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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을 지닌 자들에게 껄끄럽게 비쳤던 ‘종교운동’의 탄생과 몰락
‘힘’을 지닌 자들에게 껄끄럽게 비쳤던 ‘종교운동’의 탄생과 몰락
  • 석길암 금강대 불교문화연구소 HK교수
  • 승인 2015.02.17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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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기획: 長安, 동아시아를 만든 1백년을 성찰하다 03. 권력과 종교, 함께 가는 길 따로 가는 길

 

▲ 시안 대안탑에서 바라본 오늘날의 시안. 오늘날 거리의 큰 구획은 수당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다. 바라보이는 대로 역시 수당시대에 구획된 길 중의 하나다.

수나라는 시스템을 넘어서는 인간을 만나지 못한 사회
信行 선사는 복지시스템을 운영했지만, 황제는 이마저 우려
권력에 통제되지 않는 ‘삼계교’, 결국 금령 조치로 탄압받아

종교는 종교 나름의 이상이 있다. 국가 권력 역시 나름의 이상이 있다고 말하고 싶지만, 국가권력 더군다나 왕조 시대의 국가권력이라는 것은, ‘권력의 안정’ 그 자체가 주요한 목표였다고 말하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권력이란 것은 권력 그 자체의 획득과 그것의 지속에 가장 최우선순위를 둔다고 생각하는 것이, 필자에게는 변명으로 더 적합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국가권력과 종교권력이 일치하는 상황이 꼭 나쁜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국가권력과 종교권력이 분립하고 균형을 이루는 상황이 꼭 좋은 것만도 아니다. 다만 종교가 추구하는 바와 정치가 추구하는 바는 그 본질에 있어서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때문에 양자가 대립하는 경우가 역사에서 더 흔한 것처럼도 보인다. 하지만 이 같은 궤변 역시 종교가 종교일 때의 이야기다. 종교가 ‘종교’가 아닌 ‘종교권력’이 되면, 그것은 더 이상 종교라고 불릴 수 없다. 그쯤 되면 국가권력이나 종교권력이나 마찬가지여서, 권력 자체의 유지에 과도한 힘을 쏟아 붓기 마련이고, 거기에는 더 이상 종교의 이상이나 국가의 이상이 존재하지 않게 된다.


어쨌든 요체는 시스템이 아니라 사람에 있다. 시스템이 인간을 규정하는 일이 흔한 것처럼, 아무리 나쁜 시스템이라고 하더라도, 그 시스템을 넘어서서 인간이 인간으로서 추구해야 할 바를 놓치지 않는 훌륭한 사람들도 역시 존재하기 때문이다. 결국 인간의 문제란 언제나 시대와 사회의 시스템을 능동적으로 그리고 신중하게 운용할 수 있는 뛰어난 인간이 그 시대와 그 사회에 등장하는가 등장하지 않는가의 문제에 달린 것처럼도 보인다. 물론 그 인간이 그 시대와 그 사회의 시스템을 넘어서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기는 하지만.

수문제와 수양제가 부닥쳤던 한계상황
수나라와 당나라를 극단적으로 대비해서 말하자면, 수나라는 그러한 인간을 만나지 못한 사회였고, 당나라는 그러한 인간을 만나는 행운을 얻었다는 점이 다를 것이다. 수문제와 새롭게 건국된 수나라가 추구한 시스템은 사실은 매우 간명했고, 그래서 더욱 훌륭한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었다는 데는 동의할 만하다. 특히 수문제의 소박하고 사치스럽지 않은 기품은 수나라 건국 초기의 안정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양제는 그것을 계승할 만한 자질을 갖추지 못했던 인물이었던 것 같다. 양제가 갖추지 못했던 미덕을 당나라의 태종은 갖추고 있었다.


수양제나 당태종이나 형제를 참살하고 황위를 찬탈했던 권력자였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권력 쟁탈 이후의 행방에서 긴급히 처리해야 될 사안은, 두 사람이 부닥친 시대와 사회적 정황의 차이 로 인해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러한 정황이야말로 역사의 흐름에 있어서 당태종 이세민에게 행운을 가져다 준 부분이기도 했다. 어쨌든 이 점에 대한 설명은 다음으로 미루기로 하고, 수문제와 수양제가 부닥쳤던 한계상황을 좀 더 고민해보기로 하자.


수문제는 중국 통일 후 10여 년이 지나도록 국가불교체제에 특별한 변화를 가하지 않았다. 하지만 통일 직후 행해진 초기의 몇몇 정책들, 예를 들면 전국의 승려들을 초빙해 불경을 번역하고 결집하는 등의 조치들은 불교 비대화의 조짐으로 이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장안에 새롭게 등장한 불교집단인 三階敎 같은 경우는, 수나라의 도읍이자 동서교역의 새로운 중심지로 부상한 장안 도성의 성민들에게 거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을 정도였다. 그러나 불교가 북조의 국가불교체제에서처럼 비대해져서 부작용을 낳기 전에 좀 더 적극적인 대응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 적극적인 대응조치의 필요성을 자극한 집단 중의 하나가 三階敎라고 알려진 불교집단이다.


앞의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북조는 단순히 武力이 강한 집단은 아니었다. 거대한 동서교역 시스템에서 초래된 이익의 한 축을 장악했던 정치권력집단이었다. 게다가 고대의 경제에서 가장 중요했던 식량혁명의 수혜를 받았던 행운아이기도 했다. 기원전후 무렵 중국에 전해졌던 밀의 재배는, 중국 특히 남북조시대 북조 지배 지역의 식량증산에 획기적인 결과를 초래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적어도 식량의 양만을 따질 때는 먹고 살만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요즘만 같으면 먹고 살만하다’는 이야기도 평화가 지속될 때나 가능하다. 그리고 북조는 북위가 강성하던 5세기의 한 세기 동안을 제외하면 ‘평화로운 시절’과는 거리가 멀었다. 농업분야에서 생산량의 안정이라는 것은 평화를 전제로 한다. 농사지을 땅이 전쟁으로 망가지거나, 혹은 농사지을 사람이 전쟁터로 끌려 나가 버린다거나 하는 일이 발생하면, 생산량은 절대적으로 감소하기 마련이다. 수가 통일전쟁을 끝내기 직전의 40여 년은 전쟁 직전의 긴장 상태 혹은 전쟁이 지속되는 慘劇의 세월이었다. 결과적으로 농업 부문의 생산량은 급감할 수밖에 없었다. 인간에게 식량의 부족은 절대적으로 불안을 초래한다. 그리고 절대적인 불안요소가 잠재한, 곧 평화롭지 않은 세상은, 그것이 정치적이든 아니면 종교적이든, 언제나 혁명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어떤 일인가가 진행되기 마련이다.


통일제국 隋는 남북조 말기의 人民들이 정치와 사회 그리고 경제적 위협을 회피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 결과로 등장했다. 하지만 불안을 피하기 위한 안간힘이 꼭 정치적 결과로만 나타나지는 않는다. 종교적으로도 그러한 노력은 지속됐다. 물론 북조에서 일어난 불교반란은 실패하긴 했지만, 이런 노력과 안간힘의 결과가 정치지형의 변화에 영향을 미친 것은 틀림없다. 정치적으로든 종교적으로든 그러한 실패를 수반한 시도가 반복됐던 것이 남북조 말기였기 때문이다. 이 지난한 도전과 실패의 과정에서 우연한 그러나 필연적이기도 한 성공 중의 하나가 통일제국 隋의 등장이었고, 三階敎 역시 그러한 성공 중의 하나였다.

‘구족계’ 계율 넘어선 삼계교의 성공
삼계교라는 불교집단을 창시한 이는 信行(540~594)이라는 선사였다. 그는 하남성과 하북성의 경계에 위치한 魏郡 사람으로, 相州의 法藏寺에서 주로 활동하였던 인물이다.그는 상주 법장사에 머물 때, “구족계를 버리고 몸소 노역에 종사해 가난하고 병든 사람과 노인들에게 고양을 제공했다.”(『續高僧傳』 「釋信行傳」) 구족계라는 것은 불교의 출가자들이 출가자로서 반드시 지켜야 할 계율조항을 말한다. 그런데 그것을 포기했다는 것은 스스로 승려로서의 지위를 포기했다는 것과 의미가 통한다. 가난하고 병들고 늙은 사람들에게 제공하기 위한 음식을 마련해야 했는데, 그러자면 일을 해야 했다. 이것은 승려의 노동행위를 엄격하게 금지한 구족계를 넘어선 행동이었다.


석가모니 이후 불교의 출가자는 반드시 “먹는 것은 걸식에만 의지해야 한다”는 엄정한 규칙이 존재했다. 따라서 승려의 신분으로 음식을 얻기 위한 노동행위는 계율위반이었다. 하지만 가난하고 병들고 늙어버린 이들에게 음식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누군가 노동을 해야 했고, 그 때문에 신행은 스스로 승려의 신분을 포기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로 인해 그의 승려로서의 덕망은 더욱 널리 알려졌다.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했을 때 문제가 전국의 고승들을 장안으로 초빙했던 것은 앞에서 이미 언급했던 바다. 이때 초빙됐던 승려 중의 한 사람이 바로 신행이었다.


그는 장안의 眞寂寺라는 절에 머물렀는데, 그를 존경해 기진되는 보시물과 田地를 활용해 無盡藏院이라는 것을 운영했다. 田地의 경우 敬田과 悲田으로 나눴다. 敬田은 불보살에게 예경하는 공양물을 위한 것이었고, 悲田은 가난한 이들을 먹이는 먹거리를 생산하는 용도였다. 또한 금은 등의 보시물들을 활용해 가난하거나 병든 이들이 쉽게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오늘날의 마이크로 크레딧, 곧 한국의 서민금융지원제도라고 보면 틀림없을 것이다. 여유 있는 이들의 보시를 받아 사회복지금융시스템과 사회복지생산시스템을 운영했다고 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그는 장안에 化度寺, 光明寺, 慈門寺, 慧日寺, 弘善寺 등의 다섯 개 사찰을 새로 세웠다. 동일한 시스템이 그 사찰에도 적용됐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어쨌든 그의 사회복지 사업은 크게 성공해서 장안성민들이 앞 다퉈 그의 교단에 보시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그의 불교 사회복지 사업은, 자기 스스로는 惡을 지닌 중생으로 봤지만 다른 모든 사람들은 불성을 지닌 부처 그 자체인 존재라고 여겼던 그의 불교사상이 작용한 것이었다.


어쨌든 그의 행보는 당시 장안성민들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통일전쟁의 직후라 사회는 여전히 안정되지 못했고, 전쟁기간 동안 경작지와 살 집을 잃고 떠도는 유랑민들이 적지 않았다. 새로운 도읍 장안이라고 그러한 상황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다. 때문에 信行의 이 같은 행보는 장안성민들에게도, 그리고 국가운영자인 수문제에게도 반길 만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행보 역시 도를 지나치게 되면 禍가 될 수 있다. 장안에 존재하는 삼계교의 사찰들의 행보나 사회복지 사업 역시 좀 더 조직화될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은 효율성 때문이기도 했고 또 그러한 과정에 참여한 僧俗이 느끼는 감동 때문이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신행의 가르침, 그리고 그의 행보가 낳은 결과들에 대한 열정들이 증폭됐다. 그것은 마침내 불교계의 다른 승려들이나 나아가 장안의 권력자인 황제에게조차 위협으로 받아들일 만한 것으로 비쳐졌다. 그런 행보가 박수칠 만한 일이지 무슨 문제가 되겠냐고 반박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 때문에 동일한 자세를 강요받는 이들이나, 자신의 장안에서 명성을 구가하고 있는 권력자에게는 여간 부담스러운 것일 수밖에 없다.


수문제의 입장에서부터 말하자면, 북조와 남조 사회에 크게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불교집단은 자신의 통제 아래에 존속하는 것이어야 했다. 수문제는 장안의 불교를 다섯 무리(衆)를 두고 각각의 무리에 두셋의 衆主를 뒀다. 다시 전국에 25衆을 두고 뛰어난 고승 25명을 그 衆主에 임명했다. 불교가 하나의 세력을 이룰 가능성을 철저히 차단하고자 한 셈이다. 도교의 경우에 五通觀을 세우고, 天師를 둬 도교집단을 관리하고, 太學을 설립해 유학을 선양하려 한 것도 역시 이러한 정책과 상응한다. 그런데 그렇게 분리 통제해야 할 불교집단이 비록 국가정책에 일조하는 바가 있기는 하지만, 황제의 통제정책에 반해, 그것도 황제가 확고히 장악해야 할 장안성 안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는 상황을 초래했던 것이다. 하지만 섣불리 대응하는 것은 좋지 않다. 우연인지 필연인지는 몰라도 수문제 혹은 그의 통치 정책에는 다행스럽게도 信行은 594년에 죽었다.

용의주도한 황제의 권력 운용
하지만 용의주도했다고 생각되는 황제는 곧바로 삼계교단의 통제에 나서지는 않았다. 뛰어난 자의 그늘은 크기 마련이고, 삼계교 역시 그러한 길을 걷지 않을까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기대에 어긋나는 법이다. 삼계교 信行의 후예들은 스승을 매우 존경했고, 그의 길에 어긋나려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이것은 삼계교의 승려들이 信行이 그러했던 것처럼, 출가 후 2~3년의 일정한 기한이 되면 비구로서의 구족계를 포기하고 노동에 종사하는 것을 하나의 전통처럼 받아들였던 것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게다가 그들은 여전히 종교인으로서의 길을 추구할 뿐이었다. 딱히 책잡을 만한 것이 마땅치 않았던 것이다. 그래도 수문제가 보기에 그들은 자신의 제국 아래 통제해야 마땅한 집단이었다. 권력자에게 자신의 권력에 통제되지 않는 종교집단이란 것은 그것의 좋고 그름이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존재 여부가 더 문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600년! 수문제는 삼계교에 대해 禁令을 반포한다. 仁壽라는 연호를 쓰기 직전이었다. 뚜렷한 명분은 알 수 없지만, 대체로 삼계교가 의거하고 있는 가르침이 불경을 자신들의 입맛에 맞춰 선별한, 그래서 불경에서 원래 의도하고 있는 바를 훼손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정당한 불교집단이라고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다. 이로써 삼계교는 공식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집단이 된다. 하지만 그들의 활동은 금지령이 반포된 600년 이후로도 100여 년을 지속하게 된다. 불교에 의한 치국을 내세운 또 다른 권력자 武則天이 다시 금지령을 내리게 되기까지는 말이다. 어떻게 보면 가장 불교적이고, 가장 종교적인 집단이었던 삼계교가, 불교에 의한 치국을 내세웠던 隋와 唐의 대표적인 통치자인 문제와 무측천에 의해 탄압을 받아 역사의 전면에서 사라졌다는 것은 또 다른 아이러니가 아닐까.


정치나 종교는 사람 을 근본에 둬야 하는 것이지만, 권력이란 속성은 사람이 아니라 그것의 획득과 유지에 근본을 두게 마련이다. 그래서 우리는 남북조를 거치면서 새롭게 나타난 권력자가 아니라, 남북조를 거치면서 새롭게 추구된 사회정치의 시스템에 더 관심을 둘 필요가 있다. 시스템은 권력의 속성을 일정 부분 제어하는 장치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석길암 금강대 불교문화연구소 HK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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