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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력’ 손에 쥐고 서역 풍습 유지 … 胡化와 漢化의 주역으로 활동
‘경제력’ 손에 쥐고 서역 풍습 유지 … 胡化와 漢化의 주역으로 활동
  • 석길암 금강대 불교문화연구소 HK교수
  • 승인 2015.06.10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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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安, 동아시아를 만든 1백년을 성찰하다_ 10. 장안에서 만난 소그드 상인, 그리고 그들의 장안(2)

▲ 당 고종과 측천무후의 릉인 건릉에 세워진 외국인 사절단의 상. 40여 개국을 헤아려다는 주변국가의 조공사절을 황제릉에 조각해놓은 것이다. 사진 중앙에 서역인의 복장이 두드러지게 보인다.

장안 이서지역의 당시 국제어는 소그드어였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정도로 소그드 상인들은 서역 제국의 교역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 서쪽과 북쪽 변경에서 소그드인들이 획득한 이 같은 입지는 자연스럽게 당의 서북 지역 외교의 실무자가 누구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그들이 장안성의 서시를 사실상 좌우할 정도의 경제력을 확보한 것은 이 같은 배경에서 보면 일면 당연한 결과로 읽혀진다.

 

동북에는 涿郡, 서북에는 長安. 수와 당의 두 왕조에 걸쳐 동서 변경 지대의 핵심 요충지로서 역할을 한 곳이다. 잘 알려져 있듯 수 문제로부터 당 고종에 이르기까지 고구려를 공략하는 동북의 전진 기지로 사용된 곳이 바로 탁군, 幽州라고도 불렸던 오늘날의 북경 지방이다. 이 지역은 동쪽의 고구려뿐만 아니라 북쪽의 동돌궐에 대한 방어와 공격의 거점이기도 했다. 반면 장안은 북조 후반기로부터 수·당의 2대에 걸쳐서 서돌궐을 막아내는 방어 거점이자 동시에 서돌궐은 물론 서역지방에 대한 패권을 유지하기 위한 전진 기지로서 기능했던 도시다. 장안은 최초의 통일 왕조인 진의 도읍이었던 것은 물론 역대 왕조의 도읍으로 기능했던 곳이기에 중원의 패권 다툼에 있어서도 상징적인 입지를 지닌 도시였다.
당은 건국 직후에는 장안에 대한 돌궐의 위협을 직접적으로 감당해야 하는 문제로 고심했고, 돌궐을 제압한 정관 연간 이후에도 돌궐을 비롯한 서역 제국을 조율하는 데 많은 관심을 쏟아야 했다. 630년에 당은 동돌궐을 제압했고, 이때 합밀(哈蜜)이 歸附(스스로 와서 복종함)했으며 高昌(오늘날의 투르판)은 왕인 麴文泰(재위 619~640년)가 직접 장안에 와서 복속했다. 이로써 당은 서역 제국과 교통하는 통로를 다시 개척할 수 있게 됐고, 서역과의 교역을 재개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면서 한숨을 돌리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토욕혼과 서돌궐이 흥기하면서 다시 통로가 막혔고, 고창국은 다시 서돌궐에 복속하면서 서역의 상행로를 독차지했다. 이것은 동돌궐을 평정하고 서역로 곧 실크로드를 다시 개통하면서 경제적 그리고 문화적 교류를 확대하는 정책을 취했던 당에게는 또 한 번 타격을 받는 계기로 작용했다. 이에 당은 언기(焉耆)를 통과하는 다른 길을 개척했다. 이에 고창국왕 국문태가 서돌궐에 기대어 당과 서역제국의 통상을 막는 정책을 취했다. 곧 고창국을 지나 당으로 가는 사신을 억류하고 조공품을 빼앗는 한편, 언기를 침략해 당과 서역제국의 교통을 막고, 서돌궐의 포로가 됐다가 탈주해 당으로 돌아가는 한인들을 사로잡아 노역을 시키는 등의 정책을 취했다. 이로써 고창국과 당의 관계는 급속도로 악화됐고, 당으로서는 정치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서돌궐 및 고창국을 제압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에 처하게 됐다. 서역제국과의 교통에서 오는 정치적, 경제적 이익을 포기하는 것은 당의 입장에서는 막대한 손실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639년 당 태종의 고창국 토벌을 위한 출병은 이 같은 배경에서 이뤄졌다. 장기간 고심해 준비한 때문인지, 고창국은 불과 반년을 지나지 않아서 평정됐다. 태종은 642년에 고창국에 안서도호부를 설치해 서역 경영의 의도를 안팎으로 공표했다. 2년 뒤인 644년에는 언기국이 당을 배반하고 서돌궐에 복속한 것을 계기로 언기국과 구자국마저 손에 넣었다. 이로써 당은 서돌궐을 멸망시킨 것은 아니지만 서역로 전체를 온전히 평정하고, 서역제국과의 교통로를 당의 직접적인 지배하에 둠으로써 서돌궐을 서역 통상로에서 배제하는 성과를 달성할 수 있었다. 서돌궐이 다시 이 서역의 통상로에서 준동한 것은 고종 때에 이르러서였으니, 적어도 태종의 정관 연간에는 더 이상 서역 통상로를 위협받는 일은 없었던 셈이다. 그러나 통상로 확보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이를 계기로 서역의 여러 제국들이 서돌궐의 영향에서 벗어나 당에 복속했다는 사실이다.


거듭된 평정을 통해 당은 동서남북으로 광활한 영토와 영향력을 확보하게 되는데 특히 서쪽과 북쪽의 변경경이 그러했다. 기록은 이렇게 전한다. “弱水와 流沙 지역에 나란히 수레를 탄 사신이 왕래하고, 被髮과 左(오랑캐들의 풀어헤친 머리모양과 옷 입는 모양새)을 하던 곳이 모두 의관을 갖춰 입는 지역이 됐으며, 正朔[달력]을 반포하자 도달하지 않는 곳이 없었다.”(『貞觀政要』 권5, 「公平」) “이때 四夷의 대소 君長들이 다투어 사절을 보내서 공물을 바치고 알현하느라 도로에 사절의 왕래가 끊이지 않았으니, 매번 元正의 신년 축하 때마다 항상 수백 수천이었다.”(『資治通鑑』 권 198)
동서남북이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서쪽과 북쪽 변경의 안정이 가장 컸을 것이다. 특히 태종은 서쪽과 북쪽의 변경 이민족들에게 복속 받아, 이들 이민족들로부터 ‘天至尊’ ‘天可汗’ 등으로 불렸다. 天可汗이란 중원식의 天子와 유목민족의 可汗이라는 명칭을 결합한 것인데, 당의 황제 곧 태종은 중원과 서북 이민족을 함께 통치하는 통치자로 인정받았던 것이라 할 수 있다. 647년 철륵부 회홀 등의 추장이 제의해서 회홀이남, 돌궐이북에 길을 열고 이를 參天可汗道라고 이름 붙이길 청하니 태종은 이를 허락한다. 장안에서 서북 이민족과의 접경을 연결하는 이 참천가한도에는 모두 68곳의 역을 둬, 장안으로 향하는 이민족 사절들에게 말을 교환해주고 숙식을 제공했다.


이로써 이미 630년경에 평정해 오로도스 지역에 정착시킨 돌궐을 비롯해 구자와 언기에 이르는 서역 제국과 민족들, 그리고 그 너머 소그드인의 토착지였던 오늘날의 우즈베키스탄 지역까지도 당의 영향권 안에 복속하게 된다. 특히 이 서역 정벌의 성공은 630년에 평정한 동돌궐 정책이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귀순 의사를 표명한 돌궐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를 두고 갑론을박이 벌어졌는데, 의견은 셋으로 나뉘었다.
하나는 그 종족을 나눠서 하남 각지에 분산시키고 한족과 뒤섞여 살면서 농사를 짓고 방직을 하게 하자는 의견이었다. 이른바 漢化 정책이다. 이것은 돌궐을 완전히 한족화시켜서 민족적 정체성을 없애버리겠다는 구상이다. 또 하나는 그대로 변경에서 살게 하되, 부락을 쪼개 분산시켜서 세력을 약화시키는 한편, 종실의 여인을 하사해 복속의 마음을 굳건히 하자는 유화책었다. 그러나 채택된 것은 이 두 가지가 아니라 세 번째였다. 곧 돌궐을 하남의 북부 변경 지역에 안치하고, 그 부락을 보전해서 나라의 울타리로 삼고, 또 그 토속을 버리지 않고 그대로 지키게 해 위로하는 방안이었다.


이 정책을 통해 당 조정이 도모한 것은 첫째는 인구가 적어서 텅 비어버린 지역을 채우는 것이었고, 둘째는 의심하는 마음이 없음을 대외에 보여주는 것이었다. 물론 이 정책은 세 가지 점에서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돌궐이 가지고 있던 군사력을 손실 없이 흡수할 수 있었다는 것, 그 군사력을 그대로 사방의 오랑캐를 제압하는 데 활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국력의 손실을 줄일 수 있었던 것, 서역 여러 나라들의 복속을 좀 더 쉽게 이끌어낼 수 있었다는 것이 그렇다. 아사나사이와 계필하력이 돌궐 기병 10만을 이끌고 태종의 서역 정벌에 동참했던 것은 그러한 정책적 성공의 연장에서 이뤄진 일이었다.
어쨌든 당 태종의 서북 이민족에 대한 이런 포용정책은 서쪽과 북쪽 변경의 이민족을 포섭하는 데는 큰 효과를 거뒀던 것 같다. 당 태종은 당 조정에 적극 협력하는 소수민족 상층 계급들과 적극적으로 혼인관계를 맺었고, 공을 세우는 경우에는 그 치하함이 한족 출신 공신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고 한다. 이 같은 점은 역시 북위 시대 무천진 군벌 시대 때부터 형성된 한족과 오랑캐를 구분하지 않고 동고동락을 같이한다는 무천진 군벌 특유의 사고방식이 발휘된 결과라 할 것이다. 오랑캐의 습속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도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대우를 받는 이민족 곧 한족에게 오랑캐로 불리는 이들의 입장에서는, 그것은 전혀 다르게 다가온다. 한족 왕조 안에서 함께 공신이 되고 함께 부귀와 공명을 누린다, 말은 쉬운 것이지만 현실에서 그것은 쉽게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대내에 부족 단위로 정착한 이민족, 변경의 바깥에서 당의 기미정책에 의해 복속한 이민족, 그리고 한족들 사이에 균형을 이루는 정책을 큰 말썽 없이 지속한다는 것은 복잡다단한 대응을 필요로 할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그들 집단이 모여서 부족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는 특성 때문에, 집단 혹은 수장이 불만을 느끼게 되면, 그것은 내부의 붕괴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동일성’ 의식보다는 ‘이질성’
의식이 더 쉽게 부각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동일한 민족이 대내와 대외로 나뉘어져 있다거나, 다른 민족이라고 할지라도 이웃해 있는 경우 등에도, 처우가 다르면 이 ‘다름’에 대한 그럴 듯한 이해는 필수적이게 된다. 크게는 정책 기조의 문제이지만, 작게는 행정 일선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부각된 것이 소그드인이다. 소그드인들은 돌궐이 수·당의 서쪽과 북쪽 변경의 강자일 때부터 이미 돌궐이 지배하는 지역의 경제정책에 깊이 관여한 바가 있었다. 더욱이 북주 시대부터는 중국 내륙의 장안은 물론 산서성과 하북성 그리고 낙양까지 진출해서 상업활동을 벌여 오고 있었다. 그들이 진출하지 않은 곳이라고는 강남밖에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소그드인들의 상업교역은 강북의 낙양 이서지역에서는 이미 꾸준한 것이고 또 흔한 것이었다.
당대 장안성 안의 상업활동은 아무래도 東市와 西市라는 두 개의 시전 지역을 중심으로 움직였을 것이다. 그런데 대체적으로 동시보다는 서시가 더 활발했다고 전해지는데, 그것은 시장에 존재했던 점포의 다양성은 물론, 동시가 있었던 주작대로 동쪽 지역들이 귀족들과 관료들의 밀집 지역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서시에서 주로 활동한 이들이 바로 소그드인으로 대표되는 중앙아시아 출신의 호상과 페르시아 그리고 대식국 출신의 상인들이었다. 특히 이익이 있으면 가지 않는 곳이 없다고 평해졌던 소그드인들이 서시의 주역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당이 건국된 지 4년여밖에 되지 않는 무덕 4년(621년)에 이미 소그드 상인을 관리하는 기구인 薩寶가 서시 바로 인근에 설치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서시와 薩寶와 인접한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외국 사절 접대 관청인 홍려시가 있었다. 당 말기가 되면, 장안성 안에 소그드인들의 종교 곧 조로아스터교 사원인 祠가 이 서시 주변에만 네 곳이나 들어섰을 정도였다. 그만큼 소그드 상인들이 밀접한 지역이 이 장안성의 街西 지역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무엇보다도 주목되는 것은 홍려시의 업무다. 홍려시는 四夷의 빈객에 관한 제반 사항을 처리하는 것이 주된 업무였다. 사절만이나 아니라, 당에 귀화했지만 蕃에 있는 사람의 이름과 숫자에 대한 관리, 조공과 연회 환송 등 사절단으로 온 각각의 민족에 대한 등급의 판정과 공적 대응, 사절이 귀환할 때 하사품의 관리 등 다양한 일들을 맡고 있었다. 사절단에 관련된 혹은 당의 번국에 속하는 모든 관련 사항이 이 부서의 업무로 관장되고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홍려시 특히 典客署는 외국 사정을 잘 아는 이들을 필요로 했을 것이고 거기에 부응한 이들이 바로 소그드 상인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소그드인들은 북조 말기부터 이미 돌궐 사회에 깊숙이 진입해 돌궐의 경제 활동에 중요한 역할들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북조 말기부터 당 초기에 이르기까지 중원 내부의 세력을 위협하는 것은 늘 돌궐이었다. 돌궐을 거의 평정했다고 할 수 있는 당 태종의 정관 연간까지도 당의 첫 번째 위협은 언제나 돌궐이었다. 그리고 사실은 당의 서북 변경으로의 확장 역시 돌궐의 귀순과 돌궐의 토벌이라는 하나의 과정에 연동돼 있었다. 그런데 그런 돌궐인들의 문자와 언어는 모두 소그드어와 소그드 문자를 모태로 하는 것이었다. 돌궐의 위협이 아주 클 때도, 그리고 그 돌궐이 복속해왔을 때도, 그 돌궐과 통할 수 있는 존재들 중에 가장 손쉬운 집단은 바로 소그드인이었던 셈이다. 또한 돌궐 내부의 경제권을 쥐고 있는 이들 역시 소그드인들이었기 때문에, 수나라가 됐든 당나라가 됐든 외국 사절을 접빈하는 업무에서 가장 중요한 외국의 사절은 역시 돌궐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소그드인들은 대립하고 있는 두 세력을 매개하기에 가장 적절한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이런 가운데 태종이 天可汗이 되고 서쪽과 북쪽 변경의 각지 각 민족을 연결하는 참천가한도가 개통되면서, 사절단의 왕래는 더욱 왕성해졌다. 교역이 성해졌음은 두말 할 것도 없다. 그런데 그들 각 서쪽과 북쪽 변경의 여러 민족들은 당에 복속하기 전에만 하더라도 돌궐의 영향권 아래 속해 있었다. 그리고 그들 제 민족과 돌궐을 매개하는 역할을 한 것 역시 소그드인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장안 이서지역의 당시 국제어는 소그드어였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정도로 소그드 상인들은 서역 제국의 교역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 서쪽과 북쪽 변경에서 소그드인들이 획득한 이 같은 입지는 자연스럽게 당의 서북 지역 외교의 실무자가 누구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바로 소그드인들이었던 것이다. 그들이 장안성의 서시를 사실상 좌우할 정도의 경제력을 확보한 것은 이 같은 배경에서 보면 일면 당연한 결과로 읽혀진다.
그리고 큰 경제력을 갖고 있었다는 것은 당연히 문화적 영향력도 행사하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더욱이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태종 이후 당 조정은 이민족들로 하여금 중국 내부의 각지에서 집단을 이루고 자신들의 신앙과 풍속을 유지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었다. 이러한 정책에 따라 장안의 서쪽 지역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던 소그드인들을 중심으로 한 서역의 생활풍습이나 먹거리 등이 장안성의 별경으로 존재할 수 있게 됐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먹거리와 풍습은 장안성 사람들의 삶에도 영향을 미쳤다. 반대로 서북의 이민족들이 중국 내지로 진출하면서 자연스럽게 중국인들의 풍습과 문화를 받아들이거나, 혹은 그들의 풍습이나 문화를 중국적으로 변화시키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이것을 중국의 역사가들은 漢化라고 부른다. 이와 달리 장안을 비롯한 중국 내지에 진출한 호인들의 풍습을 중국인들이 즐기고 채용하는 것을 胡化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漢化와 胡化라고 하는 용어는 동시대의 풍속 변화를 일컫는 말로 사용된다. 바로 당 태종의 정관 연간부터 시작돼 당 말기까지의 풍속 변화를 지칭한다. 그리고 그러한 胡化와 漢化의 주역으로 활동했던 이들이 바로 소그드 상인들이었다.
정관 연간으로부터 한참이 지난 8세기 후반이 되면 새로운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소그드인들이 당 내부 각지에서 집단 거주지와 조로아스터교 사원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것처럼, 신라인들이 당의 서해 연안과 수로의 요지를 중심으로 신라인들의 마을인 신라방을 이루고, 그 신라방의 사람들을 위해 신라인의 사찰 곧 신라원이 세워진 것이다. 소그드인 집단거주지 ???祠와 매우 유사한 입지와 활동 모습을 보이는 것인데, 아마도 비슷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석길암 금강대 불교문화연구소 HK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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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 2015-06-16 12:01:10
불교 만세!!!!!!!!!!!!!!!!! 천황복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