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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술의 성장 공간 '니치', 진화론 적자생존과 닮았다
신기술의 성장 공간 '니치', 진화론 적자생존과 닮았다
  • 최승우
  • 승인 2022.11.04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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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열린연단 ‘자유와 이성’ ㉔ 박상욱 서울대 교수(지구환경과학부)

네이버 ‘열린연단’이 시즌9를 맞이해 「자유와 이성」을 주제로 총 44회 강연을 시작했다. ‘자유’를 중심으로 인간과 자연의 본성, 재난과 질병에 대한 제약과 해방 등을 역사, 정치, 철학, 과학기술 등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살펴본다. 지난 15일 박상욱 서울대 교수(지구환경과학부)가 「기술 패권과 표준 경쟁」을 강연했다. 주요 내용을 요약·발췌해 소개한다. 제25강은 이종광 성균관대 교수(철학)의 「디지털 문명과 인간의 자유」, 제26강은 이준이 부산대 교수(기후과학연구소)의 「기후 위기와 인류의 대응」, 제27강은 이덕환 서강대 명예교수(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의 「불평등과 빈곤·기아·식량문제: 생물종 다양성」이 예정돼 있다. 
자료제공=네이버문화재단
정리 최승우 기자 kantmania@kyosu.net 

“미래의 사회기술 시스템은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이다. 만들어가는 사회기술 시스템에서 시민은 사용자로서 수동적으로 기술을 수용하는 단선적인 역할만 요구되지 않는다. 기술 시스템의 형성과 사회기술적 전이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능동적인 역할이 필요하다.”

과학기술은 인간과 그 군집 자체의 모습도 변모시켰다. 오늘의 인간은 이미 독자적인 생물 개체가 아니며, 말하자면, 사이보그다. 항상 지니는 스마트폰에 지적 능력과 군집 내 다른 개체들과의 연결 기능을 의존하고 있으며, 실외에서의 이동은 동력 기계에 맡기고 있다. 기술과 사회의 변화를 진화의 일종으로 보는 게 합당하다면 기술과 사회는 공동 진화하는 셈이다.

디지털 기술의 발달로 초연결 사회가 도래했고 특별한 자격 요건 없이도 남의 이목을 끌 수만 있다면 군집 내의 연결망에서 누구나 허브가 되는 게 가능해졌다. 디지털 기술로 연결 행위 즉 브로커리지의 한계비용이 제로로 수렴하게 됐고 브로커리지 플랫폼을 소유한 소수와 플랫폼을 위해 노동을 제공하는 다수 사이의 분배 구조가 극단적으로 왜곡됐다. 

박상욱 서울대 교수(지구환경과학부)는 “기후 변화의 위기로 인해 화석 연료에 기반한 현대의 산업기술 사회기술 시스템은 그 한계를 드러냈다”라며 “더 이상 자체적으로 지속 가능할 수 없음이 명백해졌다”라고 설명했다. 사진=네이버문화재단

이 글에서는 기술과 사회의 공동 진화를 바라보는 시각으로서 과학기술 혁신 정책 학계에서 사용되는 사회기술 시스템 관점을 소개하고, 사회기술 시스템이 가진 강한 경로 의존성을 설명하면서 시스템의 초기 설계와 설정이 중요함을 말할 것이다.

기술과 사회의 관계를 논할 때 가장 흔한 접근법은 기술 결정론이다. 기술 결정론의 장점은 논리적 단순함에 있다. 어떤 기술이 등장하고 무언가에 영향을 미친다. 이것이 또다른 변화로 이어지고 그 영향이 마치 도미노처럼 일파만파 퍼져나가서 결국 사회적으로 큰 변혁을 일으킨다. 기술과 사회의 관계는 기술 결정론과 기술의 사회적 구성론 사이의 어디쯤, 혹은 그 둘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무언가에 있을 것이다. 

공학에서 사용되던 기술 시스템의 개념을 과학기술학으로 확장한 것은 미국 존스홉킨스대의 기술사학자 토머스 휴즈(Hughes)였다. 휴즈 이후 기술사학계에서는 특히 복잡하고 규모가 큰 기술 시스템의 형성 과정과 종래의 기술 시스템을 대체하고 새로운 기술 시스템이 자리를 잡는 사례, 즉 이후 전환이라고 부르게 되는 사례들이 연구자들의 흥미를 끌었다. 이를 대규모 기술 시스템이라 부른다.

비슷한 시기에 과학기술 정책 학계에서는 국가 혁신 시스템 관점이 등장해 선진국 과학기술 정책의 분석적, 이론적, 그리고 규범적 프레임워크로 자리 잡았다. 

보 칼슨(Bo Carlson)은 ‘반도체 기술’, ‘자동차 기술’ 등 연계된 기술들을 경계로 하는 혁신 시스템 관점을 제안하며 ‘기술 혁신 시스템 관점’이라고 명명했지만 크게 성공하지는 못했는데, 산업 부문 혁신 시스템과 비슷한 개념이었고 휴즈의 기술 시스템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전이는 전환에 이르는 동적 과정이다. 최근 과학기술 혁신 정책 학계에서 사용하는 사회기술적 전이에 대한 다층위적 관점에서는 세 개의 레벨을 설정한다. 시작은 니치(niche)다. 니치는 사회기술적 전이의 가능성을 가진 새로운 기술이 등장하고 성장하는 이론적 공간이다. 

기업이나 공공 연구 부문에서의 조직적인 연구 개발 활동의 산물이 아니더라도 시민들에 의해 창발된 혁신,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 기존의 기술을 전혀 다른 용도로 사용하는 경우 등도 니치에 진입할 수 있다. 니치 공간에서는 다양한 대안들이 시도되고 테스트된다.

니치 기술들이 사회적 선택을 받아 성장하거나, 선택을 받지 못해 도태되는 과정은 진화론의 적자생존과 닮았다. 생태계에서의 진화와 기술 진화의 다른 점이라면 기술 진화가 의도된 방향성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이다. 다양한 니치 기술들은 결국 소수의 지배적 디자인으로 수렴된다. 여러 가지 영향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어떤 기술이 지배적 디자인이 될지를 예측하는 것은 쉽지 않다. 

니치 기술이 성장하면 중간 레벨인 다음 단계로 올라선다. 신기술에 우호적인 제도와 정책에 힘입은 것일 수도 있고, 신기술에 호기심을 보이는 얼리 어답터들 덕분일 수도 있지만, 니치에 있던 기술이 주류 레벨에 돌입하게 되는 가장 중요한 동기이자 동력은 산업경제적 잠재력이다. 정부는 니치 형성을 위해 공적 연구 개발비를 지출하고, 니치 기술의 성장 즉 스케일업을 위한 여러 진흥 장치들을 제공한다. 

현대 사회기술 시스템의 한계와 만들어가는 미래의 사회기술 시스템 산업혁명 이후 현대화의 과정과 결과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이대로는 현대의 사회기술 시스템이 지속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후 변화의 위기로 인해 화석 연료에 기반한 현대의 산업기술 사회기술 시스템은 그 한계를 드러냈고 더 이상 자체적으로 지속 가능할 수 없음이 명백해졌다. 지속 가능한 사회기술 시스템의 전환은 친환경 기술뿐 아니라 지속 가능한 사회 구조와 지속 가능한 정치 체제로의 전환을 포함한다. 동시에 진행되는 또 다른 와해성 사회기술 시스템 전환으로 디지털 전환이 있다.

디지털 전환은 탈탄소 전환과 비교할 때 규범적이라기보다는 현상적이다. 또한, 탈탄소 전환이 기존의 화석 연료 기반 사회기술 시스템의 견고함에 계란으로 바위 치듯 고전 중이고, 기술이 선도한다기보다는 규범성이 주도하는 전이 경로를 보이고 있는 것과는 달리, 디지털 전환은 소망적인 디지털 미래의 청사진 없이도 고삐 풀린 기술 발전이 전환을 주도해나가고 있다.

결국, 미래의 사회기술 시스템은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이다. 만들어가는 사회기술 시스템에서 시민은 사용자로서 수동적으로 기술을 수용하는 단선적인 역할만 요구되지 않는다. 기술 시스템의 형성과 사회기술적 전이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능동적인 역할이 필요하다. 과학기술 분야의 전문성이 없더라도 과학기술 지식과 혁신의 공동 생산에 나설 수 있다. 

기술과 사회는 하나의 융합된 시스템을 이루고 있으며 사회의 어느 구성원도 이 시스템에서 벗어날 수 없다. 기술 변화를 도외시하고, 참여하지 않고 방관한다면 현대 시민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고, 참여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기도 하다. 미래 사회기술 시스템의 구성에 참여할 때 비로소 미래를 선택할 자유를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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