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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괴한 한국의 민주 사회, 느림의 미학이 필요할 때
기괴한 한국의 민주 사회, 느림의 미학이 필요할 때
  • 박상훈
  • 승인 2023.11.30 08: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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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열린연단 ‘오늘의 세계’ ㉒ 박상훈 국회미래연구원 연구위원

네이버 ‘열린연단’이 시즌10을 맞이해 「오늘의 세계」를 주제로 총 54회 강연을 시작했다. ‘오늘의 세계’는 국제질서, 정치와 경제, 사회와 문화, 과학기술, 철학에 대해 인문·사회·자연과학의 상호 연결성을 통해 학문적 담론을 형성할 예정이다. 지난 4일 박상훈 국회미래연구원 연구위원이 「개인과 공동체」를 강연했다. 주요 내용을 요약·발췌해 소개한다. 제23강은 전영수 한양대 교수(국제학대학원)의 「인구와 출산 문제」가 예정돼 있다.
자료제공=네이버문화재단
정리 최승우 기자 kantmania@kyosu.net

민주주의가 속도전을 동반하면, 전쟁 이상으로 불행한 결과를 낳는다.
 느리더라도 제대로 하면 된다고 말해 주지 않는 사회에서 개인과 공동체가 
깊은 분열로 고통받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느려져야 다른 게 보인다. 
멈춰서 찬찬히 돌아볼 수 있어야 자연의 시간을 닮아 갈 수 있고 
돌봄과 은퇴 후의 삶을 살아갈 지역 공동체가 눈에 들어올 수 있다.

일제 35년의 긴 식민 상태를 겪었고 1950년대까지만 해도 필리핀과 파키스탄으로부터 원조를 받아야 했던 한국 사회가 그 뒤 이룩한 빠른 발전은 국가 간 비교역사 연구에서 특별한 주목을 받을 일이다. 산업화·민주화·세계화·정보화의 거시 변화를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빠르고 압축적으로 성취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세계 6위의 군사 강국이자 세계 10위의 경제 대국이 되었다. 세계 7개국밖에 없다는 ‘3050클럽’에 속한다. 국가의 힘을 가리키는 이런 지표들과는 달리 구성원 개인의 행복감이나 사회의 공동체성을 보여주는 지표는 아주 다른 사실을 말해 준다. 많은 사람이 분열과 갈등·불공정과 양극화·적대와 대립을 우리 사회의 문제라고 말한다. 자살률·출생률·산재 사망·남녀 임금격차·노인빈곤·정규-비정규직 차별 등의 사회경제적 삶의 지표는 매우 나쁜 상황이다. 

같은 국가에 속하고, 같은 헌법 아래 있으며, 서로를 민주시민이라고 말하는 사회의 구성원이라고 믿기에는 너무나 이질적이고 적대적인 열정이 시민들 사이를 가르고 있다. 신뢰할 만한 언론도, 존경할 만한 지식인도, 주권을 기꺼이 위임할 만한 정당도 찾아보기 힘든, ‘병든 사회’가 우리 앞에 있다.

박상훈 국회미래연구원 연구위원은 “모든 사람을 시간에 쫓겨 살게 만든 이상한 민주사회가 우리 앞에 있다. 속도전 경쟁으로 치면 세계 최강 국가다. 경쟁 부문이 있는 곳이라면 어김없이 ‘국가 K’가 모습을 드러낸다”라며 “자살·산재 사망·가계 부채·남녀 임금격차·이혼 증가·사교육비 지출 등의 어두운 현실에는 관심이 없는 사회다”라고 설명했다. 사진=네이버문화재단
박상훈 국회미래연구원 연구위원은 “모든 사람을 시간에 쫓겨 살게 만든 이상한 민주사회가 우리 앞에 있다. 속도전 경쟁으로 치면 세계 최강 국가다. 경쟁 부문이 있는 곳이라면 어김없이 ‘국가 K’가 모습을 드러낸다”라며 “자살·산재 사망·가계 부채·남녀 임금격차·이혼 증가·사교육비 지출 등의 어두운 현실에는 관심이 없는 사회다”라고 설명했다. 사진=네이버문화재단

왜 이렇게 된 것일까. 공익의 증진에 기여하지 못하는 정당 정치, 책임감 없는 말과 행동으로 사람들을 지치게 만드는 의회 정치는 언제까지 계속될까. 국가적 차원의 성장과 발전이 왜 개인과 공동체의 안정된 삶과 병행해 발전하지 못하고, 그와는 정반대의 균열과 갈등, 적대와 증오의 심화로 이어지고 있는가.

정치학자들은 한국의 사나운 정치를 ‘양극화 정치’로 정의해 왔다. 정치 양극화는 “정당 정치나 의회정치가 관용의 범위 밖으로 뛰쳐나가 정치가 해야 할 타협과 조정 대신 극단적 대립으로 치닫는 것”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리 잡았다. 

우선 한국의 양극화 정치가 갖는 특징을 유형화해보자.

첫째, 양극화 정치는 극단적 당파성에 따른 무책임한 정당 정치다. 둘째, 양극화 정치는 정당 내 파벌 양극화 정치다. 셋째, 정책이나 이념적 차이보다 권력 이슈로 갈등하는 정치가 양극화 정치다. 넷째, 공존과 협력을 어렵게 하는 혐오의 정치가 양극화 정치다. 다섯째, 양극화 정치는 법안 폭증과 과도한 입법 경쟁이 지배하는 정치다. 여섯째, 양극화 정치는 대통령 의제가 과도한 지배력을 갖는 정치다. 일곱째, 양극화 정치는 대표되지 않는 사회 갈등을 방치하는 정치다. 여덟째, 양극화 정치는 정당의 낮은 자율성을 동반하는 정치다. 아홉째, 양극화 정치는 열정적 지지자와 반대자가 지배하는 정치다.열째, 양극화 정치는 소수 지배를 강화하는 정치다. 열한째, 여론 동원 정치를 심화시키는 것이 양극화 정치다. 열두째, 양극화 정치는 양극화된 양당제를 낳는 정치다. 열셋째, 양극화 정치는 추종과 혐오의 팬덤 정치로 이어진다. 열넷째, 양극화 정치는 추종과 혐오의 팬덤 정치로 이어진다. 

한국의 양극화 정치가 가진 팬덤 정치의 특성은 좀 더 논의할 필요가 있다. 양극화 정치가 정당 정치를 초점으로 삼는 개념이라면, 팬덤 정치는 대중 정치나 대중 민주주의의 특정 유형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를 제공한다. 나아가 최근 세계적 걱정거리가 되고 있는 포퓰리즘 정치의 한국적 유형을 특징화할 수 있는 개념으로서 나름의 장점도 있다.

우선 팬덤 정치란 누군가를 특별하게 좋아하는 정치 현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팬덤 정치의 본질은 자신과 생각이 다른 정치인이나 정치집단을 과도하게 혐오하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좋아함(선호)보다 싫어함(혐오)에서 발원하는 것이 팬덤 정치다. 그런 점에서 과거 호남의 디제이(DJ) 지지나 노사모 현상을 ‘팬심’ 정치라고는 할 수 있어도 팬덤 정치라고는 할 수 없다. 팬덤 정치의 첫째 특징은 이것이다.

단순히 싫어한다는 게 끝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혐오하는 정치인이나 정치집단을 다른 사람도 혐오하게 만들고 싶어 한다는 것, 바로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팬덤 정치는 단순히 개인의 정치 성향을 가리키는 용어가 아니라, 대중 정치의 한 유형으로 이해돼야 한다. 이것이 팬덤 정치의 둘째 특징이다.

팬덤 정치의 셋째 특징은 서로 다른 진영 간 차이가 아니라 같은 진영 안에서의 혐오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이다. 넷째, 팬덤 정치는 민주주의의 단점을 극대화하는 정치다. 다섯째, 팬덤 정치는 다양한 선호에 기반을 둔 ‘다원 민주주의’와는 양립하기 어려운 일원주의적 욕구를 키운다.

여섯째, 팬덤 정치는 기회를 좇아 유동하는 불안정한 정치다.

일곱째, 팬덤 정치는 두 축으로 작동한다.

여덟째, 팬덤 정치는 일종의 대중적 사회운동에 가깝다.

아홉째, 팬덤 정치는 민주주의를 지배하려는 집단적 열정의 정치다.

열째, 팬덤 정치는 효능감과 자신감을 갖게 된 새로운 압력 정치다. 열한째, 팬덤 정치는 대통령 중심주의를 강화하고, 의회 민주주의나 정당 민주주의의 발전을 저해하는 정치다. 

열두째, 팬덤 정치는 조급한 정치이고 잔혹한 정치다.

열셋째, 팬덤 정치는 비창조적 흥분 상태를 불러일으키는 정치다. 팬덤 정치가 한국적 포퓰리즘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면 그 핵심은 악성 포퓰리즘이라는 데 있다. 포퓰리즘 정당이나 포퓰리즘 운동은 부정적인 측면만 있는 것이 아니다. 기존 정당들이 대표하지 못한 갈등을 효과적으로 표출하는 기능을 하기도 하고 이를 통해 정치 체제 전반의 반응성과 역량을 강화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하지만 팬덤 정치에는 그런 효과가 없다. 오히려 정치적 대표의 범위를 제한하고, 사회적으로 중요한 갈등을 억압하는 기능을 하기도 한다. 정당 내부적으로는 모두가 팬덤 대중이나 팬덤을 가진 정치 
세력에 굴종적이게 만든다. 

“팬덤 정치가 국회의원의 행위 유형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나”에 대한 질문에 전·현직 의원들과 의원실 보좌진, 정당 당직자들이 꼽은 것을 요약하면 그 특징이 잘 드러난다. 대다수가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국회의원에는 다음과 같은 유형이 있었다. 

첫 번째는 선동가형이다. 두 번째 유형은 외견상 매우 적극적이고 전투적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무능력하고 무책임한 의원들이다. 세 번째는 일종의 개인 독점형 의원 유형이다. 네 번째는 도덕적으로 뻔뻔한 유형이다. 2020년 이후 본격적으로 이슈화되기 시작한 한국의 팬덤 정치는 양극화 정치의 두 번째 국면에서 나타난 변화였다. 

그 이전까지 팬덤이라는 말은 연예·스포츠 분야에서 주로 사용됐는데, 이 시기를 기점으로 특별한 정치 용어가 됐다. 팬덤 정치 관련 기사 출현 빈도를 살펴보면, 이를 잘 보여준다. 정치 양극화 이슈에 비해 팬덤 정치 이슈가 출현한 빈도는 비교할 수없이 훨씬 높은 것도 주목할 만하다. 정치 양극화가 주로 학계나 지식인 집단의 언어였다면, 팬덤 정치는 대중적인 이슈다. 국민 주권을 최고 통치자의 의지를 통해 실현하려는 실험은 전체주의를 낳았을 뿐, 그것이 민주적으로 가치 있는 결과를 낳은 적은 없었다. 

대의 민주주의를 제대로 해보기도 전에 권력자와 그를 추종하는 시민들이 주도한 국민 주권 민주주의로 인해 정치도, 사회도, 개인도 위태롭게 된 것은 돌아볼 일이 아닐 수 없다. 한국 민주주의는 좀 더 느려져야 하고 좀 더 다원적이 돼야 한다. 

좀 더 느리게 일해도 뒤쳐진 느낌을 가지 않을 수 있어야 하고, 다르다고 공격받지 않는 안전한 사회가 돼야 한다. 요컨대 사회를 분열과 적대로 이끄는 양극화 정치, 팬덤 정치는 우리가 발전시켜야 할 길이 국민 주권 민주주의도, 직접 민주주의도 아니고, 책임정치에 기반을 둔 다원주의적 민주주의임을 더 깊이 생각하게 해 준다.

모든 사람을 시간에 쫓겨 살게 만든 이상한 민주 사회가 우리 앞에 있다. 속도전 경쟁으로 치면 세계 최강 국가다. 경쟁 부문이 있는 곳이라면 어김없이 ‘국가 K’가 모습을 드러낸다. 세계 7위의 우주 강국이 되고,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경제 규모를 넘어서고 잠재 성장률에서 일본을 제치고, K 팝·K 뷰티·K 드라마로 이어지는 시리즈에 국민배우·국민가수·국민MC·국민드라마 시리즈가 나란히 가는 동안 자살·산재 사망·가계 부채·남녀 임금격차·이혼 증가·사교육비 지출 등의 어두운 현실에는 관심이 없는 사회다.

민주주의가 속도전을 동반하면, 전쟁 이상으로 불행한 결과를 낳는다. 느리더라도 제대로 하면 된다고 말해 주지 않는 사회에서 개인과 공동체가 깊은 분열로 고통받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느려져야 다른 게 보인다. 멈춰서 찬찬히 돌아볼 수 있어야 자연의 시간을 닮아 갈 수 있고 돌봄과 은퇴 후의 삶을 살아갈 지역 공동체가 눈에 들어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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