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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일제 강점기에 살았더라면 어땠을까?
우리가 일제 강점기에 살았더라면 어땠을까?
  • 김병희
  • 승인 2023.08.25 09: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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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광고로 보는 시대의 표정27 유주현의 『조선총독부』

“위대한 역사소설은 사서(史書)를 뛰어넘는다.” 역사소설을 흥미롭게 읽은 독자는 이 말에 동의할 것이다. 사실을 그대로 전달하는 역사책보다 팩션(Fact+Fiction)이 인기를 끄는 이유도 이야기를 흥미롭게 전개하는 작가의 상상력 때문이다. 사실의 미화나 역사 왜곡 문제는 그 다음에 따져야 할 문제다. 아마도 우리나라 ‘팩션’ 장르는 소설가 유주현(1921~1982) 선생의 대하소설 『조선총독부』에서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소설의 배경은 대한제국 시절인 1900년부터 해방을 맞이한 1945년까지 50년 동안의 격동기이며, 무대는 한반도는 물론 일본·만주·중국·동남아까지 망라했다. 소설에서는 2천여 명을 등장시켜 일제강점기에 일본 통감부와 총독부에서 한반도를 어떻게 수탈했는지 생생하게 묘사했다.

고종황제, 김구, 안중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윤봉길, 이광수, 최남선, 여운형, 이완용, 송병준, 김성수, 송진우, 현상윤 등 근현대사 인물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담았다. 연인 사이인 주인공 청춘남녀 박충권(朴忠權)과 윤정덕(尹貞悳)만 가공인물이고 나머지는 실존 인물이었다.

신태양사의 『조선총독부』 광고(조선일보, 1974. 4. 12.)

신태양사의 『조선총독부』 광고를 보자(조선일보, 1974. 4. 12.). 헤드라인은 “실록대하소설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이다. 여느 책 광고와 마찬가지로 제목을 헤드라인으로 썼다. “우리 어찌 잊으랴, 피와 눈물로 점철(點綴)된 이 처절한 민족의 수난(受難) 애화(哀話)를!”이라는 격정적 표현을 오버 헤드라인으로 써서 책의 가치를 설명했다. 저자의 사진을 크게 제시하고 그 밑에 각 권의 제목을 나열했다.

제1권 『일식(日蝕)의 형해(形骸)』, 제2권 『하오(下午)의 투계(鬪鷄)』, 제3권 『백록(白鹿)의 각혈(咯血)』, 제4권 『신(神)에의 저격(狙擊)』, 제5권 『빙원(氷原)의 경마(競馬)』 같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저자는 5권의 제목을 다섯 음절로 똑 같이 맞추려고 노력했다. 일제 강점기를 대상으로 하면서도 흥미롭게도 동물과 자연 현상에 비유해 제목을 정했다.

광고 지면 오른쪽에는 “수난과 형극(荊棘)의 반세기를 압축시킨 대표적인 민족의 서사시!”라며 소설을 규정했다. “스케일의 크기가 세계적 대작이라는 중평(衆評)”이며 “세월은 50년”에 “무대는 전동남아(全東南亞)”이고, 등장인물 2천여 명의 대작이라고 했다. “정확한 사실(史實)과 능숙한 픽션이 혼연일치(渾然一致)해서 대하(大河)처럼 줄기찬 비극의 로망이며 눈물과 피와 정의와 배신과 투쟁과 슬기와 애욕(愛慾)과 휴머니즘의 파노라마”라며 흥미를 유발했다.

“영원히 자자손손(子子孫孫) 읽혀야 할 국민독본(國民讀本)으로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군사, 민속이 이 작품의 골격(骨格)”이라고도 강조했다. 당대 저명인사의 추천사도 소개했다. “마성(魔性)을 가진 소설”(김팔봉), “일찌기 못 본 야심작”(박종화), “민족의 정신적 유산”(백철), “젊은 세대의 생명천(生命泉)”(이병도), “전국민 필독의 양서”(이선근), “무서운 작품이다”(함석헌) 같은 추천의 글도 흥미롭다.

맨 하단에는 “나라 빼앗기고 50년간의 현대사가 생생하게 재생된 우리 문학의 개가(凱歌)!”라는 카피로 소설의 가치를 다시 강조했다. 4×6판(B6) 크기에 세로쓰기였으며, 각권 400여 쪽에 책값은 5권 1질에 7천 원이었다.

유주현의 『조선총독부』 5권 표지(신태양사, 1967) 출처=삼성출판박물관

실존 인물의 실명을 그대로 등장시켰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조선총독부를 중심으로 벌이는 인간 군상의 다큐멘터리 같다. 소설을 읽다 보면 일제 강점기에 한국인들이 겪은 신산(辛酸)한 삶, 독립 투사의 투쟁 정신, 사람들의 카멜레온 같은 변절 행태, 조선총독부의 횡포가 엊그제 일처럼 생생하게 다가온다. 이 소설은 1964년의 한일외교 정상화 시도에 대응하려는 성격을 지닌다.

대한제국 멸망의 전야로부터 일본 패망의 순간까지 한반도의 잔혹한 역사를 보여준 이 소설은 공백 상태이던 일제 강점기 의 방대한 자료를 집대성하고 복원했다. 그리하여 친일 문제를 단죄가 아닌 논리의 맥락에서 접근한 이 소설에서는 역사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칠 때마다 인간은 저마다 어떤 사정이 있을 수 있겠지만 항상 거시적 안목에서 올바른 선택을 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시대의 표정을 제시했다.

좋은 역사소설은 흥미·감동·역사라는 3요소를 갖춰야 한다고 알려져 있는데, 『조선총독부』는 세 요소를 충분히 갖췄다. 소설에서 역사서에는 볼 수 없는 인간 내면을 깊이 있게 묘사한 점은 특별한 매력이었다. 나 역시 일제 강점기의 친일 행위는 단호히 반대하지만, 소설을 다시 뒤적이며 일제 강점기에 어떤 이유에서건 친일 행적을 남긴 사람들을 처단의 대상으로 삼고 부관참시(剖棺斬屍)라도 해야 할 듯 목청을 돋우는 분들이 떠올랐다. 

그분들이 만약 지금이 아닌 일제 강점기에 살았더라면 어땠을까? 끝까지 창씨개명을 안 하고 조선총독부의 정책에 어떤 협조도 하지 않고 끝까지 지조(志操)를 지키며 살았을 것인지, 궁금해졌다. 소설을 읽다 보면 민족주의자들이 전향했을 때 오히려 더 극단적인 친일 행위를 하는 사례가 너무 많이 등장하기 때문이었다. 그대의 인생이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면서 남의 인생을 함부로 단정 짓고 심판하지 말라, 이는 소설을 읽으며 배운 또 다른 지혜였다. 

김병희 서원대 광고홍보학과 교수·편집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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