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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제국’ 다지려 대운하 건설한 수양제, 唐에 그 果實을 넘겨주다
‘영원한 제국’ 다지려 대운하 건설한 수양제, 唐에 그 果實을 넘겨주다
  • 석길암 금강대 불교문화연구소 HK교수
  • 승인 2015.03.03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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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安, 동아시아를 만든 1백년을 성찰하다_ 04. 동아시아 세계의 정치·경제적 지형도를 바꾼 운하건설

 

북경과 항주를 남북으로 잇는 京抗大運河의 현재 모습.

수문제와 수양제, 운하 보수에서도 서로 다른 생각의 차이 보여
수양제 순행 방식 독특 … 황성 전체가 움직여 막대한 재화 소비
결과적으로 수양제는 세계의 수도 長安을 위해 폭군이 된 셈

 

 

역사에서 배운다! 흔히 사용하는 말이지만, 그 말을 실제로 적용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대부분은 역사에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지나간 역사의 쓰라린 경험을 반복하고 만다. 폭군으로 역사에 기록된 隋의 煬帝(569~618, 재위 604~618) 역시 그런 사람 중의 하나다.


남조 陳(557~589)의 마지막 황제인 後主(553~604)가 나라가 멸망한 뒤에도 수치를 모르고 수나라의 신하로 살다가 죽었을 때, 수양제가 그에게 시호로 붙여준 것이 ‘長城煬公’이다. ‘煬’이란 글자를 시호에 붙이는 경우는 대부분 나라를 말아먹는 경우이다. 수양제는 후주를 조롱하는 뜻에서 ‘煬公’이라 칭해 후주를 비웃었는데, 정작 스스로도 ‘煬帝’라 칭해졌던 것이다. 자신이 직접 목도한 역사에서조차 배운 것이 아니라 그 실패의 경험을 반복했으니, ‘煬帝’라 칭해져도 변명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왕조 수명의 장단을 결정하는 것은 대부분 창업자보다는 그 뒤를 잇는 2대와 3대째 계승자다. 창업보다는 수성이 더 어려운 법이고, 창업자로부터 2~3대째의 계승자에 이르기까지 수성을 위한 노력이 지속되고, 게다가 그것이 성공적이었을 경우만 왕조의 장기적인 안정을 바랄 수 있었다. 수명이 길었던 왕조는 대부분 이 수성작업을 훌륭하게 수행한 계승자를 가지고 있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런 점에서 隋의 경우, 창업자인 수문제의 정치적 성공은 눈부실 정도였지만, 그 계승자인 수양제는 실패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문제는 창업자이면서도 체재의 정비는 물론 국가적 역량을 축적하는데 성공적이었기 때문에, 계승자로서 양제는 대단히 유리한 조건에서 출발했다고 할 수 있다. 조건이 너무 좋았기 때문일까. 양제는 그 좋은 조건을 바탕으로 大業을 꿈꾼다. 양제가 즉위한 이듬해인 605년부터 사용한 연호 大業은 그런 그의 의중을 반영한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양제는 즉위하자마자 먼저 수도 장안과 낙양을 연결하는 운하를 보수했다. 이전의 황제인 수문제 역시 남북을 연결하는 운하의 중요성을 몰랐던 것은 아니다. 중국의 왕조가 남북으로 나뉘어 있을 때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강들이 남과 북의 경계로 작동했지만, 남북을 통일한 수 왕조의 입장에서는 그 동서로 누운 물길이 오히려 남북의 물류를 가로막는 장애물이었다. 때문에 수문제 시절에 이미 이전에 있었던 황하와 양자강을 잇는 운하를 개수하는 작업에 착수하기는 했지만, 본격적인 운하 건설 사업은 아니었다. 수문제는 통일 전쟁 이후 백성의 안정을 최우선 과제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양제에게는 백성의 안정보다 운하의 건설이 먼저였던 듯하다. 즉위한 첫 해에 장안과 낙양 간의 운하 곧 장안의 서북쪽에 있는 渭水를 끌어들여 潼關에서 황하로 들어가는 永通渠를 보수했다. 그런데 이 영통거라는 이름은 양제가 개칭한 것으로, 수문제는 이 운하를 처음 보수하면서 富民渠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단순한 이름의 차이로 보이지만, 여기에는 문제와 양제 사이에 정책상의 입장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문제는 운하를 통해서 백성의 풍요로움을 보겠다는 것이고, 양제는 운하를 통해서 영원한 제국 곧 자신의 권력이 영원하기를 꿈꾸고 있기 때문이다. 부자가 모두 隋 제국의 안정과 영원을 꿈꾸었겠지만, 그 꿈을 실현하는 방법론에서는 확연한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양제는 大業 元年(605)에 황하와 淮水를 잇는 通濟渠와 淮水와 양자강을 잇는 溝를 개통했는데, 이로써 수도 장안에서 양자강 입구의 江都 곧 揚州에 이르는 수로가 온전히 개통된 것이었다. 그리고 608년에는 황하와 북경 부근의 涿郡을 연결하는 永濟渠가 개통됐다. 양자강에서 太湖를 거쳐 杭州의 錢塘江과 이어지는 운하는 양제 통치 기간에 개통되지는 않았지만 공사는 이미 진행 중이었다. 이 정도로도 양제가 의도했던 본래의 목적은 달성됐다고 생각되는데, 운하 건설의 가장 큰 목적은 양자강 삼각주에서 생산되는 양식을 낙양을 거쳐 도성인 장안과 북경 주변의 탁군에 공급할 수 있는 안정적인 물류망을 확보하는데 있었기 때문이다.


장안은 도성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서북의 이민족을 방어하고 공략하는 배후기지였고, 탁군은 동북의 이민족을 방어하고 공격하는 최전선이었다. 수도이자 군사기지인 장안과 동북방 전진 군사기지인 탁군에 안정적으로 물자가 보급되지 않는다면 제국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 이것이 아마 양제의 생각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 생각에는 수나라의 상하 관료들 역시 동감하고 있었을 것이다. 연인원 1백만 명 이상이 동원되는 大役事가 단순히 황제 한 사람의 생각에 의해서 결정되고 시행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낙양 근처에 곡물창고인 洛口倉과 回洛倉을 지었는데, 각 8천 석 가량을 보관하는 지하창고 3천 개와 3백 개를 갖췄다고 한다. 이 곡창들은 양자강 삼각주에서 생산된 곡물을 북방에 공급하는 물류창고였던 셈이고, 낙양은 각 운하들이 교차하는 물류기지의 중심지였다. 이 때문에 양제는 낙양을 東京으로 삼고, 치세의 대부분을 洛陽과 江都에서 보내고 있다. 운하라는 물류고속도로를 건설하고, 그 물류 도시 낙양을 중심으로 제국을 경영하려 했던 속셈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 수양제였기에 東京인 낙양의 건설 역시 필수적인 것이었다.

수양제, 東京 건설과 고구려 정복전쟁에 국력 소비
이 대업 원년의 東京 건설에만도 연인원으로 따져 장정 2백만 명을 동원했고, 같은 해에 通濟渠와 溝를 개통하는데 역시 연인원 백 만이 넘는 백성을 동원했다고 한다. 남자만으로 부족해 여자까지 동원했다고 하니, 백성의 살림살이는 전혀 돌보지 않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사실 양제가 개통한 대부분의 운하는 온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이미 춘추시대부터 부분적인 운하 건설이 진행됐고, 남북조 시대에도 부분적으로 운하의 정비와 개통은 계속 이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남북을 관통하는 물류망으로서의 대운하망을 갖추지 못했을 뿐인데, 양제는 그것을 국가적인 규모로 그리고 조직적으로 건설하고 정비했다는 점이 달랐다.


물론 다른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전에 이뤄진 지엽적인 운하들이 각각 수년에서 수십 년에 걸쳐서 조금씩 건설됐던 것과는 달리, 양제는 그것을 불과 몇 년이라는 단기간에 대륙적인 규모로 시행했다. 현대 중국정부 역시 양자강의 풍부한 수량을 돌려 북부의 황하와 淮河 그리고 海河의 유량을 조절하는 이른바 ‘南水北調’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환경문제나 수질 등까지 고려한 현대적인 이 사업은 수십 년에 걸친 검토 끝에 장기 건설 사업으로 진행되고 있다.


양제의 운하 건설은 무려 2천 킬로미터에 가까운 운하를 건설하면서, 그것도 인간의 노동력만을 투입해 이뤄냈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전광석화처럼 진행된 大役事였다. 이러한 무리한 사업을 단기간에 진행했다는 점에서, 또한 그 무리한 사업의 결과물을 활용해 유람을 즐기고, 그 유람을 통해서 다시 백성들에게 고통을 가중시켰다는 점에서도 수양제는 백성의 삶에는 무관심한 제왕이었다.
양제는 운하를 완성한 뒤에 江都 곧 양주까지 세 번에 걸쳐 순행했다. 뿐만 아니라 장성을 정비하는 과정에서도 순행을 마다하지 않았다. 재미있는 것은 순행 방식이다. 장성을 순행할 때는 수레바퀴 위에 거대한 行殿을 설치하고 움직였는데, 천자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해 수십만의 병사를 동원해 이동식 장성으로 그 주변을 호위했다고 한다. 운하를 통해 순행할 때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양제는 자신의 거대한 전용 선박을 行殿으로 꾸몄고, 여기에는 후궁은 물론 왕족과 관료, 그리고 승려와 도사는 물론 외국의 상인까지 동원됐으며, 10만에 가까운 병사들이 호위와 함께 노 젓는 일을 맡았다. 사실상 순행이라기보다는 황성 전체가 움직였던 셈이다. 이러한 대규모에 이동은 그 자체만으로도 막대한 재화를 소비하기 마련이다. 수문제가 20여 년에 걸쳐 축적한 국가적 역량은 양제의 몇 번에 걸친 순행만으로도 쉽게 거덜 날 정도였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어쨌든 새롭게 건설된 운하를 통해서 양자강 삼각주의 곡물들이 낙양의 곡창에 쌓이자마자, 양제는 고구려 정벌에 나선다. 돌궐을 굴복시킨 후로는 고구려 외에 더 이상 외부의 적이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양제는 전후 세 차례에 걸쳐 고구려 정복전쟁에 나섰는데, 동원된 병사는 모두 1백만 명 이상이었다. 필요한 전쟁 물자를 운송하는 인력까지 계산하면, 인력동원만도 그 배 이상이었을 것이다.인력뿐만 아니라 원정 전쟁에 동원되는 물자까지 포함한다면, 이것만으로도 수 제국의 기반은 쉽게 붕괴될 처지였을 것이다. 이미 東京을 건설하고 운하를 건설하는데 막대한 인력과 물자를 동원한 전력까지 있었으므로, 고구려 정복전쟁에 나서는 순간 이미 전쟁의 승패에 관계없이 수의 몰락은 결정돼 있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양제는 과도한 대역사와 연이은 고구려 정복전쟁의 주체로, 결국은 수의 패망 원인을 제공한 주범이었다. 이래서는 폭군에게 주어지는 ‘煬’ 곧 ‘나라를 불태웠다’거나 ‘나라를 녹여버렸다’고 평하는 역사의 비판이 그에게 따라 붙게 된다.


그가 일으킨 전쟁, 그가 밀어붙인 대운하 건설사업,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고된 삶을 살았던 수나라의 민중과 또 왕조의 멸망 등을 생각한다면, 이 같은 평가에 대해서는 반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역사, 나아가서 동아시아의 역사, 그리고 아시아의 역사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그에 대한 일방적 평가는 고려해야 할 여지가 있다.


왜냐하면, 대운하 건설사업 그것 하나만으로도 수양제는 거대한 역사의 흐름을 바꿔 놓은 인물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운하 건설 사업이 역사적 물줄기를 바꾸려는 거시적 의도를 애초부터 가지고 있었다거나, 혹은 중앙아시아 以東의 세력 균형을 완전히 그리고 장기적으로 변화시키겠다는 거대한 공간적 전략에 의해서 시행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대운하 건설은 그 자체로 역사적 흐름과 지역적 균형의 추를 완전히 바꿔버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런 측면에서 수양제의 대운하 건설 사업은 수양제 자신이나 隋라는 왕조의 입장에서 보면 결정적인 패착이라고 할 수 있지만, 대운하 건설이 가져온 역사의 변화를 생각하면, 전혀 새로운 시대를 여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그 장기적 결과가 긍정적인가 아니면 부정적인가에 대해서는 저마다 평가가 다를 것이다. 하지만 평가의 긍부에 관계없이, 대운하 건설이 오늘날의 동아시아라고 불리는 정치·경제·문화적 권역을 창출하는 주요한 계기로 작용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중국 내부적으로 말한다면, 대운하의 건설은 그 자체로서 인적·물적으로 남북과 동서의 유통을 활발하게 함으로써 남북의 풍부한 곡물을 북방에 공급할 수 있게 한 것은 물론이고, 남북과 동서의 문화가 쉽게 융합하는 통로를 제공했다. 무엇보다도 그러한 결과는 중앙집권의 강화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이른바 중국문화권의 결속을 가속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그것은 주변 지역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중국이 하나의 거대한 정치·경제적 권역으로 묶여지고, 그 권역 내부에서의 중앙 집중화 현상이 심화됐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보면, 중국 권역 내부의 일에 그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남북조 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육상 실크로드를 매개로 이어지는 거대한 동서 교역시스템의 주도권을 가지는 국가가 중국에 대해 영향력을 강화하거나 혹은 중국을 장악했는데, 대운하를 계기로 육상 실크로드를 매개로 하는 서북과 동북 지역 이민족의 중국에 대한 영향력이 크게 감소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주변 세력의 약화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중국 권역 내부의 경제적 동력이 운하로 인해 크게 신장됐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였다.


게다가 대운하로 인해 원활해진 동서와 남북 간 인적·물적 교환 능력은 그 자체로 중국이 동서교역의 한쪽 끝이 아니라 중개자로서도 기능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단지 경제적 측면에서만 이야기한다면, 운하로 인해 남북과 동서 교통이 모두 원활해지면서, 중국 대륙 자체가 단순한 생산자로서의 입지만이 아니라 중개무역자로서의 입지도 확보하게 됐다는 이야기다. 곧 동서교역의 동쪽 부분에 대한 주도권을 장악하게 된 것이다.

운하건설, 중국문화권 결속 결과 가져와
이후 시대에 주변부의 여러 민족들이 중국을 정복하고서도 오히려 중국화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던 주된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운하로 인한 경제적 영향력의 급속한 증대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곧 중국을 장악한 왕조가 쇄국정책을 사용하지 않는 이상, 중국은 남아시아와 동아시아 그리고 중아아시아를 매개하는 경제적 블랙홀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입지를 이 운하를 통해서 확보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중국에서 재생산된 문화가 주변부로 급속히 확산될 수 있는 역량으로 작용했고, 그 역량을 매개로 한 문화와 경제 그리고 정치적 교류와 반응들이 동아시아라는 새로운 지역 문화권의 구축으로 이어졌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중국이 분열과 통일을 거듭하면서도 일정한 범주 내에서 하나의 문화권 혹은 경제권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적어도 근대 산업 사회 이전의 세계에서는 가장 우수한 물류수단 곧 가장 첨단이자 가장 값싼 물류수단이면서, 전통의 인적·물적 교환에 가장 적합한 물류고속도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근대산업사회 이후에 중국이 세계 역사의 주도권을 상실한 것 역시 이 안정적인 물류망에 안주해, 새롭게 등장한 교역시스템에 빨리 참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중국 나아가서 동아시아라는 세계의 원천이 된 제국 唐은 폭군으로 치부된 수양제가 건설한 대운하의 과실을 착실히 얻어냄으로써 세계제국으로 성장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보면 수양제는 세계제국 唐, 세계의 수도 長安을 위해서 폭군이 됐던 셈이다.

석길암 금강대 불교문화연구소 HK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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