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8 20:30 (목)
상상력의 르네상스를 열어가라 
상상력의 르네상스를 열어가라 
  • 김병희
  • 승인 2023.04.06 08:5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책 광고로 보는 시대의 표정20 민음사의 『세계시인선』

 

민음사의 ‘세계시인선’ 광고 (동아일보, 1974. 6. 8.) 

까까머리 고교생 시절에 『수학의 정석』이나 『성문종합영어』는 의무적으로 사야 하는 책이었다면, ‘세계시인선’으로 나온 시집들은 좋아서 사서 읽는 책이었다. 누군가는 『수학의 정석』을 두 번 떼고, 『성문종합영어』를 세 번 떼고, 『영어의 왕도』로 넘어갔다고 자랑했지만, 나는 그런 참고서를 끝까지 제대로 뗀 적이 없었다.

그 시절의 나는 내용을 얼마나 알아야 ‘뗐다’고 말할 수 있는지를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웠다. 참고서 대신에 ‘세계시인선’으로 나온 시집들은 좋아서 여러 번 읽었으니, 굳이 뗐다고 말해야 한다면 나는 그 시집들을 ‘뗐다’고 할 수 있겠다.

민음사의 ‘세계시인선’ 광고를 보자(동아일보, 1974. 6. 8.). “세계의 상처와 고뇌 그리고 혼의 풍경을 가장 눈부신 조율로 나타낸 최대 시인들의 명시 연쇄판(連鎖版)!”이란 오버 헤드라인을 쓰고, 이어서 총서 제목인 “세계시인선(世界詩人選)”을 헤드라인으로 활용했다.

원문도 함께 수록한 시집이란 사실을 알리는 동시에 한 권에 300원이란 책값도 헤드라인에 포함시키는 흥미로운 구성을 볼 수 있다. 세계시인선은 지금도 발행되고 있는데, 첫 시리즈로 다음의 12권이 선정됐다. 

이백과 두보 같은 당나라 시인들의 시를 엄선한 제1권 『당시선(唐詩選)』(고은 역주)을 비롯해, 발레리의 『해변의 묘지』(김현 역주), 릴케의 『검은 고양이』(김주연 역주), 프로스트의 『불과 얼음』(정현종 역주), 벤의 『올훼의 죽음』(김주연 역주), 랭보의 『지옥에서 보낸 한 철』(김현 역주), 예이츠의 『첫 사랑』(정현종 역주), 헤세의 『흰 구름』(정경석 역주), 엘리어트의 『황무지』(황동규 역주), 보들레에르의 『악의 꽃』(김붕구 역주), 파운드의 『지하철 정거장에서』(정규웅 역주), 그리고 서정주의 『서정주 시선』을 소개했다.

세계시인선은 문학평론가 김현(1942~1990) 선생이 1973년에 기획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해 12월에 『당시선(唐詩選)』(고은 역주)이 출간되면서부터 시리즈의 역사가 시작됐다.

당시 31세였던 김현 선생은 1973년에 폴 발레리의 『해변의 묘지』를, 1974년에는 랭보의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을 번역하고 해설까지 맡아 시집을 출간했다. 고교생이었던 나는 “바람이 인다! ……살려고 애써야 한다! 세찬 마파람은 내 책을 펼치고 또한 닫으며, 물결은 분말로 부서져 바위로부터 굳세게 뛰쳐나온다!”는 『해변의 묘지』의 한 구절을 수학 공식보다 더 자주 외웠다.

아르튀르 랭보(1854~1891)의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은 대학생 때 자주 읽었다. 이 시집의 ‘서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예전에,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나의 삶은 모든 사람들이 가슴을 열고 온갖 술이 흐르는 축제였다./ 어느 날 저녁, 나는 무릎에 아름다움을 앉혔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그녀는 맛이 썼다. -그래서 욕설을 퍼부어주었다….”

10년 연상의 기혼자였던 베를렌과의 뜨거웠던 동성애가 파탄 나고, 실연의 아픔을 달래기 위해 쓴 시로 알려져 있다. 남자인 베를렌을 시에서 그녀로 표현했다. 서시에서 "그녀는 맛이 썼다”는 실연의 아픔을 묘사한 절창이다.

랭보에게 권총을 쏜 베를렌은 교도소로 가고, 고향집으로 돌아간 랭보는 9편의 시를 써서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이라 이름 붙였다. “아 그래! 삶의 시계가 방금 멈췄다. 나는 더 이상 이 세계에 있지 않다. 신학은 진지하다. 지옥은 확실히 (아래에) 있다. 그리고 하늘은 위에 있다. 불꽃의 둥지 속에서의 황홀, 악몽, 잠.”(『지옥에서 보낸 한철』의 ‘지옥의 밤’ 중에서). 가볍다가도 무거워지는 것이 랭보의 시였다. 열여섯에 ‘고아들의 새해 선물’을 발표해 천재 시인으로 불렸던 랭보가 스무 살에 절필을 선언하고 문단을 떠난 것도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민음사 『지옥에서 보낸 한 철』 초판의 표지 (1974)

세계시인선에 특히 끌렸던 이유는 문예사조를 공부하지 않았는데도 시를 읽다 보면 이국적 감성이 저절로 느껴졌고 세계 시인들의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전통적인 한국 문화에서 벗어나게 하는 상상력의 새로운 확장이나 마찬가지였다.

세계시인선을 읽다보면 상상력의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그리하여 여러 시집에서는 동서양 시인들의 서정의 폭과 깊이를 알려주며, 시인(창작을 꿈꾸는 모든 사람)을 열망하는 숱한 사람들에게 창조적 배반을 시도함으로써 상상력의 르네상스를 열어가라는 시대의 표정을 제시했다.

각권 130쪽 내외의 세계시인선 시리즈들은 세계의 명시를 원문에 충실하게 번역함으로서 문학 지망생들의 열띤 호응을 얻었다. 이전까지는 원어를 일본어로 번역한 것을 다시 우리말로 옮긴 외국 문학작품이 많았는데, 이 시집들은 원어를 우리말로 직접 옮긴 것이라 이상한 표현이 거의 없었다. 갓 잡은 물고기처럼 싱싱했다.

세계시인선의 역자들은 일본어 번역본을 바탕으로 번역하지 않고 원전 번역을 시작함으로써 우리나라 문학작품의 번역 수준을 높이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 이 시집들이 지금은 따라 써보는 필사용으로도 나오고 있으니, 시를 필사해보면 감각적인 문장을 쓰는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나 역시 고교생 때 시를 필사라도 해봤으니, 훗날 시인은 되지 못했지만 카피라이터가 되어 광고 카피 비슷한 것을 끄적거리는 일이라도 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닐까 싶다.

김병희 서원대 광고홍보학과 교수·편집기획위원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