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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의표를 찌르는 카피라이터
세상의 의표를 찌르는 카피라이터
  • 김병희
  • 승인 2023.12.08 10: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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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광고로 보는 시대의 표정32 고려원의 『카피라이터 입문』

지금은 카피라이터가 친숙하지만 1980년대만 해도 카피라이터는 낯선 신종 직업이었다. 1976년 7월 3일에 서울카피라이터즈클럽(SCC)이 결성됐을 정도로 여러 카파라이터가 활동하고 있었지만 일반에게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다.

카피라이터 이만재 선생은 신종 직업을 알리기 위해 기회 있을 때마다 노력했다. 언론 기고나 방송 출연의 조건으로 그는 자기 이름 뒤에 괄호 열고 ‘카피라이터’를 반드시 표기해달라고 요구했다. 기자나 PD들이 카피라이터라는 말을 왜 넣느냐고 반대하면 그는 출연하지 않겠다며 고집을 부렸다. 그런 노력 덕분에 카피라이터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퍼져 나갔다고 한다.

고려원의 『카피라이터 입문』 광고(한겨레, 1991. 1. 11.)

그런 이만재 선생이 『실전카피론1』(1987)과 『실전카피론2』(1989)를 펴낸 다음, 세 번째 출간한 책이 카피라이터 입문서였다. 고려원의 『카피라이터 입문』(1990) 광고에서는 “한 줄의 광고문안, 기업의 운명을 좌우한다!”라는 오버헤드를 쓰고, 그 아래에 책 제목을 헤드라인으로 배치했다(한겨레, 1991. 1. 11.).

지면 양쪽으로는 연필을 휴대용 소총처럼 들고 급히 움직이는 카피라이터의 모습을 그려 넣었다. 안경 쓴 모습이 예리하게 느껴진다. 급하게 움직이는 장면과 함께 카피라이터의 일상을 압축해서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카피라이터가 급하게 뛰어가는 삽화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보디카피를 배치했다. 

“광고, 시고 달고 맵고 찬 자본주의의 꽃./ 그 꽃술의 생명력을 추구하는 카피라이터! 광고현장 최일선에서 신들린 카피라이터 이만재가 횃불처럼 밝혀 든 국내 초유의 본격 실무이론 및 입문지침서, <카피라이터 입문>!/ 혹자는 고소득을, 혹자는 창조적 재능 발휘를 목적으로 이 직업을 택한다.

카피라이터 세계에는 전공학과 제한이 없다. 성차별도 없다./ 그러나 이 책의 갈피마다에 선연하게 기록된 일행(一行)의 빵, 일행(一行)의 꿈, 일행(一行)의 투쟁기록을 먼저 섭렵한 다음, 진로를 정해도 늦지 않다.”

이 보디카피는 책의 뒤표지에 있는 내용 안내문에서 일부분을 가져와 수정한 것이다. 신국판 294쪽의 책값은 3,800원이었다.

책의 내용을 간략히 살펴보자. 제1장 ‘실무 기초이론’에서는 카피라이터의 취업, 카피라이터가 되는 사람의 조건, 광고의 사회적 역할, 광고의 마케팅적 목적, 매체별 카피 표현 특성, 카피를 구성하는 10가지 요소, 헤드라인의 기능, 카피의 길이, 카피라이팅의 유의 사항을 설명했다.

제2장 ‘실무 현업론’에서는 카피 인력의 수급과 관리, 신입 카피라이터의 자세, 응용문학가로서의 카피라이터, 카피라이터의 위상과 책임, 우수 카피 감상, 미래 사회에서의 광고정신 등을 소개했다.

제3장 ‘실무 현장론’에서는 광고와 복고주의, 광고 표현 자유의 폭, 마케팅과 사업종목의 다각화, 광고업 독립, 서울카피라이터즈클럽의 족적(足跡), 광고의 문화적 역할에 대해 서술하고 마지막에 자전적 이야기인 ‘6·25가 만든 나, 카피라이터 이만재’를 소개했다. 

이 책은 카피라이터가 인기 직업으로 급격히 부상하던 시기에 카피라이터 지망생이나 초보 카피라이터의 교과서 역할을 했다. 자신이 카피라이터가 될 수 있는지 또는 없는지, 스스로의 재능과 의지를 가늠하며 진로를 결정하는 데 이 만큼 실용적인 책이 없었기 때문이다. 광고주도 카피의 특성을 이해하려고 이 책을 두루 읽었다. 광고 책 치고는 드물게 출간 2개월 만에 4쇄를 찍었다는 사실이 구체적 증거다.

『카피라이터 입문』 초판 표지(고려원, 1990) 

따라서 이 책은 카피라이터가 복사하는 사람이 아니라 광고 문안을 쓰는 전문가라는 인식을 심어주고 광고 전문직의 정착에 영향을 미쳤으며, 광고가 자본주의의 꽃이라는 시대의 표정을 제시했다.

“손이 가요 손이가~ 새우깡에 손이가~ 아이 손 어른 손~ 자꾸만 손이가~ 언제든지 새우깡 농심 새우깡.” 1984년에 처음 방송된 이후 지금도 나오고 있는 새우깡의 광고 CM송을 모르는 사람은 없으리라.

“살코기 캔”(동원참치), “사나이 대장부가 울긴 외 울어”(농심 신라면), “일요일은 짜빠게티 요리사”(농심 짜빠게티), “인심 좋은 안성댁”(농심 안성탕면), “맨 마지막에 선택되는 옷”(논노), “국내에서 가장 못난 신문, 세계 언론사상 가장 놀라운 신문!”(한겨레신문 창간) 모두 이만재 선생이 쓴 카피다.

1981년부터 2006년까지 프리랜서 카피라이터로서 ‘카피파워’를 운영하는 동안 그는 소비자 심리를 철저히 파고드는 카피를 쓰려고 노력했다. 

세상의 의표를 찌르는 글쓰기의 협객이었던 그는 세상의 의표를 찌르려면 시야각(視野角)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시야각을 벗어나 뒤통수를 치는 뭔가가 있어야 비로소 창의적 카피라는 뜻이다. 시야각을 벗어난 대상이란 보는 사람 입장에서 보면 한눈팔게 하는 그 무엇이리라.

보는 이의 한눈을 팔게 하는 광고. 그는 시야각을 벗어나기 위해 의표를 찌르더라도 기발함이 지나치면 경박해질 수 있으니 사람의 이야기로 풀어내는 카피 쓰기를 권고했다. 

나는 카파라이터에 입문한 다음에 『카피라이터 입문』을 처음 읽었다. 카피가 잘 안 써질 때마다, 카피를 거절한 광고주가 미울 때마다 눈물과 기쁨의 경험이 스며있는 이 책을 펼쳤다. 그때마다 광고인의 인생에 대해 자주 생각했다. 인생, 또는 광고인의 인생이란 무엇일까.

인생이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물리적 시간을 모두 합산하는 개념이 아니다. 살아가는 동안 한눈을 팔 만큼 뭔가에 빠져버린 번쩍이는 황홀한 순간의 기억 몇 다발 정도일 터. 인생 또는 광고인의 인생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김병희 서원대 광고홍보학과 교수·편집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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