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8 08:40 (일)
변화는 성가신 감각 깨울 때 시작된다
변화는 성가신 감각 깨울 때 시작된다
  • 김정규
  • 승인 2023.10.06 09:5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책으로 보는 세상_『장애시민 불복종』 변재원 지음 | 창비 | 308쪽

장애인의 출근길 시위와 이동권 정책
‘불화’는 민주주의 번영을 견인하는 힘

“18일 오전 8시. 서울 중구 지하철 시청역이 고성으로 가득 찼다. 경찰은 방패를 들고 무릎까지 보호장구를 낀 채 ‘막아, 막아’를 외치며 지하철 탑승 시위에 나선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활동가들을 저지했다. … 몸싸움도 벌어졌고 … 전장연 발언과 지하철 열차 지연 안내방송, 경찰 경고 방송 등이 겹치며 현장은 아수라장이었다.” 

한 언론사의 전장연 탑승 시위를 보도한 내용이다. 이어서 “출근길 강 모씨(36)는 ‘이제 (철도) 파업이 끝난다고 괜찮다고 해서 지하철을 타러 왔는데 연달아 시위하니까 불편하다’라며 ‘시위는 통근 시간만 피해줬으면 좋겠다’고 했다”라는 내용을 덧붙이고 있다.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시위의 형태는 다양하다. 침묵·비폭력 같은 것도 있고 미국의 흑인 민권 운동처럼 과격한 것도 있다. 전장연은 과격한 방식을 선택했다.

지체장애인이자 인권활동가 변재원은 『장애시민 불복종』에서 전장연의 시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장애인들이 지하철을 타려고 하는 순간부터 이동권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다. 장애인들이 출근길에 지하철을 타려고 해서 비장애인 시민들이 피해를 호소하거나 답답함을 느끼는 순간부터 이동권 정책에 대한 법과 예산이 이야기되기 시작한다.” 일반 시민들이 움직여야 정치권이 움직이기 때문에 시민들에게 관심을 호소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시민들이 전장연의 시위를 감내하고 관심을 가져준 덕분에 서울 지하철역의 90%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하고, 서울 시내 저상버스를 55% 수준까지 늘리는 성과를 이루었다. 

이렇게 늘어난 엘리베이터와 저상버스는 누가 더 많이 이용할까? 유모차를 끌고 나온 엄마, 나이 많은 어르신, 여행용 캐리어를 끌고 다니는 외국인 관광객, 짐을 나르는 택배 노동자들이다. 전장연은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약자를 위한 역사적인 발전의 입장에서는 결국 이기고 있는 것이다.

또한 전장연 시위는 장애 때문에 집 밖으로 나설 수도, 학교에 갈 수도, 직장을 구할 수도 없는 이들에게 세상과 소통하는 계기를 만들어 준다. 자신의 몸 자체가 장애인 권리 보장을 요구하는 유일한 근거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고, 그럼으로써 자신의 몸을 더 아끼고 사랑하게 한다.

출근길 이동권 관련 시위는 과연 어떤 의미를 갖고 있을까. 사진=전장연 페이스북

변화는 성가신 감각을 일깨울 때 시작된다. 프랑스 철학자 랑시에르는 ‘불화’가 정치의 본질이라고 보았다. ‘분배를 목표로 한 합의’는 정치(politics)가 아니라 치안(police)을 위한 활동이라고 주장했다. 민주주의 정치는 그저 자원을 나눠 갖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간 존재를 부정당했던 ‘몫 없는 자’들이 자기 몫을 추구하기 위해 존재한다. 이들이 자기 몫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불화’는 민주주의의 위협 요소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번영을 견인하는 힘이라는 것이다.

미국과 영국의 선진적인 장애인 정책은 민주주의의 신이 내려준 선물이 아니다. 국가가 주도해 만든 결과도 아니다. 그저 불화를 두려워하지 않은 장애인 당사자들의 목소리가 만들어낸 일상적 민주주의의 결과물일 뿐이다. 우리가 아직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믿는 것은 사회의 불평등을 최소화하고 자유와 평등의 번영을 꿈꿀 수 있는 합리적인 제도라는 최소한의 전제가 있기 때문이다.

권력자가 소수자를 무시하는 사회적 현상은 선거민주주의라는 한계 속에서는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소수자가 차별받는 사각지대를 해소할 수 있는, 조건의 평등을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당사자와 시민들의 ‘참여’뿐이다. 

시민이 약자의 말을 더 많이 듣고 자기의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보다 적극적인 민주주의를 꿈꿔야 한다. “밀실 속에서 은밀한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거리에서 성가신 감각을 일깨울 때” 사회가 정직하게, 정의롭게 변화해 갈 수 있을 것이다.

 

 

 

 

김정규 
한국대학출판협회 사무국장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