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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秘史-최찬식의 청구대학 증언]22. 믿었던 도끼에 발등을 찍히다 … 짓밟힌 명예 그리고 상처
[대학 秘史-최찬식의 청구대학 증언]22. 믿었던 도끼에 발등을 찍히다 … 짓밟힌 명예 그리고 상처
  • 교수신문
  • 승인 2009.07.17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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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層校舍起工과 협잡꾼 受難

 全科를 孝睦洞에 옯기고나니 교실이 다소 부족했다. 興奮과 愁亂中이나마 임시 건물이라도 하나 增築해야만 했다.……建設費用을 연구중인데 아들이 韓美財團 周圍에서 請負業을 한다는 姜吉龍씨를 소개했다. 姜씨는 費用의 半額을 援助를 받아서 充當한다는 조건으로 請負를 맡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서울대학 출신으로, 배경도 착실하게 보이는데 다시 韓美財團 副團長을 데려와 身元確認을 시키므로, 工科敎授들을 다 接見시킨 後에 工事를 주기로 했다. 그래서 上記條件으로 約定書를 作成하고, 三層設計 한 장을 주며 十月부터 着工하게 했으나, 겨우 一層 슬라브를 넘지 못하고 공사는 중단되었다. 十一月에는 靑丘에 一大異變이 일어난 것이다.

 학교의 財政問題를 듣고 알은 아들은 나를 돕겠다고 또 金相哲 (金一淸) 이란 사람을 데리고 왔다. 그는 盧主敎의 手票를 交換할 수 있고, 財團을 誘致할 수 있다고 한다. 그는 解放前後로 일본에 오래 거주해서 거기 벌여논 사업에 緣故가 아직 있고, 居留民團長 李裕天씨와도 親分이 있다고 하면서, 靑大 副學長의 臨時職銜(직함)을 허락해주면 一個月 以內에 3億程度의 財團꺼리를 誘致해오겠다고 한다. 자기 身元은 언제 어디서라도 保障될 수 있다고, 미국 CIC 소속이라는 李某를 데리고 오기도 했다. 나는 서울의 鷺山에게 그의 身元照會를 依賴했더니, 그가 상당한 경력을 가진 실력가라 稱하고, 심지어 “한보따리” 가지고 가겠다 하며 그의 이력서 등을 가지고 왔다. 나는 金씨를 理事들과 같이 한 자리를 갖게하여 선을 보이고, 다음에는 主任敎授 全員과 合席시켜 鷺山이 가지고 온 이력서를 들고 질문을 시켜보았는데, 교수들로부터는 可타, 否타 반응이 없다. [나도 韓國人이지마는 나는 이런 경우 韓國敎授들의 “謙遜”의 침묵이 못마땅하다. 이럴 때 침묵은 金이 아니라 職務遺棄다] 그러자 鷺山도 몇일 사이에 豹變하여 自己 照會書를 取消해버리는 것이 아닌가.[鷺山의 行動도 不可思議] 그래서 나도 이 件은 이것으로 罷矣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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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이 者는 벌써 사고를 치고 있었다. 經理疑惑 이후 나는 내가 발행하던 學校手票를 總務의 名儀로 하게끔 했더니, 그는 나와 相議도 없이 盧主敎 手票와 交換한다고 이미 巨額의 수표를 金씨에게 傳하고 있었다.……[故意인지, 不察인지는 모르되, 總務도 有罪를 免치 못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이 문제가 해결되기 前에 학교에는 더 심각한 變異가 進行되고 있었으니, 이 事件은 混亂事態에 複雜을 더할 뿐이었다.

믿었던 도끼

 前年 覺書를 써 바치고, 心機一轉하여 계속 근무하기로 돼있는 幹部職員들은 내가 여전히 강경한 태도를 굽히지 않고 있는 것을 보고 胸中에 불안과 두려움을 키우고 있었다는 것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學校經理는 亂麻같으나 그들 自身으로 말하면 死活問題를 안고 있은 것이다. ……그러나 그들만으로는 어느 모로 보나 謀事를 할 힘은 없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理事들은 더욱 無能을 自處하고 돈만 주면 언제라도 물러 갈 생각을 하고 있었으며, 목돈이 나올 때까지는 臨時 免渴(갈쯩을 면하는 것)로 손 내밀기가 바쁠 뿐이었다. 이들에게 지혜를 불어넣어 使嗾할 수 있는 것은 몇몇 敎授, 특히 法科로 봐야 할 것이다.  
 
  G는 ‘63年 事件以後 每年 輪番制로 되어있는 자리에도 몇 차례 빠져 항상 무엇인가 끼고 있는 태도였고, J는 덩달아 G편에 서서 터무니없는 판단으로 내가 親近者 만 重用한다고 不平하다가 내게 야단을 맞은 일도 있었다. 나는 항상 事務本位로 사람을 起用했지 親疎를 둔 일은 없었는데, 年前事件以來 敎授들 사이에 틈이 생겼다는 것을 알면서도 放置한 것은 나의 不察이었다. Y가 그 편에 낀 것은 兼職敎授의 減俸措置以後 종종 妄動이 있었던 끝이다. ……

 사실 그 때 나는 人生浮沈에 극심한 逆流에 맞서고 허덕이던 때이라, 만약 마음만 먹었다면, 나를 밀어 자빠뜨리기 십상 맞을 처지에 있기도 했다. 치솟아 오르는 빚에다, 협잡에 걸리지 않았나, 犬馬之勞에도 불구하고 항상 빛나는 자리에는 안 보이고 失敗한 일에만 連結되는 아들이 없나, 18年 혼자 달리기에 바쁜대로 節次안 밟은 일도 多少 있을 것이고, 무엇보다 도둑이 제발 걸음에 놀라 나를 敬遠하는 職員들 무리를 나는 내 울 안에서 키우고 있었다. ……나는 오직 그전에 그랬듯이 이번에도 難關을 突破할 궁리에만 沒頭하여, 自信도 있엇건만(靑丘의 歷史는 한 마디로 難關과 그 克服의 歷史엿다), 此際에 義로운 사람은 나를 도와주고 싶었을 것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나는 눈에 안 보이고, 내가 쌓아놓은 물건만 보였을 것도 짐작을 할 수 있다. 사람은 가도, 學校는 능히 남는다고……그들은 理事들에게 당신들 決議 한 장이면 學長을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인데 왜 求乞을 하느냐고 사주한 것이다.……

 [어느 날 理事長 全基守씨들과 是非의 불꽃이 튀었다.] 그들은 卽刻 했던 말을 回收하고 사과했지마는, 그 前 까지 그런 言辭는 그들에게 맞지가 않았다. 그들은 학교 일을 걱정해 본 일도 없고, 알려 하지도 않았던 사람들이다. 그럴 能力도 義務感도 없는 사람들로서, 앞에서 言及한 鄭宗壽씨로부터 못 받은 돈만 받으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학교에서 받는 待遇와 惠澤에는 늘상 만족하고, 처음부터 人事, 財政 一切를 設立者인 學長에게 一任한다고 記錄에도 남겼다. 나는 公式節次뿐 아니라 人間關係도 소홀히 하지 아니하고, 그들 역시 나를 만나면 내게 慰勞의 말을 잊지 않았다. 이번의 갑작스러운 妄言은 결코 無心히 나온 말이 아니라, 최근에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나는 이 豫告를 警覺해 받아들이지 않고, 어느 젊은 敎授가 빨리 人事移動을 하라고 勸告해 주었을 때도 그냥 듣고만 있었다.……

 11月 22日 理事會에서 通知가 왔다. 이때까지 學校側에서 召集했는데, 靑丘有史以來 처음으로 理事會에서 開催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 突變이 含蓄하는 것도 無視하고, 그 前에 總務가 全基守 理事長이 무슨 감정이 있어 보이니 풀어 주는 것이 좋겠다고 했는데도 알아보고 선처하라고만 말하고, 姻戚婚事로 자리를 비우고 大田을 다녀왔다. 項羽固執이 이랬던가. 22日의 理事會는 果然 前哨的인 氣싸움 전략이라 할까, 金相哲로부터 侮辱的인 말을 들었다고 트집을 잡더니, 난데없이 李源萬 理事의 辭任案을 내놓는다. 나는 그 이유에 납득이 안 가 극력 반대했더니, 일방적으로 決議形式을 取한다. 나는 어이없어 학장실로 돌아가, 말이라도 좀 하고 숨이라도 통할 요량으로 主任敎授 員召集을 請했더니 G가 나서서 나를 위하는 척, 오늘은 그만 들어가서 쉬시라고 한사코 막는다. 나를 보내놓고 그들은 全員이 모여 밤늦도록 會議를 하고 있다고 나중에 어느 職員이 전화해주었으나, 나는 나가지 않고 버려두었다. 이튿날 洪 敎授가 집으로 와서 敎授들이 學長을 謀陷할 것 같다고 해도 나는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追後들으니, 어느 교수가 學長의 말도 한번 들어보고 實態調査도 해보자고 提議했는데 G는 그럴 必要없다고 막아버리더란 것이다.……

 臥褥一週日에 質疑書  같은 것이 하나 왔다. 그들은 非違라도 하나 캐려다 없으니 이미 三年前에 理事會에서 處理된 黑石土地件을 들고 나와, 지금 債務가 모두 그 때문이 아니냐는 것이다. 可笑로워 말도 안 나온다.……數日後 소문을 들은 金永達씨가 찾아와, 지금은 몸을 감춘 敵 이 射擊을 해오는 장면과도 같은데 왜 戰鬪態勢를 갖추지 않고 누워만 있느냐고 責望을 한다. 또 학교에 출입하던 情報部의 李某는 허락만 해준다면 그들을 당장 처리하겠다하고, 검찰에서도 나만 願한다면 ‘一網打盡’ 이 가능하다고 하지만, 이런 式의 ‘戰鬪’는 내 眼中에 없었다. 들은 채, 만 채 흘려버리고 나는 아직도 債務淸算과 財團構成의 궁리만 하고 있었다.

 그러자 同窓幹部 6,7名이 찾아왔다. 나는 즉석에서 그들의 介入을 청했다.……그들 역시 理事들에 대해서는 마땅치 않게 여기고 있던 차에 이번에 作黨을 해온데 대해서는 분개를 하면서, 곧 회의를 소집하여 대책을 講究하겠노라 했다.……다음에는 理事들이 全員 숨어버렸다 한다. 동창들은 그들을 찾아 온 市內로, 郊外로, 서울까지 가는 동안에 十餘日을 보냈다.  그러자 뜻밖에 鷺山이 서울서 全基守씨를 대려 와 나하고 화해를 시키려한다. 그러나 문제는 理事長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고 화해가 될 수도 없었다. 도리어 同窓들은 鷺山의 행위를 몹시 나무라고, 나한테마저 오해를 품었다. 卽, 자기네들에게 收拾을 맡겨놓고는 별도로 鷺山을 시켜 和解工作을 한 줄로 오해를 하고, 내게 義理를 보이던 同窓들도 來往을 끊고 그들과 對策을 論 하려던 것도 흐지부지 되었다.

 [이 대목을 也靑의 日記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금호 호텔서 鷺山 전화가 와서 나갔다. 全基守와 鼎坐. 一旦 和解, 幄手. 全은 落淚하면서……不眠云云. 鷺山, 男兒三人 돼지 잡아먹고, 친구 따라 江南간다는 얘기로 一場演劇……本論은 저녁 7時 約束. 이것이 삽시간에 불씨…… 兩者和解의 소식이 전해지자 꽁꽁 벼루던 同窓들 虛脫感은 容或 無怪[그럴 수도 있었으리라는 뜻]……‘천장’에서 夕席. 全基守 태도를 밝히면서 斷然 同窓案 못 받겠다고. 同窓理事 덤비는 學校는 다 망한다고. 자기는 辭表도 안 낼 心事. 바위에 대침.(1966 12/28)”

 [이것은 무슨 宮廷 꾸데따의 暗鬪 演劇을 구경하는듯, 대학의 본질과는 아무런 관계없는, 극히 일상적인 감정의 葛藤이다. 이런 하찮은 演劇이 18年 靑丘의 송두리를 흔드는 결과로 치닫는 것을 보고 어처구니없다고 밖에 표현할 수가 없다. 全基守 理事長은 일을 저질은 張本人이기도 하고, 悲劇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也靑과 만나면 곧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도, 결국은 靑丘大學을 靑瓦臺에 ‘팔아 넘기는’ 행동을 한다. 그러나 約束받은 褒賞도 못받고, 嶺南大學에서는 期待했던 대우도 못 받으니, 1973年 어느 날 忽然히 집을 나가 踪跡을 감추어 不歸의 客이 되었다한다.]

 1966年 12月30日 밤에 合同會議를 한다고 통지가 왔다. 어렴풋이 동창들이 對策論議나 하는가 하고 기계적으로 나갔다. 아니었다. 정작 나가야 할 데는 안 나가고, 안 나갈 데를 나갔다. 그것은 同窓들의 主宰가 아니고, G의 脚本을 연출하는 자리였다. [여기서 좀 더 상세한, 同日날짜의 日記에서 抄錄하겠다.]:

 “……吳君을 바라보고 이것 무슨 짓이야고 눈을 부릅뜨고 물으니, 당황하여 일어나서 全基守와 수군수군하다가 어느 사이 閉會를 宣言하고, 名譽學長云云. 憤이 나 벌떡 일어나서 學校 由來 法條文 하나로만 된 것이 아니라는 것, 負債 및 金相哲 관계, 5.16 以後 經過, 自體監査를 하게 된 理由와 현 상태 등 一場說明……대개 要旨言及은 됐을 것이나 興奮또 興奮……會議全體를 否認을 하고 나왔으나 침착하게 대응하질 못했다. 이것이 밖으로 나가 발표되고, 보도되면 어떻가나 걱정하고, 같이 노력하자는 동창들도 있었다만, 누가 보장할 것이냐……명색이 大學인데 會議 節次 形式이라도 갖추어야지. 18年 歷史를 뒤바꾸려는 會議라면 板子집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18年間 歷史를 다 말 못하더라도 18分間은 提案에 대한 설명은 해야 할 것이고, 上程與否의 검토, 철저한 토의, 각 단계마다 動議, 再請, 贊成與否는 거쳐야 할 것인데……입안에서 중얼거리는  어떻소式, 장터 섰다판 만도 못하다……

 負債云云, 金相哲 운운, 한 번 검토라도 있었나, 負債가 왜 났는지? 5.16 왜 났느냐고 한 번 물어 보아라. 金某 협잡이건 말건 損害 없었으면 그만이지. 다 일시적인 것, 나는 이보다 더 한 고비도 넘겼는데! 내가 다 책임지겠다하는데도 듣지 않는 이유는? 獨走도 다 이유가 있었다.…… 동창들은 약속한 바 있다. 陋名 벗고, 面目서게 監査 계속해줄 것, 節次 다시 할 것……”(日記 1966 12/30)

 [이 날 저녁 회의에 불려나갈 때 也靑은 다음, 다음 날 해가 바뀔 ‘67年 校紙 “靑丘春秋”를 위하여 卷頭言을 집필하고 있었고, 當日 ’66年 12/30 日字에는 “丁未年의 設計圖” 란 題下에 學長의 明年 抱負에 대한 인터뷰가 실려 있다. 그 날짜, 12月30日의 日數가 나빠서 18年 靑丘의 역사가 뒤바뀠을까 싶을 만큼 必然보다 偶然의 작난을 느께게 한다. 如何튼 해가 바뀐 後 也靑은 蟄居에 들어갔다.  이야기는 여기서 다시  “靑丘有言” 으로 돌아간다.]

 그 후 그들은 理事, 同窓, 敎授들의 소위 運營委員會를 구성하고 매일 머리를 맞댄 모양이나, 한 마당 깔린 靑丘 살림의 당면문제를 파악할 리 없고, 나의 먼 經綸을 알 도리가 없다. 同窓代表들이 數次 내게 와서 出席을 請했으나, 나는 그들을 다시 對面조차 하기 싫었다. 그러자 그들은……궁여지책으로 經濟를 한다고 한 것이 姜吉龍이 짓다가 둔 元來 3層 建物에 새 業者를 시켜서 3層을 더 올리게 한 모양이다. 그 동안에도 나는 財團物色을 끊이지 않다가 서울에서 두 군데 희망을 얻었다. 하나는 鑛産業을 하는 李應俊 同志로부터 3億 가량이 가능했고, 또 한 곳은 土地事業을 하는 李相弘씨가 20億臺를 모아서 方今 學園經營을 찾고 있었던 次였다. 바로 그분과 같이 학교의 現地踏査를 하려던 참, 6月15日 正午 靑天霹靂과 같은 轟音(굉음)과 함께 공사중인 건물이 무너지고, 50餘名 의 끔찍한 人命被害가 났다 한다.……

 [여기에서 이야기는 위의 “第2章 어찌하여 靑丘大學은 靑瓦臺로 갔나?” 로 이어진다. 卽, 그 異變에 이르기까지의 18年 靑丘의 뿌리와 줄기를 方今 서술한 바다. 草創期부터 始終을 목격한 元老敎授가 1999年에 고백한 證言에서 “어려운 與件속에서 靑丘大學을 創立하고, 그 발전을 위하여 심혈을 傾注하신 也靑先生, 崔海淸 學長을 先生이 構成한 理事會가 解任한 일은 지극히 잘못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고 한 말은 非但 그 분 한 사람의 말이 아닐 것이다.  “至極히 잘못된”이 아니라, 오히려  그야말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고 표현하는 것이 適切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났다. 그리고 그 後의 非理와 不美는 여기서 비롯된다. 非理는 大統領權力의 非理요, 不美는 巨大한 캠퍼스를 가진 大學의 不美이다 -- 그 오랫 동안 個人이 입은 傷處와 짓밟힌 名譽는 姑捨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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