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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사회시스템’을 낳은 8세기의 세계도시, 거대한 약동을 시작하다
‘새로운 사회시스템’을 낳은 8세기의 세계도시, 거대한 약동을 시작하다
  • 석길암 금강대 불교문화연구소 HK교수
  • 승인 2015.01.05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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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기획: 長安, 동아시아를 만든 1백년을 성찰하다_ 01.서북의 오랑캐가 세운 중원의 왕조가 성공하는 법

 

<교수신문>은 을미년 새해부터 석길암 금강대 HK교수의 ‘장안 이야기’를 새롭게 선보입니다. ‘長安, 동아시아를 낳은 1백년을 성찰하다’라는 기획 제목이 시사하는 것처럼, 동아시아 1백년의 역사의 중심지 ‘장안’을 지금, 이곳에서의 관점에서 문명사적 시각으로 새롭게 읽어내는 기획입니다. 시기적으로는 6세기 말~8세기 초, 수 제국 성립부터 당 측천무후 시기까지의 장안이 그 대상입니다. 이 시대의 장안은, 우리가 통상 ‘동아시아’라고 부르는 문화권의 기본적 토대들이 형성되고, 그것이 전파되고 성립되는 시기입니다.
이 시대의 장안은 단순한 ‘한족들의 도시’가 아니라, 과거의 로마나 오늘날의 뉴욕과 같은 세계도시였고, 세계의 문화를 훌륭하게 자기화 시켰던 도시였습니다. 달리 말하면, 당시의 장안인들은 세계를 소화하고 동시에 세계에 영향을 끼치고 이끌었던 주체이기도 했습니다. 최근의 중국 정부 역시 지역 맹주 국가에서 세계국가로 넘어가기 위한 도약의 시발점으로 실크로드 무역정치경제 자유지대를 구상하고, 내륙을 통한 유라시아 교류의 전진기지로 시안(장안)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한류는 몇몇 겉모양의 세계적 전파에만 주력하는 것으로, 일부 정치 경제인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추진되고 있는 절름발이 한류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정치와 경제, 문화와 사회를 아우르는 인문학적 모멘텀이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한류가 하나의 세계적 문화현상으로, 그리고 한국사회 및 문화가 역동성을 가진 존재가 되려면, 인문학적 모멘텀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장안 이야기’는 그러한 기본 동력을 어떻게 찾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담고자 합니다. 연재 내용은 축이 되는 인물을 선정하고, 그 인물의 특정한 일상을 중심으로 그 시대 전체의 장안과 당대를 읽는 양상으로 진행될 예정입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 장건의 동상. 한중의 장건사당

“大晉이 천명을 받은 지 지금 오십여 년입니다. 元康年間(291~299) 이래로 왕의 덕이 이지러지면서 서북의 오랑캐가 중국에 침입했습니다. 종묘는 불타서 재가 돼버렸으며, 천 리 사이에 밥 짓는 연기가 사라졌으며, 중국에는 관복을 입은 사람이 사라졌습니다. 천지개벽 이래, 서적에 기록된 큰 난리의 극심함이 이와 같을 때가 없었습니다.” ―『晉書』, 「우예전(虞預傳)」


이것은 동진 초기에 살았던 인물인 우예가 언급한 내용이다. 우예는 3세기 말부터 서북쪽의 소수민족이 중국을 침입했는데, 그로 인한 혼란이 어떠한 서책에서도 보고 듣지 못했을 정도로 극심하다고 적고 있다. 흉년과 전란 속에서도 민간을 착취하는 관복을 입은 자는 횡행하기 마련인데, 그마저도 없었다니 혼란이 극에 달했음을 알 만하다.


그런데 우예는 서북 오랑캐의 침입을 원강 연간에 일어난 일이라고 한다. 하지만 원강 연간에 중국을 침입한 오랑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원강 연간의 오랑캐란, 팔왕의 난에 각 왕들이 용병으로 고용했던 이들이었기 때문이었다. 後漢 말기의 혼란과 삼국시대를 마감하고 등장한 것이 晉나라 곧 서진이다. 그 서진의 봉토를 받은 여덟 명의 황족들이 황제의 자리를 놓고 십여 년 동안 죽이고 죽는 황족간의 전란이 바로 원강 연간에 있었던 팔왕의 난이다. 이때 왕들의 다툼에 동원된 군사력이 바로 흉노 등 서북 오랑캐들이었다. 침입한 것이 아니라 용병으로 고용됐던 것이다.
그러나 고용된 용병이라고 언제나 이용만 당할 리 만무하다. 그리고 용병을 고용한다는 것은 힘이 있을 때나 가능한 것이다. 그 힘이 경제력이 됐든 군사력이 됐든 말이다. 흉노의 선우(單于)였던 유연(劉淵, ?~310)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독립해 漢王을 칭하게 된다. 유연의 사후 왕위를 계승한 유총(劉聰, ?~318)은 낙양을 함락하고 서진의 懷帝를 사로잡는다. 회제의 연호가 永嘉(307~312)였기 때문에 이 사건을 영가의 난이라고 부른다.
이에 사마 씨의 일족 중의 하나인 司馬睿(元帝, 재위 318∼322)가 강남으로 옮겨 317년 建業(오늘날의 남경)을 국도로 삼고 진나라를 재건한다. 중국의 본토를 서북의 오랑캐에게 내주고, 강남으로 피신해 왕조의 명맥을 유지한 셈이다. 그것이 동진이고, 우예는 그 동진 초기의 인물로 晉史의 편찬에 참여했던 인물이다. 당연히 황제에게 올리는 상서에 황족의 실책을 거론할 수는 없고, 책임을 서북의 오랑캐에게 미룰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서북의 오랑캐라고 하더라도 이미 그 서북을 떠난 지는 오래된, 다시 말해서 진나라의 영역 안에 들어와 이미 상당 부분 중국화된 이들이었다. 다섯 흉노부족의 최고 지배자로 일컬어졌으면서 漢을 세웠던 유연은 이미 진나라의 무관 벼슬을 지냈을 뿐만 아니라, 중국의 고전에도 상당히 능통한 사람이었다. 게다가 그를 따라 봉기했던 흉노 부족 역시 서진 시절 산서성의 변경을 지키던 번병들이었다. 따라서 서진의 멸망과 함께 북중국을 장악했던 첫 번째의 서북 오랑캐, 흉노가 세운 나라는 온전한 오랑캐의 왕조라기보다는 중국화된 오랑캐의 왕조였던 셈이다. 이미 오랑캐의 침입이라고 말할 계제는 아닌 것이다.
어쨌든 그들은 311년에는 낙양을, 318년에는 장안을 함락하면서 북중국을 장악하게 된다. 이후 양자강의 이북에는 오랑캐의 나라가, 그리고 이남에는 사마 씨의 후예들이 재건한 한족 국가 동진을 필두로 하는 한족의 왕조가 통치하는 형세가 약 3백 년 동안 지속된다. 이전에 중국을 지배하였던 秦(기원전 221~206)과 漢(기원전 202~220)의 약 4백여 년에 걸친 기간에, 중국은 서북 오랑캐의 영역으로 깊숙하게 전진하면서 중국 서북 변경에 대한 영향력을 크게 강화하는데 성공했다. 만리장성은 그 결과물이었다. 흔히 말하는 것처럼, 만리장성은 중국인들이 오랑캐의 침입을 막아내기 위해서 세운 것이 아니었다. 오랑캐를 몰아내고 차지한 땅이 중국의 정치경제적 시스템 안에 안착하게 하는 안정화 장치의 상징으로서의 의미가 더욱 강한 것이 바로 만리장성이었다.
결국 팔왕의 난과 연이어 일어난 영가의 난은 그 만리장성으로 상징되던 진과 한의 두 제국에 걸친 4백 년 간의 확장정책을 일거에 되돌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는 달리 말하면 한족이 오랑캐를 포섭해 동화시키고, 자신들의 정치경제적 시스템 안에 안착시키는데 실패했다는 말이 된다. 강북에 중국의 관복을 입은 사람이 사라졌다는 우예의 말은, 적어도 양자강 이북에서는 더 이상 4백 년 간 성공적으로 작동했던 사회시스템이 더 이상 기능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실패의 반향은 거칠고 난폭했다. 경계는 양자강으로 크게 후퇴했고, 새롭고 성공적인 사회시스템이 등장하기까지는 다시 3백 년 가까이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새롭게 시작된 3백 년간의 실험은 이전 4백 년간의 그것과 차이가 있었다. 한족만이 아니라, 서북 오랑캐도 새로운 사회시스템이 등장하기까지 조그만 성공과 실패가 반복적으로 되풀이된 3백 년간의 실험에 또 다른 주인공으로 참여했기 때문이었다. 양자강의 남쪽과 북쪽에서 각기 한족과 서북의 오랑캐가 중심이 돼 새로운 사회적 도전과 응전이 되풀이됐다. 물론 그 도전과 응전에 있어서 강남과 강북의 흐름에는 큰 차이가 존재했다. 강남이 수동적이고 소극적이었다면, 강북의 그것은 능동적이고 과격하기까지 했다.


강남을 지배한 것은 한족이었다. 그들은 이전의 사회시스템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필요성을 절감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사상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변화에 대한 모색이 전혀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것이 위진현학과 청담의 풍조에서 보이는 이상으로 더 나아간 것 같지는 않다. 위진 시대의 초기에 지배계층인 士族이 외래 종교이자 사조로서 불교를 조금씩 수용하기 시작했지만, 그것이 사회의 전반적인 변화로 연결되기까지는 아직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적어도 초기에는 그렇다고 말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강남으로의 대거 이동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지배층의 이동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반면 강북의 상황은 전혀 달랐다. 우예의 말처럼 양자강 이북에 華夏 곧 중국의 관복을 입은 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됐다. 지배계층의 전면적인 교체가 이뤄진 것이다. 새로운 지배계층은 여러 측면에서 중원의 이방인이었다. 그들은 농업을 기반으로 한 定住社會의 체제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아니 알려고 하는 의지조차도 처음에는 그리 강하지 않았던 것 같다. 또한 忠과 孝로 대표되는, 전통적인 중국의 정주사회를 지탱해온 사상적 기반 혹은 사회적 윤리 시스템이 작동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강북에 남겨진 중국인 피지배층 역시 그러한 사상과 사회윤리시스템이 작동되는 방식에 대해 무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강북에서는 새롭게 등장한 지배계층도, 그 새로운 지배계층을 받아들여야 하는 피지배계층도, 혼란스럽다는 것에 있어서는 다를 바가 없었다고 해도 좋다.


게다가 여기에는 중국사회의 범주를 넘어서는 또 다른 문제가 존재했다. 우리가 흔히 ‘실크로드’라고 부르는 것인데, 여기서 말하는 것은 단순히 교역로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지정학적으로는 오늘날 중국의 신강위구르자치구의 서쪽 끝인 카슈가르로부터 감숙성의 돈황에 이르는 구간을 가리키는 말일 뿐이다. 이 실크로드라는 명칭에 대해, 최근의 학계는 동양과 서양을 아우르는 육상과 해상의 모든 통상로를 지칭하는 것으로 의미를 확장하고 있는데, 사실은 남북조 시대의 초기에도 실크로드는 이미 세계 경제를 아우르는 거대한 교역 시스템의 핵심부로서 기능하고 있었다.
교역시스템의 핵심구간을 장악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막대한 경제적 가치를 창출한다. 사막남도와 사막북도 그리고 천산 북쪽의 초원로 서쪽은 인도, 페르시아 그리고 멀리 로마까지 연결돼 있었고, 그 동쪽은 중국 내지의 중심지였던 長安은 물론 북쪽의 다양한 이민족 국가들과 연결돼 있었다. 중국이 이 교역시스템이 창출하는 막대한 경제적 가치를 제대로 알아본 것은 장건(張騫, ?~ 기원전 114)의 西域 出使 이후였다.


이때부터 한나라는 끊임없이 서북지역으로 영토 확장을 시도했는데, 그 첫 번째 장애물이 바로 서역과 장안의 사이에 있는 감숙성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흉노족이었다. 이후 한나라는 흉노를 북쪽으로 밀어내고 서역을 장악하기 위한 공략을 거듭하는데, 40여 년이 지난 기원전 60년경에 장안에서 서역에 이르는 교역로에 대한 지배적인 영향력을 확보하게 된다. 이로써 서역 곧 실크로드의 경제적 이익은 그 동쪽 기점이자 중국의 정치경제적 중심지인 장안으로 귀속하게 된다. 이것은 거대한 동서교역시스템의 핵심부를 장악하기 위한 서북 오랑캐와 중국 간의 1차 대결에서 중국이 승리했음을 의미한다. 이후 한나라가 거듭해서 재정비했던 長城과 돈황의 서쪽에 세운 玉門關은 실크로드의 경제적 정치적 지배력에 대한 이정표로서 기능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경계로 새롭게 확보된 영역이 중국의 전통적인 사회시스템에 의해 성공적으로 통제되기 시작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서진 시대의 막을 내리게 한 팔왕의 난과 영가의 난은 장성과 관문이 외부의 적을 막아준다고 해도, 그 내부로부터의 붕괴는 어찌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 내부의 붕괴는 내부의 붕괴로만 끝나지 않았다. 장성의 안과 밖으로 분리돼 있던 서북의 오랑캐들이 오래전에 잃어버렸던 본래의 영향력을 회복할 수 있는 모처럼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강북에는 선비족 탁발부가 세운 北魏가 강북을 통일하는 439년에 이르기까지 흉노(匈奴)·갈()·선비(鮮卑)·저()·강(羌)의 다섯 오랑캐가 열여섯 이상의 나라를 세우며 명멸하게 된다.
그런데 서진이 무너지기 이전부터 장성의 안에 있었던 오랑캐든 아니면 바깥에 있었던 오랑캐든 간에, 전통적 정주사회였던 중국을 지배하기에는 많은 것이 부족했다. 지배층과 피지배층 간에 사회시스템을 작동시키는 원리를 전혀 다르게 이해한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일 수밖에 없었고, 그 새로운 작동원리를 찾는 혹은 선택하는 책임은 지배층에게 있었다. 물론 피지배층이 순순히 받아들이는가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지만.


초기의 시도들은 단순하고 명료했다. 제일 많이 사용된 방법 중의 하나는 한족을 중간 관리자로 등용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느 시대에나 그렇듯이, 중간관리자에게 시스템의 운영의 상당부분을 맡긴다는 것은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것과 다르지 않다. 더군다나 전통의 중국적 질서는 오랑캐 출신의 새로운 지배계층에게도 그 전통의 중국적 질서에 피곤해진 피지배계층에게도 달가운 것은 아니었다. 결국 좀 더 근본적인 처방을 필요로 하게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을 뿐이다.
여기서 유교질서를 대신하는 어떤 것이 주목받게 됐다. 중국 내부의 측면에서 보자면, 위진 시대 이후 새롭게 등장한 玄學이나 민간의 도교신앙이 그러했다. 외래의 것을 보자면, 한나라 이후 전파되기 시작해서 위진 시대에 이르러 민간신앙으로 그리고 일부 사족들에게 새로운 사조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한 불교가 그러했다. 북조의 국가들은 강북을 차지했기 때문에 서역에 대한 영향력 역시 자연스럽게 획득하게 된다. 그리고 그 서역을 통해 새롭고 지속적으로 전해져오는 불교가 사회시스템을 작동시키는 새로운 원리로 주목받기 시작한다. 불교가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통치자들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말이다.


그 선택은 어느 정도 성공적인 부분이 있었다. 불교는 이미 인도세계와 그 바깥으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세계화의 과정을 거친 종교였다. 이것은 불교가 사회를 작동하는 원리로서도 어느 정도 보편적 특성을 이미 획득하고 있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서북 오랑캐들은 상업에 기반한 교역시스템에 익숙한 이들이었다. 불교는 그 점에서도 장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도시와 상업은 불교가 탄생하고 성장한 주요 배경이었기 때문이다. 상업에 기반한 교역시스템에 익숙한 서북 오랑캐들이 불교를 쉽게 채용할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하지만 당장 선택됐다고 해서 그것이 성공적으로 작동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이 점은 현학이나 도교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회정치적 혼란, 사상적 혼란, 전혀 다른 사회시스템을 배경으로 하는 오랑캐와 한족의 뒤섞임 등, 전혀 새로운 조건의 중국을 안정시킬 시스템의 모색은 그래서 여전히 진행 중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긴 모색의 여정이 끝날 즈음, 隋와 唐이라는 새로운 국가가 등장한다. 그것은 서진 이전의 한족 국가와는 전혀 다른 사회시스템을 구축하고 있었고, 실크로드의 동쪽 거점도시이자 새로운 국제도시로 거듭난 長安이 그 중심에 있었다. 그리고 7세기를 전후한 1백여 년 동안 이 장안을 기점으로 등장했던 새로운 사회시스템이 동아시아라는 새로운 세계를 낳게 된다. 이제 그 장안에 대한 본격적인 탐색을 시작한다.


 


석길암 금강대 불교문화연구소 HK교수
동국대에서 원효 대사에 관한 연구로 석사와 박사과정을 마쳤다. 한국불교연구원 전임연구원을 역임했으며, 주요 논문에는 「금강삼매경의 성립과 유통에 관한 연구」 등이, 저서로는 『불교, 동아시아를 만나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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