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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네 모스크와 미래 건축
젠네 모스크와 미래 건축
  • 김정규
  • 승인 2021.07.02 09: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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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규의 책으로 보는 세상_ 『건축, 모두의 미래를 짓다』 김광현 지음 | 21세기북스 | 340쪽

 

주민 모두가 건설자이자 건축가

미래의 건축은 공유가능하고 확장성이 필요

부동산, 특히 아파트 가격 폭등으로 나라가 흔들리고 있다. ‘영끌’과 ‘로또 청약’이 나타났다. 해설이 필요한 투기규제와 중구난방 주택공급대책이 발표되었다. 인허가 과정에 있는 자들의 비리가 난무한다. 이제 보통 직장인들에게 서울 집 한 채는 그림의 떡이 되었다.

이런 사태의 배경에는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주택을 짓고 사서 사는 사람들이 그것을 소비재로 인식하는 경향이 가장 큰 몫을 차지할 것이다. 건축물은 사람보다 오래 산다. 한번 지어지면 50년, 100년, 천년을 견디기도 한다. 그런데 이제는 주택을 냉장고처럼 필요할 때 사서 쓰고 치워버린다. 공유 형태로 시작된 인류의 주거가 격리와 배제의 단계를, 소비자본주의를 거치면서 개인화한 소비재가 된 것이다.

진화론적으론 소비자본주의는 물질주의가 아니라 기호학이다. 학위증서, 명품가방, 자동차, 집 등은 자신을 드러내고 뽐내려는 공작의 꼬리와 다를 게 없다. 좋은 유전자, 건강, 사회적 지능 등 개인의 우월함을 보여주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1960년대 미국 펜실베이니아에 살던 노먼 피셔 부부의 주택에 대한 태도를 보자. 55평 남짓한 집을 설계하는 데 4년, 짓는 데 3년이 걸렸다. 피셔 부부는 이웃의 소개로 알게 된 어떤 건축가에게 깨알 같은 수많은 요구를 쏟아놓았다. 그럼에도 이 친절한 건축가는 이 요구를 소화하면서 수많은 수정안을 제시해 주었다. 그는 20세기 건축의 거장으로 꼽히는 루이스 칸이다.

피셔 부부는 칸 덕분에 본인의 요구가 알알이 반영된 그 집에 살면서 ‘큰 기쁨’(delight)을 누렸다고 한다. 그리고 나이 들어 집을 신탁기관에 맡기면서도 이 집이 주는 기쁨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고 싶다고 했단다. 그 집이 어떠했길래 이 건축주는 이런 말을 했을까?

 

훌륭한 건축이 탄생하려면...

건축의장과 건축이론 분야의 원로인 김광현 서울대 건축학과 명예교수는 최근 펴낸 『건축, 모두의 미래를 짓다』(21세기북스, 2021)에서, 건축과 인간이 관계 맺는 방식인 사회의 공간화, 공간의 건축화, 건축의 사회화라는 세 단계를 온전히 거쳐야 훌륭한 건축이 탄생할 수 있다고 말한다. 

‘사회의 공간화’란 설계를 의뢰하는 이들이 희망하는 바를 공간으로 바꾸는 것이다. 건축가의 책임은 건축주의 요구를 받아 그를 비롯한 여러 관계인이 공감하는 공간을 제안하는 것이다. 이것을 놓고 양측이 토론한다. 이런 과정을 보자면 건축은 예술이 아니다. 예술은 제안이라는 가설을 놓고 공유하고 합의함으로써 만들어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공간의 건축화’는 앞 단계에서 이루어진 합의를 실제 건축물로 만드는 과정이다. 그 시대의 혁신 기술이나 진보적인 개념, 지속가능성, 소비문화 등이 동원되며, 건축가의 시간과 에너지, 욕망이 가장 많이 투여되는 단계이다. 

‘건축의 사회화’는 완성된 건물이 건축가의 손을 떠나 소유자나 이용자, 또는 사람들의 사회적 관계 속에서 사람들과 직접 관계하는 단계이다. 이 과정에서 사용자나 이용자가 장소나 공간으로써 건축을 체험하고 기억함으로써 건축의 사회적 가치가 확립된다.

그러나 근대건축은 이 세 단계를 하나로 묶어버렸다. 건축물은 재료나 공법, 공간분할도 표준화했고, 살아가는 사람이나 가족의 표준화에도 영향을 주었으며, 지역사회의 표준화까지 지향했다. 그 결과 도시의 풍경은 표준화됐다. 피셔 부부가 집을 짓고 살면서 체험한 ‘큰 기쁨’은 먼 이야기가 돼버린 것이다. 

문명비평가 루이스 멈포드는 사람이 사는 물리적 환경을 ‘그릇’과 ‘도구’로 나누었다. 도구에는 뚜렷한 목적과 기능이 있지만 그릇은 내용물을 담든 안 담든 시간 속에서 무언가를 계속 포용하는 것이다. 그릇은 ‘무대’에 가깝다. 평범한 사람이 살아가면서 예측하지 못한 일이 일어나는 무대, 우리라는 공동체와 함께 펼치는 무대, 사회가 배경이 되는 복잡한 무대다. 한나 아렌트가 말한 ‘활동’이 일어나는 무대다. 여기서 활동이란, 같은 생각을 가졌을 법한 여러 사람에 대해 자발적으로 언어나 몸짓으로 설득하는 행위다. 따라서 “건축이라는 물리적 무대도 이 세상에 하나뿐인 사람들이 타인에게 자기 생각을 자유로이 밝히고 설득하며 공통감각을 확인하는 장소여야 한다.” 

 

한 사회의 근원적 희망을 드러내는 건축

아프리카 말리의 젠네에는 세계 최대의 진흙 건물 ‘젠네 모스크가’가 있다. 이 모스크는 13세기 말에 지어졌는데, 지금도 비가 와서 무너지면 계속 짓고 보수한다고 한다. 이곳 주민들은 3~5월 우기에 대비해 매년 남녀노소 수천 명이 모여 한 달 정도 작업을 한다. 강가에서 반죽한 진흙을 모스크로 옮겨와 벽에 바르고 그 진흙이 마르는 과정을 보고나서 23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바니강에 몰려가 목욕을 한다. 그리고 새로 단장한 모스크 앞에 모여 기도를 마친 뒤 서로 악수를 나누는 것으로 작업이 완료된다.

그러니까 주민 모두가 건설자이자 건축가이다. 모스크를 ‘공유’함으로써 서로 깊은 연대를 느끼며 일체감을 확인한다. 이들에게 모스크는 ‘큰 기쁨’이다. 그래서 이 작업은 축제가 된다. 모스크 건물은 그들 사회의 근원적 희망을 드러내는 모두를 위한 '대승 건축'이다.

젠네 모스크(Great Mosque of Djenné)의 대표적인 3개 첨탑. 사진=위키피디아

형식이 내용을 규정한다고 할 때, 건축은 사회를 만들어갈 수 있다. 공업화에서 정보사회로, 지속가능한 사회로 바뀌어 가면서 개인은 점점 격리되고 소외되며 익명화된다. 그러나 개인은 공동체를 형성하는 단독자로서 새로운 공간에 대한 욕구를 가지고 있다. 

김광현 교수는 위의 책에서 “비움이니 침묵이니 하는 미학적 어휘로 건축가 개인의 취미와 사고를 실현한 작품으로는 현실에 아무 대안을 제시할 수 없다”고 비판하면서, 미래의 건축은 공유가능하고 확장성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회화가 용이한 건축이라야 공동체의 진정한 회복에 기여할 수 있고, 후손에게 물려주어도 그 가치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환경은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유산이 아니라 미래의 아이들에게서 빌린 것’이라는 래스터 브라운의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사족 하나. 땅에 짓는 건축이 이렇게 가야 한다면, 이미 우리 생활 속으로 깊숙이 들어와 있는 사이버상의 건축은 어떻게 가야 할까? 이 분야는 프로그래머의 몫일까? 건축가의 몫일까?

 

 

 

 

김정규  한국대학출판협회 사무국장·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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