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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질서에 편입하려했던 신라의 꿈과 煬帝의 패권 정책이 만났을 때
동아시아 질서에 편입하려했던 신라의 꿈과 煬帝의 패권 정책이 만났을 때
  • 석길암 금강대 불교문화연구소 HK교수
  • 승인 2015.03.17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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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安, 동아시아를 만든 1백년을 성찰하다_ 05. 장안에서 한강까지, 세계질서에 참여한다는 것의 의미

▲ 서안 대당서시 전시관 앞에 일본이 복원해 설치한 遣隋船 모형. 실제 일본이 견수사와 견당사 파견에 활용했던 배들은 ‘백제선’ 혹은 ‘신라선’으로 불리던 것으로, 이 모형은 ‘신라선’ 혹은 ‘백제선’의 복원모형이라고 볼 수 있다.

양제는 아버지 수문제를 뛰어넘는 업적을 세우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을 것이다. 그 과욕은 동쪽을 향했다. 결정적인 계기의
하나는 그가 장성을 순행하면서 계민가한을 방문했을 때 마련됐다.

지난 호에서 수양제의 대운하 사업이 장기적으로 동아시아 사회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 살펴봤다. 그런데 대운하 사업이 장기적으로는 이른바 ‘中華世界’의 형성과 유지에 긍정적인 것이었지만, 이 대운하 사업이 가능했던 외부적 요인 역시 고려할 필요가 있다. 대운하 사업이 국력과 인력의 과도한 소모를 낳았다는 것은 두말 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그 이면을 생각해보면 그만큼의 국력과 인력을 소모할 만큼의 여유가 있었다는 이야기도 된다.


수양제의 치세에 그것이 가능했던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로 우선 서북 지역의 안정을 들 수 있다. 남북조의 말기 곧 隋가 창업할 무렵만 하더라도 강북의 왕조는 허약하기 짝이 없었다. 북위가 西魏와 東魏로 나눠지고, 그 서위와 동위는 다시 北周와 北齊에 의해 대치되면서, 이들이 강북의 패권을 다퉜다. 이때, 북쪽의 몽골 초원 지대를 장악하고 있던 나라가 바로 돌궐이다. 돌궐은 남북조 시대의 말기, 陀鉢可汗이 지배하던 시기에 그 세력이 절정에 이르렀다. 그 힘이 워낙 강성해서 타발가한 시절의 北周와 北齊는 돌궐의 朝貢國이 돼 경쟁적으로 조공할 정도였다. 타발가한이 “나에게는 중국 황제인 효자가 둘이나 있으니, 가난의 걱정은 없다”라고 큰소리 칠 정도였으니 위세를 짐작할 만하다.

그러나 돌궐의 강성은 한 세대를 넘어서지 못했다. 탁발가한이 죽자마자 권력쟁탈전이 벌어지면서 그 강성하던 돌궐이 동서로 양분되고 만다. 기회를 노리고 있던 隋 文帝는 상황을 역전시켰다. 변경의 한쪽을 안정시킬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東돌궐의 啓 民可汗을 적극 후원해 西돌궐을 멀리 내쫓고, 東돌궐을 朝貢國으로 삼았다. 한 세대가 지나지 않아 정반대의 형국이 됐다.


문제를 이어 왕위를 차지한 수양제 시절, 거란이 長城을 넘었을 때, 수양제는 계민가한에게 東돌궐의 군대로 하여금 거란을 공격하도록 명을 내렸다. 이때 거란에 승리한 계민가한은 스스로 隋의 조정에 들어와 복속했으므로, 수양제는 장성을 순행할 때 이 계민가한을 行宮에 초대할 정도였다. 문제와 양제 시절의 隋가 서북 주변의 諸國들에 대해 얼마나 확고한 국력의 우위를 확보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게 하는 부분이다. 또한 북조를 계승한 隋의 입장에서 보면 실로 오랜만에 내치에 전념할 수 있는 여유를 얻게 된 것이기도 하다.


문제는 文帝를 계승한 아들 煬帝의 지나친 자신감이었다. 아마도 그는 아버지 文帝를 뛰어넘는 업적을 세우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을 것이다. 그 과욕은 동쪽을 향했다. 결정적인 계기 중의 하나는 양제가 장성을 순행하면서 계민가한을 방문했을 때 마련됐다. 마침 고구려의 사신이 계민가한을 방문했을 때라, 계민가한은 고구려 사신의 내방을 양제에게 알렸고, 양제는 고구려가 복속하지 않으면 계민가한을 이끌고 고구려를 정벌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北史』 「高句麗傳」의 기록은 이때의 정황을 다음과 같이 알려준다.


“煬帝가 대를 잇자 천하가 번창했다. 高昌王과 돌궐의 계민가한이 나란히 와서 조공을 바쳤다. 그래서 元(고구려 陽王, 재위 590~618)에게 입조하라 하니, 元이 두려워하며, 藩臣으로서 갖춰야 할 예를 자못 갖추지 못했다.”
이 기록은 그 배경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文帝 이후 계민가한의 東돌궐은 隋의 동아시아 패권 정책에 서북의 민족들이 복속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과 같은 존재였다. 그런데 그러한 수의 패권을 확인하는 자리에, 그 패권을 부정하는 또 다른 강자인 고구려의 사신이 나타난 것이다. 이미 文帝의 침입을 물리친 바 있는 고구려로서는 수의 압력을 완화시킬 방법이 필요했을 것이다. 고구려 사신의 방문은 수의 압력에 대항하기 위해 동돌궐의 계민하간과 연합하려는 의도였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계민가한이 고구려의 사자가 왔음을 양제에게 알렸다는 것은 연합의 거절을 의미한다.


돌궐은 이미 동서로 분열돼 약화된 상태이고, 게다가 대운하를 통해 후방의 물류를 정비해 서북에 대한 안정적인 지원책을 확보한 隋의 정국으로 보았을 때, 그러한 隋를 적으로 돌려세운다는 것이 계민가한으로서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언제든 휘두를 수 있는 곧추세워진 칼날이 자신을 향한 형국이었다. 되도록 그 칼날을 피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고, 옛 영광도 살아남아야만 되새길 수 있는 것이 아닌가. 東돌궐은 물론이고 高昌國을 비롯한 서역제국들은 문제와 양제의 2대 동안 강성해진 隋에 정면으로 맞서기보다는 그 칼날을 돌려세우기를 원했다. 어찌 보면 고구려는 그 칼날을 대신 맞아줄 절호의 출현자였던 셈이다. 계민가한이 망설이지 않고 양제에게 고구려 사신의 내방을 알린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양제로서는 기세가 등등해질 만하다. 서북 변경을 위협하던 세력은 확실하게 복속하고 협력까지 약속해온 상태였다. 더구나 문제의 효율적인 통치 덕분에 수나라 내부는 안정적인데다 국부까지 축적된 상태였다. 그 와중에 고구려 정벌의 후방 군수 지원 역할을 하는 물류 시스템 곧 대운하까지 거의 완공돼 가고 있었다. 움직이기만 하면 고구려를 제압할 만하니 자신에 차서 고구려의 왕이 와서 조아리는 번신의 예를 요구한 것이다.
그렇다면 양제가 굴복하기를 바라는 三韓 곧 東北의 형세는 어떠했을까. 4세기 말 고구려는 불교 공인(372년)을 계기로 국가체제를 전면적으로 재정비한다. 이것이 소수림왕 때인데,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재위 391~412년, 재위시의 호칭은 永樂大王) 곧 광개토대왕은 이 소수림왕과 고국양왕 2대의 20년에 걸친 체제의 정비를 바탕으로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고 세력 확장에 나선다. 그 광개토대왕의 뒤를 이은 것이 바로 長壽王(394~491년, 재위 412~491년)이다.


광개토대왕의 영토 확장이 그 이름에서 이미 드러난다면, 그의 치세는 ‘永樂’이라는 연호와 재위시의 호칭에서 확연히 표현된다. 고구려가 안정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 확보가 절대명제였던 것이다. 장수왕은 아버지인 광개토대왕의 명제를 다른 방향으로 추구했는데, 남진정책이 그것이다. 고구려의 서북 변경은 중원과 초원지대의 유목민족들 간의 세력교체가 잦은 곳이었으며, 세력의 성쇠 또한 급격했던 지대였다. 이런 서북 변경의 세력에 맞서려면 후방 곧 한반도의 배후세력의 안정화가 절대 필요할 수밖에 없다. 남진정책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서진정책을 위한 배후정비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정책의 의지와 성과를 담고 있는 것이 바로 광개토대왕릉비다.


하지만 이러한 고구려의 대외전략은 백제와 신라에게는 심각한 위협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팽창하는 고구려의 역량을 각기 대응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두 나라의 대응이 바로 羅濟同盟이다. 이 나제동맹은 100여 년을 유지됐는데, 거꾸로 말하면 그 100년 동안 고구려는 계속해서 강성함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달리 말하면 서북으로는 북위, 몽골 지역의 유목국가들과 대치와 협력을 반복하고 있었고, 남쪽으로는 신라와 백제를 압박하는 형세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534년 北魏가 동서로 분열되면서 북중국과 북방 초원 지대는 또 다시 힘겨루기에 들어가게 된다. 고구려의 입장에서는 한숨을 돌릴 수 있는 상태가 된 것이다. 서북의 외부세력이 분열된 덕분이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100년의 긴장이 이완된 까닭이기도 했을 것이다. 이 틈을 파고든 것이 바로 신라다. 100년을 유지한 나제동맹의 말기에 불교를 공인하는 과정을 통해서 왕권을 강화하고 내부를 정비한 신라는 이 과정에서 결속된 힘을 외부로 투사했다. 나제동맹을 활용해 한강유역을 차지한다. 551년에 백제와 협력해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던 한강 유역을 함께 점령했던 것이다. 그러나 진흥황은 2년 뒤인 553년 백제가 차지한 한강 하류지역마저 차지해버렸다.


왜 좀 더 동맹을 유지하지 않았을까 의문시할 수도 있지만, 신라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당연한 선택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한강 하류 지역이 지니고 있는 지리적 입지 때문이다. 중국과 한반도 그리고 일본으로 둘러싸인 동아시아 지중해에서 한강 하류 지역 곧 오늘날의 경기만 일대는 지역 간 물류 교통의 핵심거점에 해당했기 때문이다. 중국 연안에서 출발한 배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물길과 바람길에 의해서 황해를 가로질러 이 경기만(한강 하류 지역)에 닿게 된다. 이 지역을 거쳐서야 다시 한반도 각지와 남해를 돌아 일본으로 가는 항로가 연결된다. 마찬가지로 이 지역에서 출발한 배들은 산동성 등주 일대부터 강소성 항주 앞바다에 도착하게 된다. 고구려와 백제에 가로막혀 중국과 직접 교통할 수 없었던 신라로서는 그 천혜의 거점이 주는 유혹을 떨쳐낼 수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그 지역을 장악함으로써 고구려와 백제의 연결마저도 차단할 수 있다는 정치적 셈법도 중요했을 것이다.


동아시아 지중해의 물류교통 핵심거점인 지역, 곧 한강 하류 지역을 장악했다는 것은 어떤 형태로든 중국 以東의 교역망을 좌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부가되는 경제적 이익을 취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신라가 삼국이 대립하는 동안 막대한 희생을 치르면서도 한강 하류 지역을 지켜냈던 이유이기도 하다. 이미 세력이 한풀 꺾인 백제는 뒤로 하더라도, 북으로부터 압박해오는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그 고구려를 압박해줄 수 있는 중국의 국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나라의 존망이 위태로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신라로서는 한강 하류 지역과 沿岸의 지배는 신라가 존속할 수 있느냐 아니냐 하는 갈림길이었다. 이것은 한강과 연안을 획득한 후의 결과론이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것은 신라의 지배 세력 특히 왕권 세력의 획책일 수도 있다. 불교를 공인하면서 율령을 정비해서 중앙집권을 성사시켰지만, 그것의 유지를 위해서는 지속적인 모멘텀이 필요하다. 왕권세력은 강화된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또 신라라는 국가의 존속을 위해서 한강유역 점령이라는 강수를 던졌던 것이다.


신라가 한강 유역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던 배경에 대해 다양한 이야기들이 있지만, 필자가 생각하기에는 이것이 핵심이다. 지키지 못하면 죽기 때문이다. 지키면, 지킨다는 그 자체로부터 경제적 이익은 당연하고, 정치적·문화적 이익이 부가적으로 발생한다. 하지만 지키지 못하면, 고립돼 죽는 수밖에 없다. 따라서 신라 내부의 정치적 분열이 어떠하든 간에 한강 유역을 죽음으로 지켜야 한다는 대명제에는 언제나 나라 전체가 한묶음일 수밖에 없는 상태가 삼국을 통일할 때까지 지속됐다. 이른바 必死卽生이니, 죽지 않기 위해서라도 싸워 지켜야 했던 것이다. 100년 뒤의 일이기는 하지만, 그 결과가 바로 통일이다.
그런데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50년이 지나지 않아서 중국에 통일왕조가 출현한다. 수와 당으로 이어진 장안 중심의 세계체제다. 중국이 남북으로 갈라져 있을 때와는 형세가 사뭇 달라졌다. 게다가 그 통일왕조는 힘이 있었다. 불과 70~80년의 기간에 백만이 넘는 대군을 고구려를 향해서만 다섯 차례 이상 동원할 수 있었을 정도다. 직접 경계를 접하고 있어서 경계의 대상이자 정복의 대상이었던 고구려와는 달리, 백제와 신라로서는 다른 두 나라를 견제하는데 결정적일 수밖에 없는 세력이 등장한 것이다.


隋高祖 곧 文帝는 백제의 위덕왕 36년(589년)에 백제 사신에게 “이후부터는 매년 별도로 조공할 필요가 없다”(『三國史記』 「百濟本紀」제5, 위덕왕 36년조)고 회답할 정도였고, 신라의 경우는 진덕왕 4년(650년)의 기록에 “사신들의 航行과 공물 바구니가 길에서 서로 마주볼 정도였다”(『三國史記』 「眞德王本紀」 4년조)고 기록할 정도였다. 그만큼 중국 왕조와의 정치·경제적 협력에 국운을 걸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권덕영의 조사에 의하면, 唐朝에 고구려와 백제, 신라의 遣唐使 파견 회수는 각각 24회와 25회 그리고 178회에 이른다. 신라의 경우는 통일 이후의 파견까지 포함돼 있기 때문에 아마도 고구려, 백제와 비슷하거나 조금 더 많은 회수를 파견했다고 보면 무리가 없을 것이다.


수 문제부터 당 태종에 이르는 동안에는 적어도 長安을 기점으로 서역 지방에 대한 통제권은 거의 확실하게 보유했다고 볼 수 있었다. 반면 한반도를 포함한 동북 지역은 아직 자신의 질서에 편입되지 않은 치외지대였다. 자신의 질서체제에 복속하면서 위협이 되지 않을 만한 세력, 그러면서 동반자의 조건을 유지할 것, 이것이 아마도 수와 당이 東夷의 세력들에게 바란 조건이었을 것이다. 그 점에 있어서 정복의 대상
신라는 그 틈을 파고들어 적극적으로 수와 당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에 편입하고자 했다. 왜냐하면, 그들의 생존과 발전이 수·당 체제와의 연결에 좌우됐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한강은 황해 곧 동아시아 지중해를 장악하면서 수·당의 세계체제에 접속하는 생명선의 역할을 수행하는 지역이었다. 신라 경주에서 장안에 이르기까지 왕복 6~10개월의 거리를 한 해에도 두세 차례씩 오갔던 것은 신라의 절박함이 낳은 결과였을 것이다. 곧 신라에게 한강에서 장안에 이르는 길은 세계로 통하는 길이었고, 그 세계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길이었으며, 생존을 위해 장안 중심의 세계체제를 적극 활용할 수 있게 하는 생명선이었다.


백제나 고구려 역시 이 수·당 중심의 세계체제를 전면적으로 거부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고 하는 측면에서 보자면 신라가 처한 입장과 고구려나 백제가 추구했던 입장에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신라는 새롭게 등장한 세계체제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살아남고자 했고, 백제와 고구려는 그것에 대항해 자신의 세계체제를 지키고자 했다. 곧 새롭게 변한 주변 환경에 대해 적극적인 입장과 수동적인 입장으로 갈라진 것이다. 이것은 고구려가 서북방 주변세력의 맹주 역할을 하고 있었고, 백제 역시 왜 곧 일본 지역에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다는 점, 그러면서 동시에 수·당과의 압도적인 국력 차를 메우기도 쉽지 않았기 때문에 비롯된 결과였을 것이다.


지금의 세계 역시 마찬가지다. 세계질서를 주도하지 못한다면,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는 자세가 필요하다. 오늘날 한국의 세계화는 어떤 측면으로든 수동적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하드웨어는 성공적이면서 소프트웨어는 그렇지 못하다. 한류열풍은 있는데 그것이 국익의 창출로 이어지고 있는가? 세계질서를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쫓아간다면 결과는 번연하다. 생존이 위태로워진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생존을 도외시하는 열풍에 휩쓸린 이상한 사회를 바라보고 있다.

 

 

 


석길암 금강대 불교문화연구소 HK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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