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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한 음식은 버리면 되지만 상한 말은 돌이킬 수 없다
상한 음식은 버리면 되지만 상한 말은 돌이킬 수 없다
  • 김병희
  • 승인 2023.10.18 08: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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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광고로 보는 시대의 표정29 이오덕의 『일하는 아이들』

반성문이 영어로 뭐지? 글로벌! 영어가 난무해 글로 벌을 받고 있는 글로벌(global) 시대에 글을 잘 쓰기가 쉽지 않다. 중국어, 일본어, 영어 순서로 바깥 말이 우리 안으로 들어왔을 텐데, 여러 말이 뒤엉키니 정신 줄을 놓으면 우리말이 뿌리째 흔들릴 것 같다. 요즘 젊은이가 쓰는 말이나 글은 언어의 잡탕밥 같다.

교사 출신의 아동문학가 이오덕(1925~2003) 선생이 새삼 그리워지는 시절이다. 나는 그의 책을 읽으며 우리 말맛을 살려 글 쓰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배웠다. 그가 엮은 『일하는 아이들』(1977)은 잃어버리기 직전의 우리말을 되돌려주며 어른을 동심의 세계로 이끌었다.

청년사의 『일하는 아이들』 광고(경향신문, 1978. 5. 1.)

청년사의 『일하는 아이들』 광고를 보면 지금은 거의 쓰지 않는 200자 원고지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경향신문, 1978. 5. 1.). “어린이 여러분, 이런 글을 써본 적이 있읍니까?” 질문형 헤드라인으로 관심을 유도한 다음, 원고지 칸칸에 다음과 같은 동시를 채워 넣었다. “봄아, 봄아, 오너라./ 나는 봄이 오면/ 따듯한 곳으로 지게 지고/ 나무하러 간다./ 나무를 가득지고/ 집에 갖다 놓고/ 또 나무하러 간다./ 봄이 오면 나는 날마다 나무하고/ 보리밭도 맨다.” 

지면 오른쪽의 보디카피에서는 어느 농촌 어린이가 쓴 시라고 설명하며, 봄을 기다리는 간절한 마음과 농촌 친구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느껴지는지 독자에게 묻고 있다. “자기의 느낌과 생각을 이처럼 솔직하게 쓰기만 하면 좋은 글이 된다”고 하면서 글쓰기가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또한, “정직한 글이 얼마나 훌륭한가”를 이 책을 읽어보면 알 수 있다고 하며, 277편의 글을 엮고, 그림 46편을 실은 동시집의 가치를 차분히 설명했다. 원고지 아래쪽에는 “여러분이 쓴 시를 보내주세요.”라고 권유하며 후속편에 대한 기대감도 높였는데, 4·6판에 294쪽의 책값은 1천 원이었다. 

광고의 오른쪽 지면에는 저자의 또 다른 대표작인 『이 아이들을 어찌할 것인가』(1977)라는 책의 광고도 함께 실었다. “모든 학부모님께 드리는 말씀”이라는 헤드라인이 특별히 주목을 끈다. 광고의 왼쪽 상단에 있는 ‘어린이날 축 어버이날’이란 표시에서 알 수 있듯이, 두 책을 가정의 달 기념일에 맞춰 동시에 광고한 것이다. 요즘 학부모가 만약 두 책의 일부분이라도 읽어봤더라면 자기 자식만 귀하게 여기는 이기심을 억눌렀을 것 같다. 그리고 사소한 일에도 교권을 침해하는 이런저런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 같다.

이오덕이 엮은
『일하는 아이들』 표지 (청년사, 1977)

이 책은 이오덕 선생이 1952년부터 1977년까지 160여 명의 아이들이 쓴 272편의 동시를 모아 펴낸 동시집이다. 초등학교 교사로 봉직한 그는 어린이가 쓰는 말과 글 자체가 뛰어난 문학 작품이라고 판단해, 어린이의 동시를 모아 책으로 엮어냈다. 『일하는 아이들』의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시골 어린이가 주변의 사물과 사람을 보고 느낀 감정을 꾸밈없이 써 내려간 동심의 세계가 오롯이 담겨있다. 농촌 아이들의 솔직한 마음을 표현한 동시는 ‘생활시’ 장르에 가까웠다.

예를 들어, 책에 수록된 동시 몇 개를 보자. “오줌이 누고 싶어서/ 변소에 갔더니/ 해바라기가/ 내 자지를 볼라고 한다./ 나는 안 비에(‘보여’의 경상도 사투리) 줬다.”(이재흠 작 ‘내 자지’, 1969) “해바라기가 참 착하다./ 벌들이 붙어도 가만히 서 있네.”(이성윤 작 ‘해바라기’, 1968) “봄이 오면 거지들은/ 춤을 출 게다.”(박근옥 작 ‘봄’, 1963) “연필이 일을 하다가/ 따뜻한 엄마 품에/ 가만히 누워 있다.”(김순규 작 ‘필통’, 1976). 이 동시들을 읽다 보면 때 묻지 않은 어린이가 쓸 수 있는 우리말의 아름다움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책 제목을 ‘농촌 어린이들이 본 세상’이라 지었어도 될 텐데, 왜 일하는 아이들을 강조했을까 생각해본다. 요즘 아이들은 일하지 않는다. 아이들도 일을 할 때 서정(抒情)을 느낀다. 요즘 아이들에게 일하기를 강요할 수는 없겠지만, 모든 것을 부모가 대신 해주면 안 된다. 일을 해봐야 아이들도 스스로 커가기 때문이다.

이 책에 수록된 동시에서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 아이들의 꾸밈없는 마음이 녹아있는 동시에서 어른들은 착한 마음씨를 배울 수 있다. 농촌 아이들이 소박하고도 진솔한 우리말로 쓴 시는 동심을 잃어버린 채 하루하루 바쁘게 살아가는 어른들에게, 그리고 외래어를 자주 쓰는 많이 배운 사람들에게,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며 아름다운 우리말을 잃어버리지 말라는 시대의 표정을 제시했다.

자신의 저서에서 선생은 이렇게 주장했다. “밖에서 들어온 잡스런 말을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으니, 첫째는 중국 글자말이요, 둘째는 일본말이요, 셋째는 서양말이다. 이 세 가지 바깥 말이 들어온 역사도 중국 글자말-일본말-서양말의 차례가 되어 있는데, 중국 글자말은 가장 오랫동안 우리말에 스며든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일본말은 중국 글자 말과 서양말을 함께 끌어들였고 지금도 끊임없이 끌어들이고 있다는 점에서 그 깊은 뿌리와 뒤엉킴을 잘 살펴야 한다. 정말 이제 우리가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넋이 빠진 겨레가 될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겠다.”(『우리글 바로쓰기』 한길사. 1993. 17쪽.)

지식인과 학생들이 책상머리에 앉아서 말을 만들어내면 겨레말을 어지럽힌다는 그의 주장은 글로벌 시대에 귀담아 들어야 한다. 2002년에 『일하는 아이들』의 개정판을 내면서도 그는 개정판이라 하지 않고 ‘고침판’이라고 표기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관념어의 나열이 글쓰기를 얼마나 망가뜨리는지 생생히 느꼈다.

노견(路肩)이란 일본말을 ‘갓길’로 바꿨듯이, 앞으로 행정용어를 비롯한 여러 분야의 단어를 아름다운 우리말로 바꾸려고 노력해야 할 것 같다. 음식이 상하면 버리면 되지만, 말이 변질되면 영원히 돌이킬 수 없으니까. 

김병희 서원대 광고홍보학과 교수·편집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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