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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싸운 유교관료, 유연한 이민족 정책으로 세계도시 기틀 마련했다
불교와 싸운 유교관료, 유연한 이민족 정책으로 세계도시 기틀 마련했다
  • 석길암 금강대 불교문화연구소 HK교수
  • 승인 2015.05.12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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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安, 동아시아를 만든 1백년을 성찰하다_ 09. 『광홍명집』, 장안의 사람들이 세계를 소화하는 법

▲ 서안 대당서시 박물관 앞에 있는 실크로드 기점을 표시한 상징탑. 뫼비우스의 띠를 형상화해 그 안에 실크로드로 연결되는 세계 도시들을 표시하고 있다.

도선이 장안 불교계를 대표하던 시절은 승려들의 사회적 지위를 두고 적지 않은 논란이 있었던 때였다. 대신들 사이에 승려들도 황제에게 공경의 예를 표해야 한다는, 곧 승려들도 황제를 친견할 때는 절을 하는 예법을 지켜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로 논쟁이 벌어졌던 시절이다. 그 이면에는 적지 않은 문제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광홍명집』은 당나라 전기에 살았던 승려 道宣(586~667년)이 편찬한 책이다. 이 책은 ‘弘明集’을 확장[廣]했다는 책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梁代의 승려 僧祐(445~518년)가 편찬했던 『홍명집』이란 책을 확대해 편집한 것이다. 이 책은 宋과 齊, 梁과 陳, 그리고 隋나라의 5대에 걸쳐 불교가 흥성하고 쇠퇴했던 자취와 관련한 중요한 글들을 모은 것이다. 책의 제목에서도 이미 드러나지만 불교를 널리 전파하는 것은 물론 그 가르침의 우수성을 알리는 데 목적을 뒀다. 불교가 특별히 흥성하게 된 계기를 만든 사건과 관련된 글들, 그리고 불교에 대한 강력한 비난이 행해졌던 시기에는 불교를 비난한 글과 그에 대한 반론들이 주된 내용을 이룬다. 도선은 이 책을 편집한 의도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中原의 주나라와 위나라의 정치는 어두운 면과 밝은 면을 답습해 노자를 중시하고 불교를 경시했으므로 끝내 믿음이 무너지고 본분마저 변해 오로지 구변에만 힘써서 요망한 변론이 극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때에도 어진 이가 없지 않아 흉금을 털어놓곤 서로 이해하면서 뛰어난 재능을 드러냈는데, 참으로 이 시대에도 이런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우매함과 밝음이 함께 드러나 사도와 정도가 서로 스승을 삼았으니, 그 모양을 참작하고자 했다.”


핵심은 정치가 어지러웠을 때는 노자 곧 도교가 중시되면서 불교가 비난받고 공격을 당해 크게 쇠퇴하는 계기가 됐으며, 그렇지 않았을 때는 불교의 좋은 면목이 제대로 드러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러한 모양새를 자세히 참작할 수 있도록 관련된 글을 모았다는 설명이다.
이 도선이라는 승려는 신라의 의상이 당나라에 유학했을 때, 같은 종남산에 살고 있어서 교유관계를 맺었던 인물이기도 하다. 종남산 정업사라는 절에 주로 머물렀고, 7세기 중후반 장안의 불교계를 대표했던 인물들 중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데 도선이 장안 불교계를 대표하던 시절은, 승려들의 사회적 지위를 두고 적지 않은 논란이 있었던 때였다. 대신들 사이에 승려들도 황제에게 공경의 예를 표해야 한다는, 곧 승려들도 황제를 친견할 때는 절을 하는 예법을 지켜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로 논쟁이 벌어졌던 시절이다. 절 한번 하는 것이 무슨 대수냐고 할 수도 있지만, 사실 그 이면에는 적지 않은 문제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이면의 문제들까지 고려했기 때문에 장안을 대표하는 승려들 중의 한 사람이었던 도선이 『광홍명집』 같은 책을 편찬하게 됐던 것이다. 승려들이 황제에게 절을 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를 둘러싼 사건의 진행을 『광홍명집』의 기록을 빌려서 살펴보자.

첫째 장면. 수 양제는 대업 3년(603년)에 새로 율령과 격식을 下敎하면서 “무릇 여러 승려들과 도사들로서 啓請하는 것이 있으면, 먼저 반드시 절을 하고 난 후에 이치를 주장해야 한다”고 했다. 비록 이와 같이 令을 내렸지만 승려들은 끝내 따르지 않았다.
둘째 장면. 당 고종 용삭 2년(662년) 司禮에서 비구와 비구니, 도사와 여도사 등이 임금과 아비에게 절하는 일을 논의했는데, 논의한 끝에 1천539명은 절을 하지 말도록 할 것을 청했다.
셋째 장면. 같은 날, 같은 안건에 대해 논의했는데, 논의한 후에 1천354명은 절을 하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넷째 장면. 4월 16일에 승려들도 절을 해야 한다는 조칙을 내렸다.
다섯째 장면. 용삭 2년 6월 8일, 당 고종이 조칙을 내렸다. 조칙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지금 임금이 자리하더라도 절을 할 필요가 없으나, 그 부모에 대해서는 자비로운 양육의 은혜가 있으므로 마땅히 무릎을 꿇고 절하라.”
이 일련의 사건은 승려가 황제를 만날 때 절을 해야 하느냐 아니면 절을 하지 않도록 허용해야 하느냐를 두고 벌어진 것이다. 7세기의 한 세기 동안 장안에서 벌어진 일을 간단히 정리한 것이지만, 사실은 300년 가까이 진행돼 온 논쟁이 마무리를 짓는 과정이다. 때문에 그 이면에는 적지 않은 사정들이 숨어 있다.
먼저 절을 하지 말도록 할 것을 주장하는 측의 입장은 다음과 같았다.
“출가하는 것은 형색을 기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번뇌를 멀리 여의고자 하는 것입니다. 어찌 허울을 좇는 일이겠습니까? 空을 깊이 궁구해서 사람들을 구하고, 道를 지극히 해서 바른 이치를 드높이는 것인데, 하필이면 그런 깊은 취지를 깨뜨려서 儒家의 자취로 끌어들여야만 합니까? 법복을 벗고 속인에게 절을 시켜서 孔門을 답습해 절하는 예를 취하게 하는 것은, 그 가르침을 보존한다면서 사실은 그 道를 훼손하는 것이고, 그 복을 구한다고 하면서 그 몸을 비굴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절을 하도록 할 것을 주장하는 측의 입장은 다음과 같았다.
“비록 속세의 용모를 버렸다고 하더라도, 그 일은 출가하는 일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나라를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함께 그 형체를 거울에 비춰 보게 되는 것이므로, 모두가 좋은 풍속을 교화해야 하는데, 어찌 궁궐의 예법에 대항해 저들만이 참다운 자취를 드높인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지존을 업신여기고 나이 많은 이를 얕보는 것은 인륜의 패악입니다. 임금의 신하가 되고 아비를 공경해야만 그 道에 혐의가 없을 것입니다. 마땅히 무릎을 꿇고 절을 하도록 하십시오.”
인도 종교인 불교가 중국에 전파됐을 때, 불교는 전혀 다른 정치적 환경에 직면해야 했다. 중국은 하늘의 천명을 받은 天子인 황제를 중심으로 하는 강력한 중앙권력에 정치제도의 기반을 두고 있었다. 그러한 황제가 권력을 행사할 때는 왕도와 지방의 복잡다단한 통치조직의 도움을 받았는데, 이러한 제도를 뒷받침한 것이 바로 유교였다. 그리고 그 유교가 제도를 뒷받침하는 방식의 핵심 중의 하나는 禮, 곧 올바른 행실규범이었다.


예의 핵심은 통치자인 군주는 통치를 하고, 신하들은 군주를 잘 받들어 섬기며, 아버지는 아버지로서 행동하고, 어머니는 어머니로서 행동하며, 자식은 자식으로서 부모에게 효도하며 공경해 섬기는 것이었다. 이른바 忠과 孝가 유교적 예의규범의 핵심이었으며, 그 예의규범이 가정에서 정상적으로 작동하도록 하는 것이 家法이고, 국가 단위에서 정상적으로 작동하도록 하는 것이 바로 제도였다. 그리고 그 가법과 제도를 주도하는 집단이 바로 유교 고전에 기반을 둔 과거시험을 통해 관료로 채용된 이들이었다. 불교가 중국에서 맞닥뜨린 정치적 환경이란, 바로 이와 같은 유교이념을 근본으로 하는 관료들에 의해 움직이는 국가제도였다.


반면 불교의 핵심을 구성하는 승가공동체와 같은 것을 중국인들은 전혀 접해본 적이 없었다. 불교가 전해진 초기에는 승려들이 황제에게 절을 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와 같은 논쟁은 발생할 여지가 없었다. 불교 승려들의 공동체가 제대로 형성되지 않았던 것이 주된 이유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300년대가 되자 승려들의 숫자가 증가하고, 인도에서 불교 승려 공동체가 어떻게 유지되고 전승됐는지에 대한 좀 더 많은 정보를 얻게 되자 상황은 달라졌다. 승려들은 사회적으로 보다 특별하고 사회로부터 더욱 독립적인 집단이 되기를 희망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유교적 관료주의 입장에서 본다면 승려공동체의 이 같은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천명을 받은 군주다. 때문에 나라 안의 모든 이들을 자양하는 의무와 권리는 군주에게만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승려들이 얻기를 바라는 것은 그러한 군주가 행사하는 통치권의 바깥에 있는 공동체다. 그것은 유교적 이념에 젖은 관료들이 봤을 때는 결코 허용될 수 없는 것이었다. 군주의 통치권 안에 있는 백성은 누구라도 예외 없이 제도에 의해 차별 없는 적용을 받아야 하는 것이고, 만일 승려 공동체 곧 승단에 대해서만 예외를 적용한다면 통치 질서는 무너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사실은 통치 질서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앞에서도 이야기한 바 있지만, 당의 첫 번째 황제인 고조 때 이미 불교에 대한 강력한 공격이 傅奕이라는 대신에 의해 한 차례 행해진 바 있었기 때문이다. 이 부혁이 올린 표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다.
“널리 가람을 설치하니 장려함이 하나 둘이 아닙니다. 工匠을 부려서 오직 泥胡(불상)를 앉힙니다. 華夏의 큰 종을 쳐서 오랑캐 승려들의 거짓 대중들을 모으고, 순박한 백성들의 이목을 움직여서 사사로이 재물을 구합니다. 여공들의 비단은 잘라서 음사의 깃발을 만들고, 솜씨 좋은 장인의 금은은 흩어져서 사리탑에 새깁니다. 찹쌀과 기장, 국수, 멥쌀로는 방자하게 승니들의 모임이나 열고, 향과 기름 그리고 양초로는 그릇되게 호신의 법당을 비추느라 백성의 재물을 착취하고 국가의 저축을 분할합니다. 조정의 귀한 신하들도 일찍 깨닫지 못하니 진실로 애통합니다.”


통치 질서를 무너뜨린다고 비난하지만, 불교가 정면에서 유교적 통치 질서에 대항한 적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그 명분의 이면에 있는 다른 이유가 더 중요할 수밖에 없는데, 이 표문은 그 점을 보여주고 있다. 핵심은 ‘백성의 재물을 착취하고 국가의 저축을 분할한다’는 것에 있었다. 승려들 그리고 사원은 기본적으로 면세의 대상이었다. 뿐만이 아니다. 의무적으로 참석하는 국가행사에서는 오히려 급여의 대상이기까지 했다. 게다가 황제들의 칙령으로 사원을 건설하는 데도 적지 않은 비용이 소모된다.
유교 관료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충분히 비난의 대상이 될 만도 했을 것이다. 경제적인 입장에서 봤을 때, 분명 국가적 손실이라고 추정됐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위에서 언급한 것은 분명 과장이 존재했을 것이다. 공격과 비난을 위해 부풀리는 것은 당연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가 된 것은 사실 경제적 손실만은 아니었다. 북위 시대 이래로 승려들은 느슨하기는 했지만 국가 관료조직에 해당하는 승관제라는 것에 의해 묶여있기도 했다. 승려들을 국가 차원에서 통제하는 관료제도다. 승려들, 나아가 불교 자체를 국가 차원에서 통제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것은 승려들에게도 일정한 권력을 부여하기도 했다. 국가의 제도와 관료조직을 통해서 통치 업무의 일선을 담당하고 있는 유교 관료들의 입장에서 봤을 때, 그것은 다른 한편으로는 권력의 분점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유교적 관료조직 외에도 불교 승려들의 관료조직 역시 존재했던 것이다.


당 조정이 국가적 종교행사에 도교와 불교를 평등하게 대우하려고 힘썼던 것은 이미 앞에서 이야기한 그대로다. 하지만 도교는 불교의 비구와 비구니처럼 도사와 여도사들의 숫자가 많지 않았다. 반면 불교는 승려들의 숫자도 많은 데다 전국 방방곡곡에 사원을 갖추고 있는 것은 물론 그 공동체의 결속력 역시 만만치 않았다. 게다가 곳곳에서 펼쳐지는 사원들의 俗講法會에 참여하는 대중들도 많았다. 한 달에 두 번 정도씩 사찰에서 개최되는 속강법회에는 왕족과 대신 그리고 평민을 가리지 않고 참여하는 분위기가 7세기 중반쯤이면 유행처럼 번져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정한 관료적 경험과 대중적 인기를 동시에 확보하고 있는 존재, 유교적 통치 관료의 입장에서 본다면 자신들을 언제든 대체할 수 있는 적수로 여겼음직도 한 것이다.


도선의 『광홍명집』은 그런 갈등이 한참 표면화됐을 때 등장한 것이다. 4월 16일 절을 하도록 조칙을 내리고, 다시 한 달 남짓 지난 6월 8일에 그것을 취소하는 조칙을 내렸다. 절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조칙이니, 결국은 유교관료들이 당장의 승부에서는 패한 것이다. 조칙을 뒤집기 위해서 승려들은 긴급하게 모임을 개최해 대응책을 모색하는 한편 자신들의 편에 있는 대신들도 동원해 그 부당함을 항소했다. 불교 측의 대응 역시 만만한 것이 아니었던 셈이다. 하지만 임시 대응에 성공한 불교 측의 입장 역시 안심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좀 더 장기적인 대응책이 필요했던 것이다. 결국 『광홍명집』은 그런 장기적인 대응책의 일환이었던 셈이다.


이 같은 사태는 단순히 불교와 유교관료 혹은 불교와 도교 간의 문제로만 비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같은 사태로 경험을 얻어서 장기적인 대응책을 강구했던 것은 불교의 승려들만은 아니었다. 유교관료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좀 더 현실사회에 기반하고 있는 유교관료들의 대응은 다른 방향에서의 효과로 나타나게 된다. 외교 정책에 있어서의 유연성이 강화된 것이나, 당나라 내부의 이민족에 대한 정책을 시행함에 있어서 한결 유연해진 태도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7세기 중엽쯤 장안성에서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소그드 족을 비롯한 중앙아시아 출신의 이민족들이 좀더 쉽게 장안이라는 도시에 적응할 수 있는 계기로 작동했다. 암묵적으로 인정되고 있던 이민족들의 집단 거주지와 이민족들의 종교사원이 점차 좀 더 공인된 형식으로 존재할 수 있게 됐던 것이다. 그러자 더 많은 이민족들이, 더 많은 異宗敎와 사상들이 점차 장안의 한쪽을 구성해나가게 됐다.
이처럼 세계도시로서 장안, 불교도시로서 장안이라는 모습은 일조일석의 역사를 배경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다. 불교와 중국의 유교 전통에 기반한 통치질서 간의 충돌은 적어도 3백여 년 이상 지속됐고, 그 과정을 통해서 불교 측도 중국의 전통 유교관료들도 새로운 방식을 모색해나갔던 것이다. 그 결과의 하나가 다양한 이민족들이, 다양한 문화들이 뒤섞인 세계도시 장안으로 형상화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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