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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사회와 그 적들은 누구인가?
열린사회와 그 적들은 누구인가?
  • 김병희
  • 승인 2023.11.23 08: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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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광고로 보는 시대의 표정31 민음사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

1980년대 이후에 대학에 들어간 사람치고 칼 포퍼의 반증가능성(falsifiability) 이론에 신세지지 않은 사람은 없으리라. 반증가능성이란 어떤 명제나 진술이 과학적이냐 아니냐는 명제를 반증(反證)할 수 있는지 없는지에 달려 있다는 이론이다. 책을 끝까지 읽지 않았더라도 제목에 ‘열린사회’란 말이 있으니 당시의 군부독재가 자연스럽게 ‘닫힌사회’로 연상되는 것은 당연했다.

젊을 때 마르크스를 모르면 뜨거운 가슴이 없는 사람이고, 늙어서도 마르크스에 빠진다면 차가운 머리가 없는 사람이라는 말도 있지만, 마르크스를 비판한 포퍼의 주장은 대학생이 된 나에게는 크나큰 충격이었다.

오스트리아 철학자 칼 포퍼(1902~1994)가 쓴 『열린사회와 그 적(敵)들』(1945)은 전체주의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짚어내 비판함으로써 한국 지식인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이 책에서는 전체주의 체제의 이념적 허구성과 비도덕성을 비판하며, 자유주의 이념을 바탕으로 열린사회로 나아가라고 천명했다.

민음사의 『열린사회와 그 적들』 광고(조선일보, 1982. 4. 29.)

플라톤·헤겔·마르크스·프로이트의 저작에 뿌리내린 전체주의의 유산을 파헤친 민음사의 『열린사회와 그 적들』 광고에서는 “전공학자에 의해 쉽고 정확하게 완역된 현대 사회철학의 고전!”이라는 오버헤드를 쓰고, 그 왼쪽에 책 제목을 헤드라인으로 썼다(조선일보, 1982. 4. 29.). 이한구 교수의 번역으로 ‘플라톤과 유토피아’라는 부제를 단 1권은 310면에 2,500원이었고, 이명현 교수의 번역으로 ‘헤겔과 마르크스’라는 부제를 단 2권은 394면에 3,500원이었다. 모두 크라운판으로 출간했다. 

보디카피는 새로 쓰지 않고 칼 포퍼의 서문을 가져와 그대로 활용했다. “몇몇 사람들은 마르크스를 너무 심하게 다루었다고 나를 비난했고, 또 어떤 이들은 플라톤에 대한 나의 격렬한 공격과 대비시켜 마르크스에 대한 나의 관용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개인적이고 도덕적인 근거에서 너무나 자주 공격 받아왔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오히려 그의 이론이 갖는 놀랄만한 도덕적·지적 호소력에 대한 공감적 이해와 함께 그의 이론에 대한 냉엄한 합리적 비판이 필요하다. 옳든 그르든, 나는 나의 비판이 철저하다고 생각했고, 그러므로 마르크스의 참된 공헌을 알아낼 수 있고, 그의 동기에 대해 제기되었던 의심들을 풀어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포퍼는 이 책에서 과학과 비과학은 물론 이성과 비이성을 나누는 기준으로 반증가능성을 제시하며, 반증을 허용하지 않거나 반증이 불가능한 사회는 ‘닫힌사회’라고 주장했다. 나치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뉴질랜드로 피신한 그는 1938년 3월에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침공하자, 플라톤의 『국가론』에 내재한 전체주의적 속성을 비판하기 위해 집필을 시작했다고 한다.

열린사회란 전체주의에 대응하는 개인주의 사회이며, 사회 전체의 급진 개혁보다 점진적 개혁을 시도하는 사회이다. 그는 열린사회를 인간이 인간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사회로 간주하며, 열린사회에 대한 최대의 적은 역사주의(전체론, 역사 법칙론, 유토피아)라고 규정했다.

『열린사회와 그 적들』 초판 표지(민음사, 1982)

그가 말한 반증가능성을 이렇게 설명할 수 있겠다. “채식주의자가 육식주의자보다 오래 산다”는 명제가 있다고 하자. 이 명제는 경험의 일반화일 뿐 과학이 아니다. 이 명제를 과학적 법칙으로 증명하려고 채식주의자와 육식주의자를 모두 비교하는 방식은 헛수고가 될 것이다. 채식주의자가 더 오래 사는 비율이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신뢰 수준에서 높다 하더라도, 모든 채식주의자가 육식주의자보다 더 오래 산다고 예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단은 과학적으로 위험한 추론이다. 정책 결정이나 정치 행위에서는 더더욱 조심해야 한다. 차라리 채식주의자보다 오래 사는 육식주의자를 찾아낸다면 “채식주의자가 육식주의자보다 오래 산다고 할 수 없다”는 진정한 진리에 더 쉽게 도달할 수 있다. 즉, 반증 작업이 어떤 명제나 진술을 과학으로 증명할 수 있는 더 빠르고 정확한 방식이 된다. 결국 과학을 과학으로 만드는 것은 검증이 아니라, 모순되는 관찰을 제시할 수 있는 반증가능성이 열려 있느냐 닫혀 있느냐의 여부에 달려있다는 것이 포퍼의 주장이다.

포퍼가 말한 열린사회가 이성의 자유로운 활동이 허용되고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민주사회라면, 닫힌사회는 전체주의적 특권사회다. 포퍼의 주장은 이렇다. 소크라테스는 열린사회의 이념을 사상적으로 구현한 대표적 인물인데,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열린사회를 폐쇄하고 닫힌사회를 옹호했다는 것. 헤겔과 마르크스도 열린사회의 이상을 근대에 실현하려 한 프랑스 혁명의 이념을 봉쇄했다는 것. 그러니까 그들은 열린사회의 적들이라는 것. 전체주의에 경도된 이론들이 반증을 허용하지 않는 지적 오만으로 무장한 채 자유로운 진리 탐구의 길을 막아버렸다는 것.

따라서 이 책은 소수의 지배자가 전체주의로 무장하고 다수의 국민에게는 복종만 강요했던 군부독재의 폐쇄성을 타파하고 열린사회로 나아가라고 잠든 정신을 일깨우는 시대의 표정을 제시했다.

요절한 소설가 김소진(1963~1997)은 첫 창작집의 제목을 『열린사회와 그 적들』(1993)로 지었다. 그는 고통으로 얼룩진 민중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삶에 대한 부박한 언어로 열린사회를 생생히 묘사했다. 칼 포퍼의 『열린사회와 그 적들』을 다시 뒤적이며, 대학 동창이자 첫 직장의 동료였던 친구 김소진을 생각한다. 인류사에 다시는 나타나지 말거라, 닫힌사회여. 

김병희 서원대 광고홍보학과 교수·편집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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