 이후 현실을 풍자하는 시를 지으며 조선팔도를 방랑하고 유람한다. 각 권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소설 김삿갓』 초판 표지의 책등(고려원, 1988, 1993)

제1권 「산중문답(山中問答)」에서는 작가가 강원도 영월에 있는 김삿갓의 묘를 찾아가는 장면에서 시작해, 김병연의 출생과 집안 내력은 물론 산속에서 살며 인생과 예술에 대해 고민하는 순간을 서술했다.

제2권 「별유천지(別有天地)」에서는 김삿갓이 금강산에 머물다가 강원도 북부를 거쳐 함경도를 찾아가는 과정은 물론 술을 마시고 시를 짓고 사람들과 교유하는 이야기를 그려냈다.

제3권 「관북천리(關北千里)」의 전반부에서는 김삿갓이 함경도의 안변부사(安邊府使)와 친분을 쌓고 기생의 딸 가련이를 만나 3년간 동거하는 이야기를 그렸고, 후반부에서는 김삿갓이 영월의 집으로 다시 돌아와서 신분제도의 문제점과 인간의 탐욕에 대해 비판하는 내용을 보여주었다.

제4권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는 방랑의 끼를 주체하지 못한 김삿갓이 다시 영월의 집을 떠나 한양과 개성 일대를 유람하고 방랑 생활과 예술 탐구를 계속하는 내용을 소개했다.

제5권 「산고수장(山高水長)」에서는 김삿갓이 한양과 경기도를 떠나 서북의 평안도를 유람하는 이야기를 소개하며, 평양의 아름다운 풍경을 경험하고 쓴 시를 비롯해 산과 물과 인간의 욕망에 얽힌 이야기를 그려냈다.

제6권 「금수강산(錦繡江山)」에서는 김삿갓이 서산대사(西山大師)의 유적을 찾아가는 이야기를 비롯해 충청남도, 전라북도, 경상남도를 거쳐 전라남도 화순의 적벽에서 죽어가는 장면을 그려냈다. 

소설에서는 작가의 호방한 필체로 김삿갓의 인생 유전과 예술 세계를 촘촘히 그려냈다. 『소설 김삿갓』에서 보여준 세태 풍자는 독자들에게 인간의 욕망과 본성 문제를 깊이 생각해 보도록 암시했다. 백 년도 못 살면서 영생할 것처럼 세속의 부귀영화에 집착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에서는 모든 것이 뜬구름처럼 부질없으니 인생의 멋을 알고 정신적 방랑을 누리며 자유롭게 살아가라는 시대의 표정을 제시했다. 조선 후기의 아이돌이었던 그는 조선의 산천과 예술을 품고 평생토록 방랑자로 살았다. 

“죽장(竹杖)에 삿갓 쓰고 방랑 삼천리/ 흰 구름 뜬 고개 넘어가는 객이 누구냐/ 열두 대문 문간방에 걸식을 하며/ 술 한 잔에 시 한 수로 떠나가는 김삿갓.”(1955년 김문응 작사 ‘방랑시인 김삿갓’) 노래 가사처럼 그는 굽이굽이 발길 닿는 대로 때로는 감격하고 때로는 분노하며 붓 가는 대로 시를 썼다.

일찍이 사마천이 구별했듯이 칼로 세상을 구하는 협객이 무협(武俠)이라면, 글로 세상을 구하는 협객은 문협(文俠)이다. 강호를 떠돌며 시를 쓰고 산천을 주유하던 김삿갓은 모름지기 글을 품은 문협(文俠)으로 살았다. 영월군의 김삿갓문학관에 가서 문협이 알려주는 정신적 방랑의 가치를 되새겨보는 것도 좋겠다. 

김병희 서원대 광고홍보학과 교수·편집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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