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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 권위 다지기 위한 수단으로 ‘불교 수용’ … 사회시스템 전면 수술도 의미
황제 권위 다지기 위한 수단으로 ‘불교 수용’ … 사회시스템 전면 수술도 의미
  • 석길암 금강대 불교문화연구소 HK교수
  • 승인 2015.02.03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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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기획: 長安, 동아시아를 만든 1백년을 성찰하다 02. 수 문제, 아소카의 정치적 후예를 자처하다?

▲ 수 문제가 세운 인수사리탑(남경 섭산 서하사 소재)

북조 불교는 친서민, 남조 불교는 귀족적
거대한 교역시스템 때문에 돌궐도 불교 수용한 듯
북조 국가들 불교 적극 장려했지만 폐해 만만치 않아
불교의 전면적 폐기는 남조 아닌 북조에서 발생

중국인들은 불교를 달리 像敎라고도 부른다. 불보살의 像을 신봉하는 것을 가리켜 불교를 지칭한 이름이다. 불교를 像敎라고 부르는 중국인들의 이 같은 인식은 확실히 명분 혹은 도리를 가르친다고 해서 유교를 名敎라고 부르는 것과 대비된다. 남북조 시대를 기준으로 말한다면 남북의 불교 중에 이 상교라는 명칭에 더 부합하는 것은 확실히 북쪽의 불교였다. 남조라고 해서 불보살상을 봉안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불보살상의 규모나 숫자의 측면에서 남조 불교의 성세는 북조의 그것에 비할 바가 되지 않았다. 그것은 사찰의 숫자나 승려의 숫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양현지(楊衒之)가 지은 『洛陽伽藍記』에서는 북위 시대 낙양 불교의 성세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京師는 동서로 20里이고 남북으로 15里인데, 호수가 10만 9천여이고, 종묘와 사직 및 宮室과 관청 이외에 사방 삼백 보가 1里가 된다. 里에는 4개의 문이 있고, 門에는 里正 2인과 使 4인, 門士 8인을 배치했다. 합하여 220의 里가 있었는데, 사찰이 1천367개소였다.”
10만 9천호가 살고 있는 도시에 사찰만 1천367개소이니 가히 그 성세를 엿볼 수 있다. 양현지는 북위 시대의 도읍이었던 낙양성 내외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런데 북위는 평성에 도읍을 두고 있을 때는 운강석굴을, 낙양으로 천도한 후에는 龍門石窟을 개착하고 있다.


서역에서는 불교가 전래되던 초기부터 불교석굴이 개착되기 시작했고, 중국에 불교가 융성해진 이후에는 중국 내부에도 점차 석굴이 개착되기 시작한다. 중국 내부에 개착된 불교석굴의 대부분은 북조에서 이뤄진 것이었다. 이 석굴들은 서역지방에서는 선정수행을 위한 수행굴로 그리고 예경을 위한 예배굴로 개착된 것이다. 그러나 중국 내지로 이동하면서 점차 예배굴의 성격을 더 강하게 띄게 된 것으로 생각한다. 거기에 더해 운강석굴 경우처럼, 함께 조성되는 대불들에 왕의 모습이 투영되면 그 자체로서 왕과 국가의 권위를 상징하게 되기도 한다. 서역으로부터 섬서성과 산서성 그리고 요서지역에 이르기까지, 남쪽으로는 하남성에 이르기까지 이런 석굴과 대불이 조성됐다. 반면 강남에서는 이 같은 석굴의 조성은 그리 활발하지 않았다. 근본적인 요인은 토질이 석굴을 개착할 만큼 무르지 않았기 때문이었겠지만, 한편으로는 북조에서만큼 불보살상의 造像이 활발했는가의 문제도 있을 것 같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북위의 낙양에는 1천367개소의 사원이 있었다. 이와 달리 남조의 建康(오늘날의 南京)은 28만호 곧 낙양의 세 배에 이르는 인구규모였지만, 사원의 수는 낙양의 반 정도인 700여 개소가 있었다고 한다(『辨正論』 「十大奉佛」편). 물론 사찰 수의 많고 적음이 불교의 성세를 그대로 반영한 것은 아니며, 오히려 북조불교와 남조불교의 특성을 반영한 결과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남조의 불교가 學理를 중시한 것에 비해 북조의 불교는 信行을 좇았다는 기풍의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신행을 중심으로 하는 북조불교의 기풍은 아무래도 일반 서민들도 쉽게 믿고 이해할 수 있는 형태였다. 때문에 남조불교의 사원 건설이 대부분 士族 계층의 주도로 이뤄졌던 것과 달리, 북조의 사원건설에는 평민의 참여 역시 두드러질 정도였다. 북조 낙양이 남조 건강보다 인구는 3분의 1에 불과한데, 사원 숫자가 오히려 두 배에 가까운 것은 이러한 기풍의 결과였다. 북제 시대에는 그것이 더욱 심해졌다. 곧 『續高僧傳』 「靖嵩傳」에 의하면, “高齊(北齊)가 불교를 중흥해 성행하는 동안 수도에 큰 사찰이 4천여 곳을 헤아렸고, 주석하는 승려는 8만에 이르렀으며, 講席이 열린 것은 200여 차례였고, 항상 와서 듣는 사람은 1만 명이 넘었다. 때문에 寓內의 영걸이 모두 그 나라로 모였다”라고 한다.


여기에서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이것이 단순히 기풍의 차이 때문인가 하는 점이다. 필자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여기에는 불교를 대하는 지배계층의 인식이 전혀 달랐다고 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북조의 불교는 전형적인 국가불교였다. 국가 차원에서 도성은 물론 각지의 중심지는 물론 소읍에 이르기까지 사원의 설치와, 승려의 숫자까지 관리했다. 좀 심하게 말하면 관청의 숫자만큼 사원이 설치되는 것이며, 여기에 더하여 불교를 신앙하는 상하의 계층이 모두 사원의 건설과 불상의 조성에 나섰으므로, 사원의 숫자는 더욱 많을 수밖에 없는 구조였던 것이다. 게다가 북위시대부터는 義邑이라는 민간의 불교신앙공동체가 크게 확산된 것도 한몫했다. 주로 불상 조상이나 사원과 탑의 건립을 목적으로 결성된 義邑은 邑師라고 불리는 승려가 법사로서 지도했다. 전국단위의 국가불교적 불교교단 관리체계와 義邑이라는 민간신앙결사가 결합하면서, 북조의 불상 조상과 사원 및 불탑의 건립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던 것이다.


이에 반해 남조의 불교는 국가불교라고 말하기보다는 오히려 귀족불교라는 것이 더 타당하다. 귀족의 취향이 반영될 수밖에 없었고, 신앙 못지않게 불교에 대한 學理的 탐구가 중시됐다. 남조 역시 法社라는 민간결사가 있었는데, 지계와 독경 그리고 교의에 대한 담론을 중심으로 한 것이었다. 불교의 기풍이 다르니, 자연히 북조에 비하면 불상의 조상도 사원의 조성도 적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신앙으로서의 불교와 학문으로서의 불교가 낳은 차이라고도 할 수 있다. 어느 쪽이든 중국의 새로운 사조로서 불교를 발전시키는 데는 중요한 것이지만, 불교의 전파라는 측면에서는 큰 차이가 있다.


그럼 북조는 왜 그렇게 불교의 전파에 열성적이었을까. 北周(557~581)와 北齊(550~577) 시대에 흉노의 한 갈래로, 중국의 북방과 서역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차지하면서 강성한 세력을 자랑했던 돌궐에 대해, 북주와 북제가 어떻게 대했는가를 보면 그 이유의 일단이 보인다.


북주의 태조는 돌궐의 大可汗과 大伊尹尼를 위해서 突厥寺라는 절을 세웠다. 북제의 後主(재위 565~577)는 劉世淸에게 명해서 『열반경』을 돌궐어로 번역해 돌궐왕에게 바쳤다. 이것은 돌궐의 거듭되는 조공에 대한 답례이기도 했지만, 돌궐인을 불교화하려는 책략이기도 했다. 돌궐왕 鉢可汗에게 붙잡힌 북제의 승려 惠琳은, 가한에게 북제가 융성한 까닭이 불교를 믿기 때문이라고 말해 부국강병을 위해 불교를 이용할 것을 권했다. 이에 가한은 불교를 신봉하게 됐다고 한다(『隋書』 「列傳」49, 北狄). 이를 단순하게 말하면 불교화 혹은 교화라는 명칭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혜림이 북제가 융성한 까닭으로 불교를 믿기 때문이라고 답한 것은 단순하지 않다. 혜림의 말은 승려로서는 당연한 대응인 것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돌궐의 가한이 그것을 받아들이고 불교를 신봉하게 됐기 때문에 단순하게만 볼 수 없다. 북제 곧 중원의 북쪽 왕조들이 융성한 이유에 대한 혜림의 설명에 돌궐의 가한이 수긍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돌궐의 가한은 왜 수긍했을까. 우선적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북조의 통치체제와 긴밀하게 결합돼 유기적으로 보완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국가불교의 기능을 생각할 수 있다. 막 새롭게 등장한 신생세력은 내부적으로 체계가 정비돼 있지 않았을 것이고, 그런 면에서 국가불교의 체제는 돌궐의 가한에게 매력적으로 보였을 법하다.


또한 서북 지역에 새롭게 등장한 강적에게 북주와 북제 모두 불교를 권했다는 것 역시 고려해야 한다. 돌궐이 새롭게 등장한 강적이라지만, 북주와 북제 역시 새로운 왕조라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북주와 북제의 입장에서 돌궐이라는 새로운 강적은 위협일 뿐이다. 대응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더 강력한 적으로 성장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이미 강력한 세력으로 등장한 돌궐이 더 이상 적대적인 입장에 서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북주와 북제가 택한 것은 두 번째 방법으로 보인다. 북주와 북제 역시 내부적으로 안정되지 않은 시기였기 때문에 무력을 투사하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고, 그렇다면 다른 방법을 대안으로 내놓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대안은 충분히 받아들일 만한 것이어야 했다.


반면 돌궐의 가한으로서는 자신의 영역 안에 복속된 불교도들을 포섭하는 한편, 그것을 기회로 국가체제의 정비를 이룰 수 있어야 했다. 다만 그것은 북주와 북제의 조공을 넘어서는 정치적·경제적 가치 역시 담보하는 것이어야 했을 것이다. 혜림의 설득만으로 불교를 신봉하게 됐다는 것은 통치자의 입장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설명이다. 그렇다면 불교에 그럴만한 무엇인가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필자는 그것을 당시 불교세계에 존재했던 거대한 교역시스템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당시의 불교세계는 인도는 물론 인도의 서북부 곧 오늘날의 파키스탄과 아프카니스탄으로부터 중국의 남북은 물론 중앙아시아 스텝지대까지 포함하는 거대한 영역을 아우르고 있었다. 부분적으로는 불교를 받아들이지 않은 민족이나 지역들이 존재했겠지만, 동서교역의 핵심을 장악하는 강대한 세력들은 대부분 불교국가였다. 곧 불교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돌궐이 좀 더 원활하고 쉽게 그러한 동서 교역시스템에 참여하는 방법 중의 하나가 바로 불교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흔히 북조는 오랑캐의 왕조라서 백성들마저 힘들었을 것이라고 착각하기 쉽다. 하지만 북조의 백성들은 국가에서 전국적으로 건립하고 조성한 寺塔과 불보살상 외에도, 자발적인 결사를 통해서 그에 못지않은 숫자의 불상과 사탑을 조성하고 있다. 단순한 신앙심만으로 가능한 일은 아닌 것이다. 무엇보다도 경제력이 뒷받침돼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북조의 국가들은 漢代부터 한족국가들이 탐냈던 동서교역 시스템의 핵심지역을 장악하고 있었고, 그것은 막대한 부의 축적과 분배를 가능하게 하는 배경이었다. 다시 말하면 남조의 경제력은 士族들에게 집중돼 있었지만, 북조의 경제력은 지배층뿐만이 아니라 서민층에게까지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북조의 국가불교체제는 정치적 시스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경제순환의 시스템이기도 했었던 것이다. 그런 북조국가의 시스템에서 그리고 동서교역시스템에서 불교는 윤활유 같은 존재라는 핵심을 파악했기에, 돌궐의 가한은 불교를 신봉하기로 결정했다고 보는 편이 좀 더 타당할 것이다.


하지만 불교가 북조의 국가들에게 반드시 긍정적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북조의 국가들이 불교를 적극 장려했던 만큼 폐해도 만만치 않았다. 불교의 전면적인 폐기가 남조가 아닌 북조에서만 일어났다는 것은 그 방증이다. 그래서 魏收(506~572)는 『魏書』 「釋老志」의 불교사를 기술하는 마지막 부분에서 “魏가 천하를 차지한 후 선양하기까지 중국에 많은 불경이 유통돼 모인 것이 대략 415部이고 합해서 1천919권이다. 正光年間(520~524) 이후 천하에 근심이 많고 公役이 더욱 심해졌다. 이에 백성들은 다투어 佛道에 들어가서 잠시 사문을 모방했는데, 실은 公役을 피하기 위해서였기에 극히 猥濫돼졌다. 중국에 佛法이 들어온 이후 아직 이런 일이 없었다. 대략 계산하니 승려가 200만이고, 사원은 3만여 곳이었다. 시류의 폐해가 그칠 줄 모르는 것이 이러하니, 식자가 탄식하는 바이다.”라고까지 말했다.


위수의 말에는 북조에 사원과 승려의 수가 많았던 이유가 적시돼 있다. 국가의 공역 곧 세금을 피하는 도피처로서 승려 신분과 사원이 악용됐던 것이다. 북위시대의 또 다른 특징 중의 하나가 바로 불교반란이다. 평성시대보다 낙양시대에 불교반란은 더욱 잦아지는데, 불교교단이 확대되고 팽창한 만큼 반란이 더 많아진 셈이다. 물론 북위가 쇠퇴기에 접어들면서 통제력이 약화된 영향이 컸겠지만, 그것만으로 설명하기 쉽지는 않다. 관료체제에 의해 지배되는 사원과 국가특권 계급으로서의 僧官이 등장했다는 것은, 그리고 동시에 불교의 양적 팽창이 이뤄졌다는 것은, 동시에 거기에 수반해 특권에서 소외된 다수 승려의 양산과 비대해진 관료체제와 그로 인해 발생하는 타락에 비판적인 지식인의 동조를 부르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북주와 북제가 북위의 국가불교체제를 계승한 이상, 그러한 부조리한 사태가 수반되는 것 역시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수문제는 그러한 북조의 계승자였던 만큼, 북조의 국가불교체제가 지닌 폐해 역시 잘 알았을 것이다. 게다가 수문제는 사치와 낭비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실용적인 기풍을 좇는 인물이었다. 그런 그에게 있어서 북조의 국가불교체제를 그대로 가져온다는 것은 내키지 않는 사태였을 것이다. 그렇다고 국가불교체제가 가진 장점을 버리기도 쉽지 않았다.


이처럼 북조의 국가불교를 변화시켜 새로운 기풍을 조성할 필요성에 당면했을 때, 그가 눈을 돌린 것이 바로 양무제의 아소카 왕 차용정책이다. 다만 화려한 정책이 아니라 실질적이면서 단호하고 전국적인 방식이 필요했다. 그것이 인수 원년과 2년, 4년의 세 해에 걸쳐서 이뤄진 인수사리탑의 전국적인 건립이다. 첫해에는 남쪽 지역을 중심으로, 그리고 둘째 해와 셋째 해에는 장안과 낙양을 비롯한 북쪽 지역에 더 비중을 뒀다. 다만 사리탑은 너무 크지도 않았고 너무 작지도 않았다. 황제가 건립한 사리탑은 크기에 있어서도 비용에 있어서도 일종의 기준점이 됐을 것이다. 어떻게 일종의 경고이기도 한 셈이다. 이렇게 수문제의 달마 아소카 차용은 황제로서의 권위를 확고히 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2백여 년 동안 북조의 사회시스템으로 작동했던 국가불교체제에 대한 전면적인 수술이기도 했다.

■ 2회에 걸친 수문제 관련 원고에는 주경미 선생의 논문 「중국 고대 황실발원 불사리장엄의 정치적 성격-역성혁명의 선전물로서의 진신사리공양-」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석길암 금강대 불교문화연구소 HK교수
동국대에서 원효대사에 관한 연구로 석사와 박사과정을 마쳤다. 한국불교연구원 전임연구원을 역임했으며, 주요 논문에는 「금강삼매경의 성립과 유통에 관한 연구」 등이, 저서로는 『불교, 동아시아를 만나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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