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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은 대중의 밀실, 밀실은 개인의 광장
광장은 대중의 밀실, 밀실은 개인의 광장
  • 김병희
  • 승인 2022.07.07 08: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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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광고로 보는 시대의 표정② 최인훈의 『광장』

“바다는 크레파스보다 진한 푸르고 육중한 비늘을 무겁게 뒤채이면서 숨 쉬고 있었다.” 그 소설의 첫 줄은 이렇게 시작된다. 최인훈(1936~2018) 작가의 소설 『광장』은 지식인 문학을 대표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한자투 일색이던 1961년 무렵에 이처럼 감각적인 모국어 문장을 썼다는 사실은 실로 놀랍다. 4·19 혁명이 일어난 1960년의 10월에 <새벽>지에 소설이 발표되자, 분단의 비극을 정면으로 다룬 첫 소설이란 평가를 얻으며 문단에 엄청난 화제를 뿌렸다. 워낙 유명한 소설이라 그 줄거리를 소개할 필요는 없겠다.

다만 1961년에 정향사에서 소설이 첫 출간된 이후 1973년의 민음사 판을 거쳐 1976년의 문학과지성사 판이 나오기까지, 작가는 계속 가필과 수정해 최종본을 완성했다는 사실은 언급하고 싶다. 그래서 1973년 민음사 판의 첫 줄도 이렇게 수정됐다. “바다는, 크레파스보다 진한, 푸르고 육중한 비늘을 무겁게 뒤채면서, 숨을 쉰다.” 작가의 거듭된 개정으로 이처럼 멋있는 우리말 문장이 완성됐다. 문학평론가 권성우 교수는 ‘최인훈 작가 영전에 띄우는 편지’에서 “한국 소설도 이토록 매력적이며 지성적일 수 있구나”하고 생각했다며 『광장』의 문학사적 가치를 평가했다. 

민음사의 광고 『광장』 (동아일보, 1973. 10. 17.)  

민음사 판 『광장』의 출간을 알린 첫 광고의 헤드라인은 이러했다(동아일보, 1973. 10. 17.). “동아일보, 중앙일보, 주간한국이 조사한 베스트셀러 제1위!” 언론의 평가를 카피로 인용해 책의 내용을 보증하는 스타일이었다. 이어지는 보디카피를 보자. “이데올로기의 심연을 증언하여 동시대의 영혼의 좌절을 기록한 전후문학의 고전! 저자에 의해 10년 만에 가필교정(加筆校訂)된 결정판!” 광고에서는 작가의 연작소설인 『총독의 소리』와 『주석의 소리』도 소개했다. 그런데 1973년 8월 20일에 민음사에서 발행한 초판의 서지에는 책값이 900원인데, 광고에는 800원으로 표기돼 있다. 표지 제목의 한자도 ‘광장(廣場)’인데, 광고에서는 일본식 한자인 광장(広場)이었다. 광고 내용에 오류가 두 가지나 있는데, 출판사 광고 담당자의 어이없는 실수가 아닐까 싶다.

'광장' 정향사 1961 초판본 표지

광고에서 작가의 다른 소설을 소개한 것은 한반도 문제를 탐구한 유사한 작품이기 때문이었을 터. 『총독의 소리』에서는 일본 총독이 한반도의 재식민화를 획책하고 영구 분단을 고착화하기 위한 치밀한 전략을 제시했고, 『주석의 소리』에서는 상해 임시정부 주석이 한국의 민주주의와 민족주의를 건강하게 발전시키기 위한 방안을 설파했다. 작가는 적의 입을 빌려 내부를 깨우치는 ‘빙적이아(憑敵利我)’의 방법으로 역사적 타자의 입을 빙자해서 우리 내부의 문제를 환기했다.

소설에서는 8·15 해방과 6·25 전쟁을 거친 한반도의 비참한 현실에서 고뇌하는 주인공 이명준의 존재론적 고독감을 묘사했다. 그는 러시아의 볼셰비키 당사(黨史)와 성경의 사도행전 사이에서 갈등하고 괴로워하는 포로 신분이었다. 이념 문제로 갈등하면서도 남도 아니고 북도 아닌 제3의 길인 중립국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자살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주인공의 운명은 한국인의 초상이었다. 작가는 회색인의 운명을 통해 1960년대의 떠도는 군상들을 조명했는데, 관념적 세계로 흐르는가 싶으면 산뜻한 감성의 세계를 열어주었고, 감성의 세계로 흐르는가 싶으면 남북의 이념과 체제에 대한 지식인의 냉철한 성찰을 보여주었다. 

소설에서는 개인과 사회와 국가 간의 긴장과 갈등을 선연하게 보여주면서도 인간의 자유와 사랑이라는 본질적인 주제를 소환했다. 정향사에서 펴낸 초판 말미의 ‘작가의 말’(1961. 2. 5.)을 보자. “광장(廣場)은 대중의 밀실(密室)이며, 밀실은 개인의 광장이다. 인간은 이 두 가지 공간의 어느 한쪽에 가두어 버릴 때, 그는 살 수 없다. 그럴 때 광장에 폭동의 피가 흐르고 밀실에서 광란의 부르짖음이 새어 나온다.” 실존적 개인의 밀실과 굶주린 대중의 사회적 광장 사이에서 우리는 늘 갈등하며 그에 따라 존재의 이유가 달라진다는 뜻이었다. 이런 주장은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정치적 선택을 해야 할 때도 정확히 들어맞는 혜안이다.

『광장』에서는 8·15 해방의 기대가 남과 북으로 처참하게 갈리고 6·25 전쟁으로 민족의 일체감이 박살난 상황에서, 1960년대 한국의 지성계에 이데올로기에 대한 저항 정신이 중요하다는 시대의 표정을 제시했다. 더욱이 한 개인이 어떻게 밀실을 버리고 광장으로 나왔는지, 그리고 광장에서 패한 그가 어떻게 다시 밀실로 되돌아갔는지 보여주는 고뇌와 환멸의 기록이었다. 결국 이 소설은 분단국가에서 살면서 이념 문제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했던 우리들에게 광장으로 나아갈 것인지 밀실로 숨어들 것인지 진지하게 성찰하도록 했다.

김병희 서원대 광고홍보학과 교수·편집기획위원

서울대를 졸업하고 한양대 광고홍보학과에서 광고학 박사를 했다. 한국광고학회 제24대 회장과 한국PR학회 제15대 회장을 지냈다. 주요 저서와 논문으로 『디지털 시대의 광고 마케팅 기상도』(학지사, 2021),「광고의 새로운 정의와 범위: 혼합연구방법의 적용」(2013) 등이 있다. 한국갤럽학술상 대상(2011), 제1회 제일기획학술상 저술 부문 대상(2012), 교육부·한국연구재단의 우수 연구자 50인(2017) 등을 수상했고, 정부의 정책 소통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대통령 표창(2019)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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