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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秘史-최찬식의 청구대학 증언]18. CEO(Chief Executive Officer) - 靑丘大學 18年(2)
[대학 秘史-최찬식의 청구대학 증언]18. CEO(Chief Executive Officer) - 靑丘大學 18年(2)
  • 교수신문
  • 승인 2009.03.25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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校舍 受難 

1948~1949年 사이에 夜大는 벌써 그 당시의 晝間大學을 凌駕하는 교육을 실시하면서 基盤을 다져갔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시련이 또 닥쳤다. ‘49년 10월 난데없는 법원 화재로 말미암아 農大 假校舍가 臨時法院廳舍로 指定되니, 우리는 졸지에 校舍를 잃게 된 것이다. 道對策委員會에서는 尙書女中 자리를 斡旋해주었으나 半이 私有라 어려움이 있었고, 市長이 건축 허락을 주었으나 건축비가 없었다. 그 뿐 아니라, 저번 財團을 만들 때 布靴組合에서 舊株金은 서서히 청산해도 좋다고 했는데, 그 해 가을에 鄭씨는 갑작이 곧 整理해야겠다면서 學校돈을 몽땅 가져 가 버리더니, 서울서 事業을 하다가 失敗했다는 소리만 들리고, 사람은 영영 나타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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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財源이 枯渴되어 앞길이 막막한데, 이번에는 大邱大學에서 夜間部를 소리가 비공식적으로 들려왔다. ……당시 情勢로서는 市內 두 곳에서 벌일 필요도 없거니와…… 夜大로서 發足하고, 夜大로 자라온 우리 학교는 그 유일한 성격을 잃게 될 것이며, 시내 敎授人力의 精粹를 招聘할 수 있는 장점도 維持할 수 없게 된다. 夜大는 이미 市內에서 獨特한 存在가 되어있거늘, 지방의 敎育界는 이것을 愛護하고 키워 주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앉아서 남을 怨望할 겨를도 없었다. 우선 臨時場所라도 校舍가 필요했다.

 시내 학교마다, 敎會堂마다 歷訪했으나, 모두 拒絶이었다 - 卽席에서, 혹은 며칠 뒤에. 600名  學生을 街頭에 세워놓고, 한 百日을 밤낮 모르는 시간을 보냈다. 百日이 가까운 어느 날 復明學校長으로부터 校舍를 許諾하겠다는 소식이 왔으니 蘇生한 것만 같았는데, 이 것도 잠시였다. 敎員들이 반대한 것이다. 다시 눈앞이 캄캄한데, 이 때 마침 부탁도 아니 한 李孝祥씨가 自進 앞산 밑에서 내려와, 그 학교 後援會長 資格으로 敎員들을 모아놓고 두 시간을 타 일러 그들을 설득시켰다고 한다. 이것이야말로 하나의 義擧였다. 비록 그 校舍를 使用하기에 이르지는 안 했지마는 그의 盛意는 다름없이 고마웠다.

 復明學校를 안 쓰게 된 까닭은, 그 날 때를 같이 하여 그 동안 國民會 趙 瓊奎(조경규)씨의 努力으로 交涉中이던 布政洞 校舍의 해決을 보았기 때문이다. 布政洞 校舍란 倭占때 그들의 在鄕軍人會가 있었던 건물로, 당시에는 國民奉公隊 本部, 學生義勇隊등 네 개 社會團體가 들어 있었는데, 이들이 趙씨의 斡旋으로 이사해 나간 것이다. 또 하나, 釜山地區 測量分室은 後에 朴魯洙씨의 힘을 빌려 해결되었다. 그 곳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 農大假校舍를 떠난지 꼭 百日만인 ‘49年 3月6日이었다.

 大學 認可 

 狹小하나마 “拂下”를 받아 내 소유가 되었으니 修理를 해도, 增築을 해도 내 마음대로이고, 학생들, 교직원들이 다시 활氣를 찾은 것을 볼 때 나도 더 없이 만족했다. 이제 財團과 校舍가 있으니, 文敎部 認可도 받을 만하다 생각했다. 이것은 학생들의 兵事問題와 職場問題 때문에 時急했다. 그 당시 夜大만 못한 곳도 認可를 받고 있었으나 우리에게는 이것도 坦坦大路가 아니었다.

 첫째, 안으로 그 布靴組合 淸算關係가 未整理인데다 鄭씨의 私的 去來問題까지 끼어서, 이미 確定된 寄附行爲에 書類具備上 문제가 생겼다. 그리고 밖으로는 邱大에 새 學長이 就任한 後에 더욱 積極的인 妨害를 시작했다. 새 學長은 以前 道學務局長時 내게 故然한 障碍가 된 그 사람이다. 邱大는 夜大보다 一年앞서 設立된 學校로서, 倭占때 中樞院參議員들과 大地主들이 財團을 구성하고, 假校舍이나마 大建中學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內容은 어떻든 外貌로는 夜大에 比하여 大家事였다. ……學長은 文敎部를 드나들면서 갖은 中傷을 할 뿐 아니라, 심지어 煽動者를 夜大에 投入하여 일부 학생을 動搖케 했으니, 도대체 교육과는 거리가 먼 행위다.

 이쯤되면 교육이 文敎部 認可에 歸結되고, 夜大로 볼 때는 存續問題가 되어버렸다. 나는 認可를 받아 내는 그 날 그 認可狀을 動搖하는 學生들 머리위에 던져주고 退場하고싶은 마음만 꿀떡 같았다.  傲氣로서도 그 認可란 것을 받아내야만 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敎育이 官에 매달려 거기 隸屬하고 있는 현실이 서글푸기도 하다. 敎育이 官을 이끌고 나가야 하는데…… 敵은 밖에 있기 보담 교육가들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닐까한다.

 如何튼, 그 때 마침 長官이 更迭되어 認可는 前보다 더 어려워졌다. 安浩相씨 때에는 農地改革令등 핑계로 비교적 용이했는데, 白樂濬씨는 취임과 더불어 新規 認可를 一切 否決하겠다는 방침을 선언한 것이다. 그 때 이 隘路를 打開해 준 이가 바로 高秉幹씨[醫科大學長]였으니, 이 분이 만약 靑丘의 창학정신과 지방실정을 力說하여 靑丘의 代辯을 해 주지 안했더라면, 認可가 어찌됐을지 모른다. 무릇 세상일이란 혼자서 되는 일이 없다. 靑丘를 이룩하는데도 有名, 無名 여기에 列擧못할 만큼 많은 사람들의 德澤을 입었다. 크고 작고간에 그들이 가져다 박은 돌들은 靑丘 功 든 塔에서 하나인들 뺄 수가 없다. 高秉幹씨와는 나중에 慶北大學校를 만드는데 同參하는 因緣을 갖게 되었다. [也靑은 처음 財務委員長을 委囑받았으나 靑丘일 때문에 不得已 副委員長을 맡았다.] 숫한 고생 끝에 1950年 4月10日字로 “財團法人靑丘大學”의 認可가 나왔다.

6.25 動亂과 戰時下 授業 

 認可로 安定을 찾고, 圖書購入등 內部施設을 갖추면서 新學期가 한창 進行中 인데 6.25 動亂이 터졌다. 1950年 7月 校舍全部를 軍機關에 徵發당하고, 학생 태반은 입대하고, 사무실하나만 嶺南體育會館에 유지하게되니, 文字그대로 亂中離散이었다. ‘51年 4月에 軍이 撤收한 뒤 校舍를 回收하니, 건물은 毁損되고, 器物도 紛失하고 학생은 半減했다.

 그러나 즉시 전시수업이 시작됐다. 어수선한 中이라도 자리를 정돈하고, 마침 避難온 서울大, 高大등에서 講師를 招聘하니, 講座는 오히려 더 豊富해졌다. ……그 中에는 專任敎授가 되어 우리 敎授陣을 强化해준 이들도 많았다. 理科를 廢止하고 土木, 建築科로 代替한 것도 이때였다. 문자 그대로, 나라의 再建을 위하여 이것은 나의 素志였다. 학생들이 과외 활동을 하는데 나는 一切 그들의 자력과 自營에 맡겼더니, 그들은 學報刊行에, 大學祭 行事에 활기를 보였다. 그들은 施行錯誤를 거듭하는데서 自得을 하고 獨立을 배우는 것이다. 戰時授業 一年이 지난 1952年 4月에는 4年制 大學認可를 받고, 다음 해 ‘53年에는 晝間部를 倂設하여 학생정원 1,280 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一次風波와 理事長 更迭
 
 無常한 세상이라지만, 靑丘의 살림이 불어가고 人員이 많아지면서 나는 씁쓸한 경험을 咫尺에서 겪어야만 했다. 가장 가깝다고 믿던 사람이 배반을 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다시금 나를 사로잡아 마침내는 致命的인 결과로 이끌게 되는데, 나는 이것을 永遠한 世相에 돌려야 할지, 현실적으로 우리나라 지식인의 志操와 德性를 물어야 할지를 모르겠다.……何如튼 倭政때부터 시작한 소위 新敎育에는 德育이란 보잘 것 없는 微微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큰 일로는 우리나라의 悲劇이 여기서 일어났고, 작게는 靑丘의 비극이 이런 風土에서 가능했다.

 ‘53年 봄 나라 전체의 경제가 아직 戰禍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때 學校財政이 넉넉할 수 없었고, 敎職員 俸給은 薄햇다. 그러나 나는 자기희생을 하더라도 그들을 厚待할 方針이었고, 그들의 大部分 또 한 同志의 마음으로 戰時를 認識하고, 日淺한 靑丘의 事情을 이해하여 默默히 勤務하여 때로는 夜深에 이르니, 나도 정말 고맙게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천만 뜻밖에 나로부터 恪別 優待를 받고 있는 어느 분이 風波를 일으켰다. 그는 避難食口 열아홉을 거느리니, 그 生活隘路가 可想이라, 나는 교직원에 대한 面目을 무릅쓰고 巨額을 貸與하여 根本對策을 마련케 했으나 일이 如意케 풀리지 안 하는 모양으로, 窮餘之策이라 하지마는 어처구니없는 妄想을 들고 왔다. 卽, 학생을 無時로 받고, 졸업도 적당히 시키면 學校財政도 좋아지고, 자기 형편도 피일 것이라는 것이다.

 그 時期 그런 학교도 있었다. 그리고 형식만 취하는 사회풍토가 그것을 助長하기도 했다. 그러나 靑丘는 등치는 작아도, 아니, 작으면 작을수록 名譽는 지켜야 했다. 千不當 萬不當한 소리…… <그는 理事長 鄭씨를 끼고 語不成說의 條件을 걸고 肉薄했다.> 이 事件은 마침 내가 盲腸手術後 療養中에 절정에 達했는데, 이 때 수습을 해 준 이가 靑年聯盟副委員長이었던 金永達씨였다.……내게 있어서는 盲腸手術보다 백배 끔찍한 진통이었다. 결과로 鄭씨를 理事職에서 해임하고, 全基守씨로 대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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