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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과 해외에 사리탑 100여기 조성 … 왕조의 南北을 끌어안으려 노력
전국과 해외에 사리탑 100여기 조성 … 왕조의 南北을 끌어안으려 노력
  • 석길암 금강대 불교문화연구소 HK교수
  • 승인 2015.01.21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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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기획: 長安, 동아시아를 만든 1백년을 성찰하다 02. 수 문제, 아소카의 정치적 후예를 자처하다?

▲ 북위 문성제 때 조성한 담요오굴 중의 하나인 운강석굴 제20굴

부처의 자비에 의해서 통치자의 자격을 증명 받은 자, 그래서 현실에서 풍요로운 이상세계를 건설할 수밖에 없는 자, 백성에게 덕을 베푸는 자일 것이라는 기대를 통해 왕조의 남북을 끌어안는다는 선언을 행한 셈이다.
그러나 이것을 통해 수나라에서 불교국가적 시스템이 작동하기 시작한 것은 아니라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남조와 북조는 많은 점에서 달랐다. 남조의 경우는 士族들에 의한 통치윤리가 유지되고 있었지만, 북조의 경우는 사정이 달랐다. 북조는 단일전제군주를 무력의 정점으로 하면서, 한족과 서북의 異民族이 동시에 지배층과 피지배층을 구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북쪽에 잔류했던 한족 출신 사족들에게 무력과 경제력을 정점으로 하는 서북 이민족의 사고는 낯선 것이었고, 서북 이민족 출신의 지배자들에게는 한족 출신 관료들이 제안하는 지배체제가 낯선 것이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익숙하지 않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 투성이였던 셈이다. 그런 상황에서 불교와 새로운 도교는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간 새로운 사회질서의 제안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남조 역시 유송 시대를 거쳐 梁代(502~557)에 이르면 이 새로운 사조를 적극적으로 수용해 정치사회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한다.


북위를 건국했던 道武帝(재위 386~409)는 398년에 平城에 처음으로 궁궐을 조영하고 종묘를 건립해 社稷을 세웠다. 그리고 같은 해에 칙령을 내려 五重塔과 함께 講堂과 禪堂 등을 갖춘 사원도 완성했다. 곧 수도를 건설하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이 바로 궁궐 및 사직의 조영과 함께 사원을 갖추는 것이었다. 이것은 승려 法果의 건의에 따른 것이었는데, 법과는 사람들에게 늘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법과는 매번 태조는 명철하고 佛道를 좋아하므로 바로 현재의 如來다. 사문은 당연히 禮를 다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항상 태조에게 예배했다. 사람들에게는 ‘道를 널리 전하는 사람은 人主이다. 나는 천자를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부처님을 예배하는 것이다’라고 했다.”(『魏書』 「釋老志」)


이것이 ‘군주가 바로 당금의 여래’라고 하는 북위 불교도의 주장이다. 여기에서 두 가지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하나는 북위 불교의 존재가 전제군주의 의지에 좌우됐다는 것, 또 하나는 승려들이 그러한 통치자의 구미에 부합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통치자의 구미에 부합하고자 노력했다는 것은 역으로 흥망성쇠가 오로지 통치자 한 사람의 의사에 좌우될 만큼 불교의 입지가 약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아니나 다를까. 군주를 부처처럼 떠받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불과 50년이 지나지 않아 불교는 절멸의 위기를 당하게 된다. 북위의 세 번째 황제인 太武帝(재위 423~452)의 시대에 크게 활약했던 도사 寇謙之(?~448)와 그에게서 배운 한족 관료 崔浩(381~450)가 바로 그 불교 절멸 사건의 주역이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의 목표가 완전히 일치했던 것은 아니었다.


도사 구겸지는 천사도를 혁신하고자 했다. 그는 천사도를 유지하는 경제적 바탕이 됐던 租米, 곧 세금으로서의 오두미 징수를 금지하고 符作을 파는 행위 등을 금지시켜 국가와의 충돌을 방지하는 한편 국가도교를 지향하고자 했다. 단 그는 불교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불교를 포섭하려 했다. 또 한편으로는 유가의 예의와 예법을 채용했다. 이른바 신도교 운동이다. 후한 시대 이후 농민반란의 주요 기반으로 활용됐던 원시 도교를 봉건국가의 정교합일 체제에 적합하도록 개혁하려 했던 셈이다. 반면 최호는 그런 구겸지의 신도교를 활용해 오랑캐의 종교인 불교에 기울어져 있는 북위를 한족 전통의 유교윤리에 바탕을 한 봉건사회로 바꾸려고 했다.


어쨌든 이 두 사람의 노력으로, 태무제는 도교에 깊이 귀의하게 됐고, 마침내는 불교를 절멸하는 조칙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사찰과 불상, 그리고 불경은 파괴하고 불태우도록 했고, 승려는 모두 구덩이에 파묻도록 명령했다. 446년의 3월의 일이다. 다행히 태자의 기지로 조칙의 공포가 늦춰지는 사이 대부분의 승려는 목숨을 구했지만, 사찰이 불타는 것만은 막을 방법이 없었다고 한다. 평성의 궁궐과 함께 세워졌던 오층탑 역시 이때 파괴됐다. 이후 태무제가 죽을 때까지의 7년간 북위의 영역에서 불교는 공식적으로는 자취를 감춘 상태였다. 태무제는 애초에는 특정 종교에 기울어져 있지 않았다. 특히 439년에는 北凉(401~439)을 멸망시키고, 서역의 관문을 장악하는 동시에 이 지역의 불교문화를 평성에 이식한 주역이기도 했다. 하지만 구겸지와 최호의 권유를 받아들이면서 440년에는 太平眞君이라는 도교식 연호를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구겸지는 태무제에게 “지금 폐하는 眞君이 돼 세상을 다스리시고, 정륜천궁의 가르침을 펴고 계십니다”라고 진언했다고 한다.


도무제 시절의 승려 법과가 황제를 ‘당금의 여래’라고 했듯이 구겸지는 황제에게 ‘당신은 도교의 진군’이라 칭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불교와 도교의 입장에서는 교단의 유지와 전법의 가능성 확보라는 명운이 달린 일이었지만, 황제 혹은 왕조의 입장에서 본다면 어느 쪽이 나라를 다스리는 데 좀 더 적합한 것인가의 문제였을 것이다. 이 점에서 불교는 북위라는 왕조, 그리고 남쪽의 梁이라는 왕조에서는 성공적으로 그 목적을 달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니, 반대로 북위의 文成帝(재위 452~462)와 양의 武帝(재위 502~549)가 그러한 목적에 불교를 성공적으로 활용했던 인물에 속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불교 탄압의 주역이었던 구겸지와 최호, 그리고 태무제가 차례로 죽고 북위의 황제에 오른 인물이 바로 문성제다. 그가 즉위하면서 불교는 다시 빛을 보게 된다. 전국 각지에 사찰을 건립하는 것과 승려의 출가가 허용됐으며, 사찰의 건축에 드는 비용은 일체를 국가에서 부담했다. 이로써 불교는 다시 북위에서 빛을 보게 된다. 하지만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게 마련이다. 그만큼 불교교단에 대한 통제 역시 강화했기 때문이다. 국가에서 비용을 제공한 종교사원은 국가의 통제 아래 기능할 수밖에 없었고, 같은 방식으로 승려들 역시 종교장관인 승려, 곧 道人統의 통제 아래 국가에 봉사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확립했기 때문이다.


이 시절의 불교부흥을 상징하는 사업이 바로 중국의 대표적인 불교석굴 가운데 하나인 운강석굴의 개착이다. 사문통이자 불교부흥사업의 책임자였던 曇曜는 평성 서쪽의 무주산 석벽에 다섯 개의 석굴을 개착하고 각각 대형 불상 1구씩을 조성했다. 이른바 담요오굴이라 불리는 것인데, 『위서』 「석노지」에 의하면 담요가 북위 다섯 황제의 모습을 본떠 불상을 조성한 것이라고 한다. 북위 초기에 승려 법과가 주장했던 ‘황제가 당금의 여래’라는 주장의 완성판인 셈이다. 북위에서는 예부터 황후와 군주를 세우기 전에 후보자의 모습을 본떠 동상(金人)을 만들었는데, 완성되면 세우고 그렇지 않으면 세우지 않았다고 한다. 곧 후보자의 모습을 본떠 만든 동상으로 길흉을 점치던 풍습이 있었던 것이다(아마도 서북지역의 유목민족에게 공통된 풍습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 풍습과 불상의 조성이 교묘하게 융합됐던 것이고, 상의 완성이 누구에 의해 주도됐든, 북위 초기의 ‘황제가 당금의 여래’라는 주장이 그렇게 새로운 상징으로 귀결됐던 것이다.


반면 ‘보살황제’라는 별칭으로도 불리는 남조의 양무제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불교를 채용한다. 양무제는 梁朝(502~556)의 4대 56년간 중 48년을 치세하면서 남조문화의 최전성기를 이끌어낸 인물이다. 남조 역시 양조에 이르면 불교의 융성이 극에 달하게 되는데, 사원이 2천800여 곳, 승려가 8만2천70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불교의 성세를 이끌어낸 주역이 양무제였던 만큼 그는 불교의 정치적 활용에 있어서도 탁월한 바가 있었다. 양무제가 주목한 것은 아소카왕, 곧 중국식 음사어로 아육왕이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아소카왕은 불교가 인도 전역은 물론 인도를 넘어서 세계적인 보편종교로 도약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인물로, 불교에서는 전륜성왕에 비견된다. 전륜성왕이란 붓다의 가르침 곧 달마(達磨, Dharma)에 의해 불교적 이상세계를 구현하는 자를 말한다. 이른바 세속사회의 부처인 셈이다. 이러한 개념에 의거해 북조의 북위에서는 황제를 전륜성왕에 비견하고 다시 부처와 동일시하는 사고방식을 발전시켰다. 그것이 바로 ‘황제가 당금의 여래’라는 사고방식이었다. 양무제는 불교를 받아들인 중국인들에게 익숙해 있던 이 전륜성왕 개념을 좀 더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방법으로 활용하려 했다. 전륜성왕의 실제 모델로 아소카왕의 사례를 적극 채용했던 것이다.


아소카왕은 부처의 사리탑 중 일곱을 열어서 전국 각지에 진신사리를 보내 팔만사천의 탑을 조성했다고 전한다. 아소카왕은 팔만사천 탑의 건립을 통해 불법을 수호하는 모범적이면서 이상적인 제왕으로서의 이미지를 확립하는 한편 정복전쟁을 통한 제국 통일 이후의 안정과 민심의 수습에도 성공했던 것으로 보인다.
양무제는 扶南國(인도차이나 반도 남부에 존재했던 고대국가) 출신의 승려인 僧伽婆羅가 512년에 번역한 『아육왕경』에 주목했다. 이미 불교를 신앙으로서 삶 깊숙이 받아들인 중국인들에게, 그리고 신사조로서의 불교에 몰두한 사족들에게 있어 부처의 가르침을 수호함으로써 불교적 이상국가를 건설하는 왕으로서의 전륜성왕의 이미지는, 양무제에게 국가의 통치에 아주 유효한 수단으로 주목됐을 것이다. 양무제가 처음부터 독실한 불교신자였는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하지만 그 유효성에 주목해서 불교신앙이 깊어졌든 아니면 불교신앙이 깊었기 때문에 그러한 불교적 통치수단을 강구했든 간에 양무제의 통치 1대에 강남의 불교가 비약적으로 성장한 것은 사실이다. 어쩌면 전승대로 아소카왕처럼 남조 통일전쟁을 치렀던 양무제가 통일전쟁 후에 불교에 귀의했다고 말하면 더욱 드라마틱할지도 모른다.


어쨌든 양무제는 스스로 불경을 강의하고, 승려들이 경전을 번역하고 간행해 유포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스스로 白衣의 僧正이 돼 승려들의 계율을 단속했다. 동아시아 불교에서 육식을 금하는 풍습이 굳어진 것도 양무제가 반포한 「斷酒肉文」의 영향이 지대하다. 양무제의 행동들이 아소카왕의 전례를 의식한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아소카왕이 불교경전을 결집하고 교단을 정비한 것을 연상시키는 행동인 것만은 틀림없다. 어쨌든 『아육왕경』의 번역이 끝난 뒤에 아육왕탑을 재건하고 진신사리 공양을 한 것은 梁朝 당시의 사족들과 민중들에게 양무제와 아소카왕을 번갈아가면서 떠올리게 했을 것이다.
이 같은 남조와 북조의 정치사회적 실험을 배경을 등장하는 통일왕조가 바로 수나라다. 북조의 北周(557~581)를 계승한 隋나라가 중국의 남북을 통일한 것은 589년이다. 창업자이자 통일제국의 통치자가 된 隋文帝(재위 581~604)로서는 남북을 아우를 수 있는 새로운 구상을 필요로 할 수밖에 없었다.
300년 가까운 세월동안 행해졌던 정치·사회적 실험들이 역사 속에서 검토됐다. 우선 북쪽 지방의 통치 문제는 긴급하지 않았다. 수나라 자체가 북조를 계승한 왕조였기 때문이다. 오히려 문제는 새롭게 영역으로 확보한 남조에 있었다. 남조의 민심을 자연스럽게 수습하면서 안정화시키는 것이 당면과제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당면과제를 진행함에 있어서 수문제는 양무제의 아소카왕 차용에 주목했던 것으로 보인다. 단 방식은 양무제보다는 훨씬 더 직접적이었다.


통일 직후의 첫 번째 단계에는 우선 통일제국의 전국 각지에서 유력한 승려들을 장안으로 초빙했다. 그리고 장안 각지에 새롭게 조성된 사원들, 그 중에서도 특히 대흥선사에 그 승려들을 머물게 하면서 불교 경전의 번역과 정비를 요청했다. 이때 장안에 초빙돼 갔던 승려 중의 한 사람이 소주 호구산에 머물고 있으면서 이름을 떨치던 신라 출신의 圓光法師다. 물론 이 과정에서 불교 교단을 전국적으로 재정비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미흡했던 것으로 보인다. 새로운 기획이 시행된 것은 수문제가 수나라를 창업한 지 20년, 곧 황제에 오른 지 20년 되던 해, 그의 나이 환갑이 되던 해였다. 연호부터 바꿨다. 수문제의 첫 번째 연호는 開皇이다. 연호에 皇을 사용한 것은 아무래도 통일제국에 대한 열망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20년이 지나고 보니 이미 통일은 이뤄졌고, 이제는 守成의 대업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자손만대에 이어질 영화로운 제국, 그것에 대한 염려와 기대도 담았을 것이다. 그래서 나온 연호가 仁壽다. 수문제의 장수를 바란다는 의미도 있었겠지만, 이제 仁 곧 자비로 다스리는 나라의 무궁함이 더 중요하게 고려됐을 것이다.


그 仁壽라는 연호를 사용한 첫 해와 둘째 해, 그리고 넷째 해에 전국 108개 주와 해외를 포함해 100여 기 이상의 사리탑을 건립한다. 이때 사용된 舍利는 수문제가 황제가 되기 전에 神僧으로부터 보호해줄 것을 부탁받은 것이거나 식사 도중에 감응해 얻은 것 등이다. 중국 전통에 황위에 오르는 자는 神異한 기물이나 상서에 의해서 정당한 자격을 부여받는다. 수문제가 신승으로부터 보호해줄 것을 부탁받은 사리나 식사 도중에 감응해 얻은 사리는 그러한 신이한 증표에 해당한다. 다만 중국 전통의 것이 아니라 불교적 상서라는 것이 다를 뿐이다. 그리고 그 신이한 불사리에 대한 공양이 갖는 상징성에 대해서는 양무제에 의해서 남조의 사람들에게 이미 익숙해진 것이다.


수문제는 그 전례를 차용해 통일제국 전역에서 동시에 사리탑을 조성하고 공양했다. 부처의 자비에 의해서 통치자의 자격을 증명 받은 자, 그래서 현실에서 풍요로운 이상세계를 건설할 수밖에 없는 자, 백성에게 덕을 베푸는 자일 것이라는 기대를 통해 왕조의 남북을 끌어안는다는 선언을 행한 셈이다. 그러나 이것을 통해 수나라에서 불교국가적 시스템이 작동하기 시작한 것은 아니라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오히려 불교라고 하더라도 이미 한껏 중국화 된 불교이며, 전통적인 중국적 윤리질서라고 하더라도 이미 서역과 서북 이민족의 풍습에 융화된 윤리질서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석길암 금강대 불교문화연구소 HK교수
동국대에서 원효대사에 관한 연구로 석사와 박사과정을 마쳤다. 한국불교연구원 전임연구원을 역임했으며, 주요 논문에는 「금강삼매경의 성립과 유통에 관한 연구」 등이, 저서로는 『불교, 동아시아를 만나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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